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가급적 정치적인 건 안 할 겁니다”

헌재 결정으로 도정에 복귀한 이광재 강원도지사

태풍 곤파스가 아름드리 나무를 쓰러뜨리던 날 이광재 강원도지사는 벌떡 일어섰다. 직무정지의 족쇄에서 풀려난 것이다. 9월 2일 헌법재판소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 받은 지방자치단체장의 직무를 확정판결 전에 정지시키는 지방자치법 제111조 제1항 제3호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이 조항이 헌법상 무죄추정 원칙에 위배되고, 공무담임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법률의 적용을 즉시 중지시켰다.

6·2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 지사는 7월 1일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됐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등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징역형(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헌재 결정이 나기 전 그는 도지사 신분이고 관사와 관용차 등은 이용하지만 도청에 출근할 수도, 도정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 지사가 도지사에 당선됐을 때 초선 정치인의 비서로 출발해 킹메이커, 대통령의 오른팔, 재선 국회의원 등 드라마틱한 이력을 지닌 40대 젊은 도지사가 어떻게 도를 이끌지 궁금했다. 직무정지로 그 궁금증을 해소할 길은 막혔다. 한번 궁금증을 품으면 그게 풀리지 않는 한 새로운 궁금증이 꼬리를 물게 되는 모양이다. 지방자치사상 처음 경험하는 직무정지 상태의 도지사가 어떻게 지내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헌재 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하면서 이 지사는 이름뿐인 도지사로 지낸 2개월이 “참 힘든 시간이었다”고 소회를 밝히고 “직무정기 기간 중 훨씬 더 긴장되게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 힘들고 긴장된 기간의 끝 무렵인 지난 8월 25일 강원도지사 관사에서 그를 만났다. 결과적으로 직무정지 상태의 도지사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게 됐다.

힘들고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이보다 어려운 시절도 많이 겪었잖아요. 한편으로는 일을 열심히 해요. 현장도 가보고 선거 때 했던 얘기들을 구체화하는 작업도 하고, 기업 유치를 위해 사람도 만나고, 18개 시장·군수의 일을 거들어주기도 합니다. 계속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주로 현장을 많이 다니는군요.
“탁상에서는 많은 일을 못 하죠. 어느 대학이 오는지, 어떤 기업이 오면 좋은지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목소리를 들어봐야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어요. 진보가 보수의 정책을 쓸 수 있고, 보수가 진보의 정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책의 구체성, 현실성, 가능성이 중요한 거죠. 그런 건 많은 부분이 현장에서 파악된다고 보기 때문에 많이 다니는 편입니다.”

짧은 기간이고 불완전한 상태이긴 하지만 중앙정치무대에 있다가 지방자치 쪽 일을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저는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게 지역구를 가지고 있었잖아요. 지역구(태백·영월·평창·정선)에서 해왔던 일이 일자리, 교육, 복지였어요.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얘기한 게 ‘3당 노선을 가자’는 거였죠. 식당은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서당은 교육, 경로당은 복지를 말합니다. 이 ‘3당’을 좀 더 연장시키고 확산시키고 보편화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도지사로서 강원도의 가장 큰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동계올림픽 유치죠. 내년 7월 6일에 결정되니까 얼마 안 남았잖아요. 동계올림픽 유치는 강원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계올림픽과 월드컵 개최에 이어 국가적으로 또 한 번 도약할 기회이기 때문에 꼭 유치해야 합니다. 먼저 동계올림픽과 알펜시아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죠. 도지사 당선되고 알펜시아에 다섯 번 이상 갔어요. 전문가를 모시고 가서 계속 조언을 듣고 있는 중이에요.”

도정이 화제에 오르자 이 지사의 말이 계속 이어져 중간에 끊기 어려웠다. ‘승리에 배고프다’고 했던 히딩크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정에 배고픈’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강원도에서 바이오산업을 일으켜보고 싶어요. (평창군 대화면 신리 일대 278만㎡에 조성되는) 서울대 농생대를 중심으로 한 식품·화장품 등의 그린바이오, 춘천 스크립스코리아 항체연구소라든가 한화제약 등과 연계한 제약 부문의 레드바이오, 고성·양양의 심층수 산업을 기반으로 한 물·화장품 쪽의 해양바이오가 있습니다. 웰빙이라고 하면 건강하고 젊은 피부를 가지고 오래 사는 것 아닙니까.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스트레스 적게 받고 살아가는 데는 강원도가 최적지죠. 강원도 시대를 한번 만들고 싶은데, 추상적인 게 아니고….”

이 지사는 인터뷰 다음날 철원·양양군수와 함께 수도권의 4개 기초단체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친환경 쌀을 학교 급식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수도권의 친환경 무상급식이 단순히 아이들 밥 주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농업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보는 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 식탁에도 변화가 오게 되고요. 먼저 친환경 쌀을 공급하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내일 가는 겁니다. 또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교육인데, 대안학교부터 리조트 옆의 최고급 학교까지 교육의 다양성으로 성공한 강원도….”

이 지사의 말은 끝날 줄 몰랐다. 키워드는 앞에 말한 일자리와 교육, 복지였다. 이 세 가지를 화두로 ‘행복한 강원도’를 만들고, 나아가서 ‘행복한 대한민국’을 강원도에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유능한 진보, 성공하는 진보를 꿈꾸고 있다. 기회를 잡아 약간 화제를 돌렸다.

강원도가 너무 개발에 치중하거나 관광 부문에 과잉투자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아직 고급화된 리조트는 부족해요. 저는 개발 쪽은 조금 고급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좀 부족한 점은 자연을 보호하면서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명상센터 같은 것, 즉 명상하고 요가하고 삶의 내면을 깊게 하고 자연학습을 하고… 이런 부분이 떨어집니다. 또 하나는 사계절 레포츠가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전문 강사가 부족해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레포츠 전문학교로 바꾸려고 노력할 겁니다. 또 음식 부분은….”

이 지사는 다시 횡성 풍수원성당에 바이블탑을 세우고, 틱낫한 스님의 프랑스 플럼빌리지와 같은 명상센터를 강원도의 자연 속에 만들고, 영동지역에 어마어마한 소나무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등 자신의 구상을 열심히 설명했다. 이쯤에서 화제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옛날로 돌아가서) 참여정부의 2인자라고들 하는데….
“카카카(웃음),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데 괜히… 그것 때문에 코피 터지고 그랬죠. 노무현 대통령이 저를 굉장히 아꼈던 건 틀림없지만 제가 2인자라는 건 과장된 얘기예요.”

지나고 보니까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아쉬운 점은 제가 청와대에 안 들어가고 예정대로 스탠퍼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는 거죠.”

하고 싶었는데 못 다 한 일이 있습니까.
“정책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헌을 했어야 됐고, 청와대를 이전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이에요. 개헌은 1987년 이후 민주화에 질적 도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고, 청와대 이전은 그 땅을 시민한테 돌려주자는 취지죠.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대통령궁이 두 번째쯤 클 겁니다. 저는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과 별개로 청와대를 옮기고 그 자리에 근현대사 박물관을 만들고 그 뒤와 성북동 일대를 열어주면 세계적인 공원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제가 꼭 해보고 싶었고 구체적인 부지도 생각해봤는데… 그게 좀 아쉽죠.”

노 대통령에게 그런 제안을 했습니까.
“처음 검토한 건 1995년 조순 서울시장 때였어요. 행정수도 이전 얘기가 나오기 전에 노 대통령께도 이야기를 했어요. 그 뒤에 행정수도 얘기가 나와서 그러면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니까….”

이 지사는 아파트 1층을 보육·교육·복지시설로 만드는 것도 꼭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업자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고 1층을 공동체의 공간으로 내놓도록 해서 그것을 활용하는 방안이다.
“제가 아이를 키워봐서 알아요. 1층에 아이를 맡기고 가면 엄마나 아빠가 직장에서 좀 늦게 돌아와도 되고, 교통사고나 유괴 위험도 적어지고, 아파트 단지 내의 아줌마나 할머니·할아버지 등에게 일자리도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꼭 해보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2인자인데 그걸 못 했단 말이에요.
“청와대에서 그걸 한참 하다가 나오는 바람에 못했거든요. 이번에 강원도에서 하려고요.”

권력의 핵심에도 있었고, 국회의원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는 등 두루 경험을 쌓았는데, 그 노하우를 갖고 도정에서는 어떤 목표와 비전을 설정했습니까.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인간사로 보면 행복한 인간을 늘리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또 하나는 우리가 철책에 가로막혀 섬나라가 돼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정치를 할 때 통일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후손에게 하나 된 대한민국을 물려줘야 된다는 거지요.”

이와 관련해 이 지사는 ‘대륙국가론’을 주장한다. 북한을 관통하는 철도를 만들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유라시아 철도를 거쳐 유럽까지 육로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그는 김두관 경남지사, 안희정 충남지사와 연해주를 방문하고 더 많은 자치단체장을 참여시켜 배와 열차로 부산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갔다 오는 ‘희망레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부산에서 빈까지 배로 가면 28일이 걸려요. 유라시아 철도를 타고 가면 23일이 걸리고 물류비가 24% 절약돼요. 철도가 열리는 순간 물류의 근본적인 변화는 물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 중심에 강원도가 있습니다. 한반도가 하나 되는 운명에 기여하는 중심축이 된다는 거지요.”

2012년은 국내외적으로 권력교체기입니다. 자전적 에세이집 <이광재 이력서>의 부제가 ‘30대는 정도전처럼, 40대는 이성계처럼’인데, 정도전이라면 이 중요한 시기를 어떻게 대비하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단체장들 모임을 했는데요. 너무 정치적인 이슈에 매달리지 말고 우리가 단체장으로 뽑히니까 정말로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도록 하자, 구체적인 삶에 몰두하자고 했어요. 저 스스로도 그런 생각입니다. 가급적 정치적인 건… 안 할 겁니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에게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大鵬逆風飛生魚逆水泳,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이라고 적힌 편액을 선물한 것이 의미심장하더군요.
“현재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너무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말고 소신대로 살라가라는 뜻이죠. 제가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죠.”

자신의 처지를 빗대 손 고문에 대한 얘기를 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허허허.(웃음)”
이 지사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매주 책을 10권 정도 사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뽑아 정리한 독서록을 매년 내고 있다. 금년 독서록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연장통)라는 제목으로 지난 2월 출간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을 한번 이겨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역사책에 계속 관심을 가졌어요. 내년에는 독서록 대신 <내가 본 세계흥망사>를 낼 생각이에요. 24개 나라를 대상으로 어떤 나라는 왜 흥하고, 어떤 나라는 왜 망했는지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것이죠. 원고가 상당히 많이 됐는데, 그건 제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본 것이니까 해당 나라 전공 학자한테 더 물어봐야 돼요. 그럴 시간이 없어서 아직 원고를 다 못 끝냈어요.”

이 지사의 세대인 386세대가 이제 40대가 되어 486세대로 바뀌었는데, 저서의 부제대로 이제는 ‘이성계’를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는 ‘세대의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베이비붐 세대이자 고교 평준화 세대로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부마항쟁과 198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전두환 철권통치, 2·12총선, 1987년 6월항쟁을 겪으며 격렬한 성장을 했습니다. 정치권뿐 아니라 영화판이라든가 문화계를 이끌고 있는 것도 대부분이 그들이고, 1조원짜리 펀드를 만드는 벤처 ‘1조 클럽’이 다 그 세대 아닙니까. 이 세대만이 신·구세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봐요.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더 많은 민주주의’를 넘어 ‘더 좋은 민주주의’로 질적 전환을 이룰 수 있는 세대인 거죠.”

인터뷰 전날 ‘강원도 자존심과 이광재 지키기 범도민 비상대책위원회’는 30만여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6·2지방선거 승리와 직무정지, 7·27보궐선거, 도지사직 복귀 등을 거치면서 이 지사는 좋든 싫든 강원도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선명한 아이콘이 돼버렸다.

도지사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강원도의 정서를 대변하고 도민의 정치적 열망을 책임져야 할 위치가 된 것 같습니다.
“자리를 좇으면 자리도 오지 않고 허망한 일만 많이 생기고요. 꿈을 좇으면 자리가 따라 올 때가 있더라고요. 제 출마의 변이 그거잖아요. ‘사랑한다면 모든 걸 거는 거다.’ 제가 승리를 생각했다면 나오는 게 바보죠. -23% 지지(상대 후보와의 여론조사 격차)에다 재판 계류 중인 사람인데 말이에요.

신동호가 만난 사람

내가 진정으로 강원도를 사랑한다면 나의 모든 걸 걸고 하는 거다…. 진실로 저는 강원도민을 고맙게 생각하죠. 제가 처음 국회의원이 될 때도, 두 번째 될 때도, 도지사 될 때도, 지난 보궐선거 때도… 제가 도민한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한 삶을 살아야지…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