[신동호가 만난 사람]“전태일은 인간적으로 동등한 사회 추구”

전태일 40주기, 조영래 20주기 맞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이사장

"참 안타깝습니다.”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이사장의 첫 마디였다. 그 말을 듣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저와 인터뷰합시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 그가 뭔가 말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다.

11월 13일은 전태일 분신 40주기다. 약 한 달 뒤인 12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전태일과 조영래, 20년 간격으로 치열하게 살다 간 두 사람 뒤에 남은 자가 장 이사장이다. 전태일이 ‘노동자 예수’라면 조영래는 그 정신을 정립하고 체계화한 ‘전태일의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장 이사장은 이를 올바로 증거하고 세상에 구현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난 11월 9일 서울 여의도 신문명정책연구원 사무실을 찾았다. 입구에 ‘녹색복지당’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장 이사장은 예전보다 백발이 늘고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목소리와 몸짓에서 묻어나는 열정은 청년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습니다. 요즘 어떤 직책들을 맡고 있습니까.
“신문명정책연구원 이사장직만 갖고 있어요. 가능한 한 다른 직책을 맡지 않고, 활동도 안 하고 있습니다. 아니,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정당을 만들 겁니다. 이번엔 잘 될 것 같습니다.”

속으로 깜짝 놀랐다. 5년 전 장 이사장을 인터뷰해 ‘여섯번째 진보정당 도전 장기표씨’라는 기사를 쓴 적 있다. 결과적으로 민중당에서 시작해서 개혁신당·새시대개혁당·푸른정치연합·녹색사민당·새정치연대까지 그가 시도한 여섯번의 진보정당 실험은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또 정당을 만들겠다고 하니… 자칫 5년 전 인터뷰의 재판이 될 같아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전태일 분신 40주기를 맞았는데, 감회가 누구보다 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감회라기보다 절실한 생각이 있는 거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요. 진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 전태일 사상을 구현해야 할 때다 싶은데….”

장 이사장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예전 그대로 논리는 정연했고 주장은 확신에 넘쳤다. 먼저 지난 11월 7일 서울광장에 4만여명이 모인 민주노총 집회의 내용을 근본부터 비판했다.

“그 집회가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잖아요.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야말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거다, 비정규직도 못되는 일일 노동자와 일일 노동자도 못되는 비자발적인 실업자는 더 문제다, 40년 전 전태일이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자며 분신까지 하고 그 뒤에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투쟁했는데 지금 우리 노동자들의 처지는 40년 전보다 더 나은 게 없다, 이게 주요 내용 아닙니까. 그래서 연대를 더 크게 해서 자본과 권력을 향해서 더 강력하게 투쟁해야 한다, 이런 식입니다.”

정규직 노동조합인 민주노총 같은 데서 자기들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일일 노동자, 비자발적 실업자 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1호’라고 하는 장 이사장으로서는 환영할 일이 아닌가. 장 이사장은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는 전태일의 뜻, 전태일 사상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의 중요한 지적이죠. 왜냐? 그런 주장들은 상당히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을 바꿀 생각은 안 하고 현존 세상의 질서 속에서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복지를 내거는 투쟁으로는 더 많은 임금도 복지도 얻어낼 수 없고, 그리고 전태일이 꿈꾼, 말하자면 즐거운 노동,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회, 즉 인간 해방의 세상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도 그대로 글로 옮겨놓으면 문맥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는 말 자체가 거의 완벽한 문장이 되는 국내 몇 안 되는 인터뷰 대상자 가운데 한명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즐겨 사용하는 자문자답 형식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뭐가 잘못됐느냐. 지금은 우리 노동운동이 투쟁 역량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투쟁의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겁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든가,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이게 투쟁의 목표 아니에요. 그러면 목표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장 이사장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온갖 사회문제를 거론했다.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 문제, 저출산·고령화 문제, 노인 문제, 입시제도 문제 등등. 이런 난제에 대해 우리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왕 말을 시작했으니까 오늘 인터뷰와 관계없이 이 부분을 좀 얘기해야겠어요. 제가 왜 기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신문명이 어떻고 민주시장주의가 어떻고 인간 해방이 어떻고… 이런 말을 하는지 들어보세요. 이런 문제가 정보화 사회 때문에 생긴 겁니다. 정보화 사회의 내용이 뭐냐….”

장 이사장은 1997년 신문명정책연구원을 개원하기 전인 1994년부터 16년 동안 줄기차게 주창해온 ‘신문명 사상’을 설파했다. 거칠게 압축하면 그 내용은 이렇다. 정보화 사회의 특징은 신제품과 자동화다. 즉 생산성의 향상이다. 이게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산성 향상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일자리 축소라든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한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의 ‘중간기술론’이라든가,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의 ‘제3섹터론’ 정도가 그나마 주목할 만한데, 둘 다 썩 좋은 진단과 해결책이라고 볼 수 없다. 기존의 이념이나 정책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는 새로운 문명에는 새로운 사회 운영의 대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그 새로운 이념과 정책을 담은 것이 신문명 사상이다.

“인간의 해방된 삶이 실현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이념과 목표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과 가치관도 재정립해야 됩니다. 솔직히 좀 건방진 말인데 저 장기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세계가 직면한, 말하자면 세계사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겁니다.”

인간의 해방된 삶이라면 장 이사장께서 주장하는 ‘전태일 정신’이기도 한데, 전태일의 분신이 지난 40년간 우리 노동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제일 큰 건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성장 붐이 조성될 때 그 뒤안길에는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이 있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죠. 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이도 어린 사람이 투쟁의 중심에 섬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각성도 불러일으켰고요. 그 다음에는 지식인의 자성을 촉구한 것이죠.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은 ‘전태일이 바로 예수다’라고 했어요.”

전태일을 예수에 비유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 아닙니까. 기독교의 체계를 세운 사도 바울처럼 전태일의 뜻을 시대정신이자 사상으로 정립한 사람이 조 변호사라고 장 이사장께서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조영래가 참여하지 않았으면 서울대 법대에서 뭐 좀 하다가 정부 당국에 의해 왜곡된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조영래가 사법시험 공부하다 중간에 나와서 운동권 전체와 지식인 사회에까지 확산시킨 겁니다. 또 하나는 <전태일 평전>인데, 전태일을 온전히 표현했어요. 얼마 전 경향신문 기사를 보니 전태일 동생 전순옥씨가 ‘나를 너무 전태일의 동생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나도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각성을 해서 사는 사람으로 봐 달라’고 했더군요. 그냥 살 때의 자기 오빠와 <전태일 평전>을 통한 자기 오빠가 다르더라는 얘기 아닙니까. 이런 평전은 조영래가 아니면 못 씁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원래는 그걸 제가 쓰려고 자료를 모으고 이소선 여사 인터뷰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전태일 수기나 일기장 내용을 제가 잘 알지 않겠습니까? 그 내용을 잘 알면 알수록 조영래가 얼마나 <전태일 평전>을 잘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수기의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은 조영래가 필치도 있고 전태일이 위대하니까 슬슬 나오는 대로 썼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수기의 내용을 아는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영래가 아무리 머리가 좋다지만 수기를 100번 읽어요. 절대로 글재주로 썼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수기를 다 외웠기 때문에 전태일의 말을 잘 옮길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중요한 것 아닙니까.”

자료까지 모아놓고 왜 직접 쓰지 않고 조영래 변호사한테 넘겼습니까.
“민청학련 사건으로 둘 다 수배됐을 때인데, 저보다 조영래가 좀 형편이 나았어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행동가입니다. 그래서 조영래한테 넘겼는데 그게 잘 한 거죠.”

장 이사장께서도 전태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글도 잘 쓰지 않습니까.
“조영래는요, 탁월합니다. 정말 탁월합니다. 제가 조영래를 잘 알지 않겠어요? 그 탁월함이 머리가 좋기 때문에 나온 게 아니에요. 머리 좋은 사람이 조영래뿐이겠어요. 집요하거든요. 저는 글을 굉장히 빨리 써버립니다. 탁 떠오르면 금방 쓰죠. 조영래는요, 밤을 새웁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권인숙양 변론문 있죠, 재판에 들어가기 10분 전까지 썼습니다.”

전태일의 어떤 점이 장 이사장과 조 변호사를 감동케 했습니까.
“제가 전태일을 나름대로 연구하고 배운 게 뭐냐면 첫째가 사랑의 원리입니다. 전태일이 어째서 그렇게 인간을 철저하게 사랑했을까요. 그건 자기의 고난에 찬 삶에서 나왔습니다. <전태일 평전> 맨 앞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조금만 불쌍한 사람만 보아도 하루 종일 마음이 언짢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제가 말을 만들었어요. 고난에서 사랑을 얻고, 사랑에서 지혜를 얻고, 사랑과 지혜에서 해방을 얻는 이것이 전태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이걸 하나 제가 배웠고요….”

두 번째는 전태일이 ‘인간성의 원형’을 보여주는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장 이사장은 자문한다. 왜? 전태일만 고난에 찬 삶을 살았느냐, 전태일만 지혜를 얻었느냐?
“아니에요. 전태일만큼 고난에 찬 삶은 많습니다. 그러나 다 전태일만큼 살지는 못했거든요. 전태일은 자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까지는 또 좋아요. 높은 꿈과 이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특이한 것 아닙니까. 고난에 찬 삶 속에서 오히려 이웃 사랑을 얻고, 또 그러면서 서로 간에 정을 나누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코자 하는 높은 꿈과 이상을 오히려 키우는, 즉 휴머니티, 인간성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잖습니까. 휴머니티의 원형을 우리가 발견했다면 그대로 살면 되죠. 우리의 삶의 좌표가 될 수 있는 거죠.”

조영래 변호사가 발견한 전태일 사상, 또는 장 이사장께서 재발견한 전태일 사상은 무엇입니까.
“사상이라는 건 인간성하고는 다르죠. 사회를 변화, 발전시키는 하나의 원리로서 제시되는 게 사상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전태일은 민중이라도 역사 발전의, 인간 해방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 거죠. 즉 민중 주체 사상입니다. 그 다음 전태일 사상의 목표는 뭐냐, 이건 제가 만든 말인데 인간의 해방된 삶입니다. 전태일은 즐겁게 노동하게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태를 배격하고 인간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를 추구했고, 서로 사랑하고 인간적인 정을 나누면서 사는 사회를 희구했거든요. 여기에 사회과학적인 이름을 붙이면 인간 해방의 사회죠.”

이 대목에서 갑자기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장 이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정치 행보, 즉 제도정치권의 거물이 된 ‘왕년의 재야’와 달리 ‘영원한 재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변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

“전태일의 사상은 인간 해방의 사회를 제시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언어라는 건 세상의 논리의 속박을 받지 않습니까. 다 역사성이 있는 거고 사회성이 있는데, 제가 새로 만든 게 세상 개벽입니다. 전태일은 사회를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개벽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세상 개벽 사상이 저는 전태일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