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중국의 '별'이 된 조선족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남기(77) 인민해방군 상장(대장) 일대기를 담은 〈조남기전(趙南起傳)〉이 최근 베이징 인민출판사에서 나왔다.

취아이궈(曲愛國)-쩡판샹(曾凡祥) 공저인 이 전기는 총 574쪽으로 20여 장의 사진을 곁들여 조남기 장군이 일제 말기 불과 13세의 나이로 중국에 건너간 뒤 한국전쟁에 참전,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과 한 방을 쓴 일화 등 다양한 인생역정을 소개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

조남기는 1927년 4월, 충북 청원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趙東植)는 3-1운동 당시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 탄압이 심해지고 고향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온 가족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1940년 초, 희망의 땅인 만주로 건너갔다. 백두산 자락의 길림성(吉林省) 영길현(永吉縣) 차로하( 路河)에 정착한 가족들은 논농사에 매달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제가 도망간 만주지방은 힘의 공백 상태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마적떼마저 나타나면서 동네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조남기는 불과 18세의 나이인 45년 9월, 마을 청년 100여 명을 모아 차로하 자위대를 만들어 대장을 맡았다. 그해 10월, 중국 공산당이 동북지방 장악을 위해 보낸 군대인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連軍)이 차로하에 진입했고 조남기는 이들에 대한 호감으로 주민들에게 부탁해 쌀 10만㎏을 모아서 기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는 46년 12월, 군정대학을 수료하고 토지개혁사업단에 투신, 연변 일대 토지개혁을 위해 현장을 누볐다. 48년 초까지 연길-혼춘-화룡-돈화-왕청, 5개현의 9만4천여 가구의 농민들에게 지주에게 빼앗은 3억8천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분배해주는 일을 맡았다.

한국전쟁 참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중순, 북한은 중국 공산당에 동북지방의 조선족 간부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남기도 당시 북한 파견 간부로 선발됐으나 한국전쟁의 전세가 악화되자 북한으로 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중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 7월 13일 서둘러 만든 해방군 소속 동북변방군(중국은 북한이 남한 일대를 석권하던 7월 중순에 이미 군대를 편성해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했다)에 편입돼 연락원을 맡았다. 10월 23일 새벽,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부(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에 투입하는 해방군 병력을 통괄지휘하는 기구) 작전처 참모로 북한에 들어갔다.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방에 갔던 13세 소년이 이제는 23세의 중국 청년장교로 참전하게 된 것이다.

조남기가 평안북도 삭주군 대유동에 자리잡은 지원군 사령부에서 한 것은 주로 북한과 중국 고위 관계자들이 회담할 때 통역을 하거나 사령부가 발령하는 작전명령서를 일선 부대에 직접 하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맡은 업무 탓인지 펑더화이(彭德懷) 지원군 사령관의 숙소 바로 옆에다 숙소를 배정받았다. 그가 대유동의 숙소로 들어가자 이미 러시아어 통역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가 바로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인 마오안잉이었다. 연배도 비슷하고 전쟁 상황인지라 둘은 금세 친해졌다. 마오안잉은 늘 군복 상의 호주머니 안에 얼마 전 결혼한 아내(劉思齊-당시 21세) 사진을 넣고는 잘 때마다 베갯머리맡에 놓곤 했다. 다정다감한 성격이면서도 마오안잉은 자신이 마오 주석의 아들인 체를 하지도 않았고 사령부의 지휘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가 마오 주석의 아들이라는 것을 비밀에 부쳤다.

1950년 11월 24일(이 책이 잘못 기술한 부분임. 사실은 11월 25일. 마오쩌둥 전기나 훙쉐즈(洪學智-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회고록은 모두 11월 25일로 기록하고 있음)은 조남기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새벽, 조남기는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다. 전날, 미군 정찰기가 대유동 상공을 선회한 적이 있어 사령부 지휘관은 모든 인원에 대해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피하도록 지시했다. 조남기도 아침식사를 한 뒤 물건을 정리해 산으로 올라갔다.

오전 10시 남짓, 공습경보가 울렸다. 미군 전투기 4대가 구름을 뚫고 대유동 상공을 날아왔다. 전투기가 지나간 뒤 경보는 해제되지 않았다. 조남기는 그대로 산에 머물렀다. 몇 분이 지나자 전투기가 갑자기 돌아왔다. 그대로 내려꽂더니 산기슭 목표물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당시 마오안잉은 작전처의 가오루이신(高瑞欣) 참모와 함께 사령부 건물 안에 있다가 화를 입었다(당시 마오안잉은 늦잠을 잔 탓에 아침식사를 못해 시장기를 느낀 데다 미군 전투기가 사령부 건물 위를 지나치자 방심해 사무실로 돌아갔다가 화를 당했던 것으로 사료는 전하고 있다).

황혼 무렵, 지원군 사령부 소속 전체 직원들은 펑더화이 사령관을 따라 나가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의 시체를 대유동의 산기슭에 안장했다(당시 마오안잉의 나이는 28세였다. 펑더화이 사령관은 사고 당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보고를 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마오쩌둥 주석이 충격받을 것을 우려해 이듬해인 1951년 1월 2일 보고를 했다고 사료는 전하고 있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은 맏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조남기는 51년 중국인민지원군 후방근무사령부로 전보발령을 받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수품의 일선 수송에 대한 실무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박헌영 당시 북한 부수상 겸 외상이 펑더화이 지원군 사령관과 면담할 때 한국어 통역을 맡았다가 박 부수상으로부터 "조국에 와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펑더화이 사령관은 조남기에게 갈 생각이 있으면 보내주겠다고 의사를 타진했지만 그는 이미 중국 생활과 습관이 밴 탓으로 북한에 가지 않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문화혁명의 시련

1966년 8월,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연변에도 불똥이 튀었다. 그해 12월 일부 중국 대학생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가 북한 땅에다 '국제홍위병을 만들자'는 구호를 붙이는 일까지 생겨났다.

가장 큰 현안은 조선족의 대표 인사인 주덕해(朱德海)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그는 길림성 부성장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당서기 겸 주장, 연변군구 제1정치위원을 지낸 연변의 대표적인 당-정-군 지도자였다. 그는 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행사 당시 조선족을 대표해 행사에 참석했고 저우언라이 총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문혁파들은 그를 타도하려 한 것이다. 조남기는 주덕해를 숙청할 경우 조선족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우려해 가능하면 주덕해를 보호하려고 했다. 결국 그는 주덕해를 베이징에 몰래 보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마오위안신의 공격을 받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67년 9월부터 72년 3월 퉁화군구 정치위원으로 현역에 복귀할 때까지 4년 반의 세월이 그에게 가장 큰 시련기였다. 그는 2개월에 걸친 정치 성향 심사에다 재교육을 위한 정치 학습반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히 해야 했다. 아내는 노동 개조를 위해 농촌에 내려가야 했고 그가 4명의 자녀를 다 챙겨야 하는 어려움이 계속됐다.

72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동북지방에 들러 '조선족 간부들을 외국의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의 정치적 생명도 부활을 맞았다. 당시 심양군구 정치위원이며 요녕성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날리던 마오위안신도 저우언라이 총리의 결정에는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해방을 맛본 것은 76년 10월 4인방이 몰락하고 마오위안신이 구속되면서였다. 그는 문혁의 시련에 대해 좋은 인생공부였다고 회고했다. "45년 혁명에 참가한 이후 그동안 인생이 순조로웠다. 25세에 연대장급 간부, 40세가 못돼 사단장급 간부로 국경 일대 군구를 책임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보면 문혁기간 4년여 동안의 시련은 돈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다

1987년은 조남기에게 인생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10월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제13기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대대적인 군부 인사이동이 단행될 예정이었다. 훙쉐즈 중앙군사위원 겸 총후근부 부장-정치위원은 당시 총후근부 부장을 8년 동안 한 데다 나이가 74세였다. 세대교체가 예고된 만큼 당시 총후근부 부부장 겸 부정치위원이던 조남기는 유력한 승진 후보였다. 공연한 오해를 우려한 조남기는 그해 원단(양력설)을 맞자마자 후방부대 시찰에 나섰다. 4개월 동안 중남부와 서남부 지방 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연변의 퇴직 간부 일부가 익명으로 중앙군사위원회에 투서를 보내 '조남기는 한국의 간첩인 만큼 당과 군의 중요 요직에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익명의 투서는 '조남기는 자신의 동생이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을 숨기는 등 그동안 한국의 간첩으로 일했다'고 지적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는 서둘러 베이징으로 돌아가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찾아가 그동안 얽힌 가족사의 내력을 설명했다.

익명의 투서가 지적한 대로 그의 동생 조남원은 45년 해방 직후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조남원은 30년 이상 헤어진 가족들이 그리워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그는 79년 12월, 동아일보 홍콩 특파원이 쓴 기사에 조남기가 연변조선족 당서기로 있다는 내용을 보고 문의편지를 보냈는가 하면 이듬해인 80년 음력설 무렵에는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에 나와 형님 조남기를 찾기도 했다. 조남기는 당시 동아일보 홍콩 특파원의 편지를 직접 받아 동생의 존재를 알았고 방송을 몰래 들었던 조선족 아주머니의 귀띔으로 다시 한 번 동생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신분이 신분인지라 당시 이같은 상황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원회와 길림성 당위원회에 상황을 보고하고는 일체 동생과의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순한 구두해명으로는 충분하다고 보지 않고 중앙군사위원회에 정식으로 한국 간첩 혐의에 대한 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앙군사위 지시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조사반이 장춘과 연길로 파견돼 철저한 내사를 거친 끝에 마침내 '무혐의 판정'을 받아냈다. 누명을 벗는 과정을 순조롭게 처리했던 탓인지 조남기는 그해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공산당대표대회 도중 양상쿤 부주석의 부름을 받고는 '총후근부 부장에 내정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조남기 장군 약력

1927년 4월 20일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89 출생

1940년 초 조부, 부모와 함께 만주지방으로 감.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에 정착

1945년 9월 길림민족해방동맹 차로하 자위대 대장

1946년 2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입교

1947년 2월 중국 공산당 가입

1950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사령부 정보처

1950년 10월 23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작전과 연락원으로 한국전쟁 참전

1953년 봄 지원군 후근사령부 운수과 과장

1954년 관절염으로 귀국, 치료. 지원군 후근부 직할의원 간호사이던 임춘숙과 결혼

1958년 10월 25일 인민지원군 병력과 함께 북한서 철수

1958년 말 연변군구 정치부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