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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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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옥’에서 온 편지](13)병역거부자로서의 과업은 끝났지만
    (13)병역거부자로서의 과업은 끝났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말이 나를 수식할 단어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병역거부를 결단한 후에도 기꺼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양심이란 단어가 지니는 무게를 견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냥 병역거부자이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인터뷰에 나서야 할 때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스스로를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소개했습니다. 어설프게 병역거부자의 얼굴 역할을 도맡았기에 병역거부 운동 전체를 욕보이기 싫었습니다. 극렬한 혐오를 내뿜는 사람들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덜 거스르기 위해, 기사를 읽을 사람들의 극히 일부라도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언어를 정제했습니다. 그래도 악플을 수만개나 받았습니다. 병역거부자의 정형에 들어맞는 외모나 말투는커녕 누구라도 감동할 만한 극적인 서사를 갖추지도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흔들렸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불릴 자격이 부족...

    1469호2022.03.11 11:18

  • [‘감옥’에서 온 편지](12)생애 가장 고된 겨울
    (12)생애 가장 고된 겨울

    ‘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리라.’높은 담벼락 안을 거닐며 마지막 낙엽을 쓸던 와중에 누군가 자조 섞인 감탄을 내뱉습니다. 바깥세계에서 누렸던 크리스마스의 아늑함을 단 1%도 재현할 길이 없어 애써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건만, 눈치 없이 불행을 입 밖으로 꺼내는 죄수들 때문에 초연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퇴근길 몸수색을 기다리는 복도에서는 교도관의 제지에도 거의 모두가 이성을 잃은 듯 술렁였고, 저 역시 휘청였습니다. ‘박근혜가 사면됐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졌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려 했지만, 석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3000명이 넘는 대규모 사면·감형·복권 명단에 내 이름은 없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2021년의 마지막 날까지 악몽을 잇달아 꿨습니다. 희망고문에 시달리던 날들이 저문 후, 새로 붙은 달력을 원...

    1464호2022.02.04 15:49

  • [‘감옥’에서 온 편지](11)혼자였던 시간, 혼자가 아닌 시간
    (11)혼자였던 시간, 혼자가 아닌 시간

    더없이 외로운 동시에 너무나도 간절히 혼자이고 싶습니다. 한때는 독방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정치·경제적 거물이거나 사형수가 아닌 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습니다. 빈틈없는 감시체계가 작동하는 감옥세계는 보통의 죄수들을 단 한순간도 홀로 두지 않습니다. 한두 평이라도 더 넓은 방에서 함께 일하는 죄수 무리와 별 탈 없이 잘 지내기를 바랄 수밖에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 주로 여성과 가난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죄수들의 말이 제 마음에 불길처럼 번지지 않도록 잔뜩 웅크립니다. 다행히 이곳에서 버틴 시간만큼 주어진 권력에 힘입어 다소 유별나게 굴어도 다른 죄수들이 크게 나무라지는 못합니다.어려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많았습니다. 맞벌이부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홀로 집 지키는 법을 일찍 터득했습니다. 저학년일 때부터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간섭 없는 자유를 누린 기억만 있습니다. 자유를 만끽했다 여겼던 그 시간이 실은 외로...

    1461호2022.01.07 15:26

  • [‘감옥’에서 온 편지](10)출근 앞둔 죄수의 마음 다잡기
    (10)출근 앞둔 죄수의 마음 다잡기

    모두가 잠든 새벽, 느닷없이 잠에서 깹니다. 바깥은 한없이 고요한데 좁은 방안은 격한 코골이 소리로 진동합니다. 모두가 일어나면, 언제 어디서나 환경미화에 진심인 교도관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청소부에 속한 죄수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커집니다. 여느 감독관과 달리 그는 직접 청소도구를 쥔 채 곳곳을 누비며 청소 작업을 감독합니다. 아침부터 벌어지는 요란한 광경을 두고 몇몇 직원은 유난스럽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청소부 죄수 중 작업반장 노릇을 떠맡은 봉사원은 교도관이 쏟아내는 지시를 이행하느라 입동을 지난 기온에도 땀을 줄줄 흘립니다. 다른 작업장에서 봉사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데 예외도 있나봅니다. 하마터면 제가 완장을 이어받을 뻔했는데, 손이 다소 느리고 나이가 어린 덕분에 후보 지명을 피했습니다. 제가 병역거부자임을 밝힌 것도 한몫했겠죠. 어쨌든 저는 교도관의 인사에 만족해 욕먹지 않을 만큼 일합니다.청소 노동 전문가의 업무에 비하면 ...

    1458호2021.12.17 13:23

  • [‘감옥’에서 온 편지](9)죄수를 대체하는 대체복무요원
    (9)죄수를 대체하는 대체복무요원

    오전 8시, 하늘이 티 없이 파란 날씨에도 어두침침한 복도를 걷습니다. 아득하고도 아련한 철창 밖 풍경에 시선이 다다르기 전에 두 열로 행군하듯 다가오는 무리를 마주합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이부터 갓 대학을 졸업했을 법한 앳된 얼굴의 청년까지. 새파란 죄수복과 군청색 교도관 제복 사이, 오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옷은 그들의 어중간한 위치를 뚜렷이 나타냅니다. 그들의 공식 명칭은 대체복무요원. 비공식 약칭은 ‘여호와’입니다. 저와는 다른 배경을 지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거나, 대체역 심사위원회의 의결로 대체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예상했던 우려는 대부분 실현돼 대체복무요원 상당수가 죄수들이 하던 일을 대체합니다.오전 11시, 구치소 밖에 있다는 식당으로 달리듯 빠져나가는 대체복무요원과 다시 엇갈립니다. 견장이 달린 제복만 보면 유난스레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에 죄수들은 어리둥절합니다. 누군가 대체복무요원의 행동을 군시절 장교를 ...

    1452호2021.11.05 14:49

  • [‘감옥’에서 온 편지](8)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알게 된 건 영국 유력 언론이 선정한 ‘100대 소설’을 정복하기로 결심했을 때입니다. 감옥 세계에 들어오면서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온라인서점 계정을 주변에 공유했더니, 수많은 책 중에서 그 소설이 친구 눈에 띄었답니다. 막상 친구의 선물이 제게 닿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교정시설에 방문해 수용자의 지인으로 등록한 사람만 책을 보낼 수 있도록 한 규정, 한 번에 5권 이하만 반입할 수 있도록 한 규정 때문입니다.책을 펴보니 서사보다 작가의 의식을 우주처럼 펼치는 데 초점을 둔 소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다른 작품을 번갈아가면서 읽긴 했지만 4월부터 시작한 이 시리즈의 10번째 책에 간신히 접어들었습니다. 아직도 번역자가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라 한글판 완결이 멀었다는 소식에 깊이 좌절했습니다.“현실을 견뎌 내려면 마음속에서 뭔가 하찮은 미친 짓들을 계속...

    1450호2021.10.22 14:41

  • [‘감옥’에서 온 편지](7)탈출하고 싶은 수컷들의 ‘위계’
    (7)탈출하고 싶은 수컷들의 ‘위계’

    평생의 목표는 온전히 평등한 조직에서 일하는 겁니다. 나이와 연공, 직책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에 속한 모두 간 수평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을 꿈꿉니다. 그런 조직 안에서라면 누구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못할 겁니다.감옥세계에서는 ‘법무부의 시계는 국방부 시계와 같다’라는 격언이 대대로 구전됩니다. 나이에 따른 위계는 작동을 멈추고, 죄수도 군인처럼 조직에서 보낸 시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는 교훈이 담겼습니다. 폭력을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군대의 권위주의를 거부한 내가 들어온 세계에는 신념을 지킬 공간 따위가 없다는 메아리가 매일 울려퍼집니다. 죄수들은 감옥생활에서 병영문화와 닮은 점을 찾아내 각자의 과거를 추억합니다.군대식 위계를 경험한 건 처음이 아닙니다. 교도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불시에 소지품을 검사받고, 줄 맞춰 앉거나 서서 대화가 아닌 훈화를 드는 건 학창시절 12년간 지겹도록 겪었습니다. 오히려 체벌이 없...

    1447호2021.10.01 15:21

  • [‘감옥’에서 온 편지](6)이재용을 ‘일찍’ 떠나보내며
    (6)이재용을 ‘일찍’ 떠나보내며

    그를 처음 만난 건 작업장을 지정받고 청소를 시작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 묵례하며 지나는 무리의 틈에 끼어 있었다고 해야겠죠. 그는 바깥 세계에서 뉴스로 접했던 것보다 약간 야위었지만, 재벌총수로서 지녔던 근엄한 표정은 제법 옅어져 있었습니다. 여유가 넘치는 그의 걸음걸이는 나를 한참 사로잡고 있었던 긴장감을 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감옥생활을 걱정하는 가족에게 “박근혜와 이재용도 지내는 곳”이라며 안심시켰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죄수들은 하나같이 ‘살면서 언제 저렇게 대단한 사람을 코앞에서 보겠냐’ 따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후에도 그를 숱하게 마주쳤고, 언젠가부터 그가 거의 매일 심리치료실인지 수사접견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존재를 신성하게 여기는 무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그의 재판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1444호2021.09.03 15:38

  • [‘감옥’에서 온 편지](5)‘거리 두기 4단계’에서 보내는 감옥의 시간
    (5)‘거리 두기 4단계’에서 보내는 감옥의 시간

    이른 아침, 청소를 시작하다 ‘거리 두기 4단계’가 다시 연장된다는 속보를 들었습니다. 한달 전, 휴게실에서 들뜬 마음으로 연인과 접견을 기다리다 접한 소식처럼 가슴을 덜컥 내려앉더군요. 직원이 코로나19에 확진된데다 거리 두기 4단계 시행이 발표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들. 그날부로 접견과 전화가 모두 금지됐습니다. 간신히 딛고 있던 반대편 세계와 연결된 발판이 무너졌습니다. 때맞춰 언론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절벽에 봉착한 사람을 다루는 동안, 방안의 거울은 먹고 싸는 문제에 매몰된 짐승을 비춥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 내내 외면했던 현실을 마주합니다. 애써 과거와 미래의 나를 현재와 단절시키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전보다 시간은 무거워졌고 말은 날카로워졌습니다.나는 양심수이고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잠시 멈춥니다. 폭염에 진이 빠져 나뒹구는 모습은 예외가 없습니다. 살기 위해 끌어안은 얼음물이 체온으로 덥혀 서서히 녹는 과정에 야속해하는...

    1441호2021.08.13 14:57

  • [‘감옥’에서 온 편지](4)생계급여 결정은 올해도 주목받지 못했다
    (4)생계급여 결정은 올해도 주목받지 못했다

    제 월급은 4만원이 조금 넘습니다. 최저임금으로 따지면 5시간 만에 벌 수 있는 돈이겠죠. 출근은 8시, 퇴근은 4시에 합니다. 주말과 공휴일에도 근무하는데 오후는 쉽니다. 국제사회 합의를 통해 금지하는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건 결코 아닙니다. 딱딱한 바닥에 온종일 가만히 앉아 시간의 압력을 버텨낼 자신이 없어 자청한 일입니다. 먹고 자는 데 드는 돈이 거의 없어 군것질도 넉넉히 합니다. 제가 맡은 일은 나를 감독하는 직원들의 사무실과 침실 청소입니다. 전부터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이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라는 걸 짐작했지만, 청소노동자를 진정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제 업무 강도는 비할 데 없이 낮고 휴게시간은 넉넉한데도 나약한 저는 오로지 일종의 노동계약이 끝나는 날만이 기다려집니다. 이 세계를 떠나는 날이지요.2022년 최저임금이 9000원 이상으로 오른다는 소식에 조금 기뻤지만 다소 불안했습니다. 노동계가 요구했던 1만원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불안함의 이유는...

    1439호2021.08.02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