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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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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11·끝) 분단선에 선 채, 다시 자유를 찾아서
    (11·끝) 분단선에 선 채, 다시 자유를 찾아서

    어느 날 함께 도라산역에 갔던 고향후배가 북한쪽을 응시하며 물어왔다. “언제면 저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10년 전 북측의 DMZ에서 내게 물었던 부하의 질문처럼 남측의 DMZ에서 진지하게 묻는 후배의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근무했던 DMZ 내의 북측 방송국에서 창문을 열어젖히면 남측 DMZ에 위치한 도라산역이 마주 보인다. 엊그제 착공한 것 같은데 벌써 완성의 형태를 갖춰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방송국 후임이 슬며시 물어왔다. “쟤네들 우리보다 잘산다는 게 맞습니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글쎄’라는 단어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부하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의심하고 경계해서라기보다 수년간 온갖 심리전에 노출되어 생활했던 경험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의 상쾌한 공기와 함께 남쪽에서 오는 특유의 냄새에는 기가 막히게 적응했다.휴전선 넘는 귀순자들의 동경과 착각내가 수행한 방송국 업무 중에는 DMZ 내의 북한군 전...

    1226호2017.05.08 16:49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10) 통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원
    (10) 통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원

    3만명밖에 안 되는 북쪽동포와도 함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시험대에 올라 더욱 가혹하게 펼쳐질 통일을 보고 있다. 스스로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과의 형편도 이러한데 한국에 대한 끝없는 적대감과 저항의식으로 교육되고 성장한 북한주민이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국가에 편입되기 쉽지 않다는 것은 간명한 원리이다.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통일학 박사가 됐다. DMZ에서 근무하며 처음으로 분단을 눈으로 보았고, 그곳을 넘어와서는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겪었다. 집요하게 내 삶을 괴롭히는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통일에서 찾은 이기심이 민족의 소원에 업힌 듯했다. 통일학 박사임을 밝히면 통일이 언제쯤 되느냐는 진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곤 한다. 그럴 때면 비전공자가 갖는 궁금증만큼이나마 통일문제 관심자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궁금했던 부분들을 정리할 수 있어야 했다.정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던가북한에서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는 노래는 수령에 대한 찬양과 ‘우리의 소원은...

    1224호2017.04.25 13:19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9) 분단사회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9) 분단사회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탈북민은 분단의 얼굴이자 통일의 민낯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탈북민의 정착과정은 우리 사회의 통일 준비와 남북 통합의 능력을 검증하는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하나,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마라”작고하신 이기택 교수님은 한국전쟁 때 월남하신 분으로 국제정치학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분이셨다. 내가 학부생활을 할 무렵 은퇴 후 명예교수로 강의하셨던 교수님은 자주 나를 중국음식점에 데려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었다. 휴전선을 넘어온 나를 두고서 당신이 어린 나이에 38도선을 넘어왔던 1950년을 회고하시곤 했다. 자신이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내게 “잘 준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셨다. 식사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두고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는데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마라”는 말씀이셨다.만들어져 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

    1222호2017.04.10 17:48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8) 다시 차별의 경계선을 넘는 ‘디아스포라’
    (8) 다시 차별의 경계선을 넘는 ‘디아스포라’

    탈북민은 북한을 나온 탈출자인 동시에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이 주는 이러한 낙인효과와 무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국제사회의 미아로, 디아스포라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A의 신변보호를 담당한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A가 휴전선을 넘어온 직후 유관기관에서 만나볼 의향이 있느냐고 연락해왔지만 지방에 있는 회사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시기라 틈이 없었다. 사회인이 되고도 나를 찾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만났다. 그는 귀순 전 내가 있었던 비무장지역에서 근무했던 엘리트 군관(장교)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을 넘어온 수많은 귀순자들이 있었지만 현역 북한군 보위군관(군의 정보·사찰 담당)의 귀순은 그가 처음이었다. 북측 비무장지대에 있을 때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나를 잘 알고 있었다는 그의 말에서 귀순 전에 나를 벤치마킹하며 한국행을 준비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귀순 동기는 명약관...

    1220호2017.03.28 15:13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7)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쓴 박사모-귀순의 여정은 짧고 정착의 시간은 길다
    (7)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쓴 박사모-귀순의 여정은 짧고 정착의 시간은 길다

    북한에서 한국으로 25분 만에 넘어온 후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의 경험을 궤적삼아 타자와 분단, 그리고 통일문제를 학문으로 더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적이고 우회적인 경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한국에 와 있는 3만명 탈북민 중 북한에서 한국까지 25분 만에 온 사례는 내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탈북민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10년 넘는 시간과 세월을 보냈든, 몇 년 혹은 몇 달이 걸렸든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무게와 경험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똑같다는 것이다. 어느 북한연구자는 내게 탈북민 한 명이 한국에 입국하기까지 서너 명 이상이 실패하거나 잘못됐을 거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한 명 한 명이 이 땅에서 잘 정착하고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휴전선을 넘어와 10년 넘게 살았던 이곳은 자유와 풍요만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마이너리티를 겁박하기에 충분한 자유의 ...

    1218호2017.03.14 14:59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6) 분단사회의 아웃사이더들-탈북사회 ‘수저 계급론’을 아시나요
    (6) 분단사회의 아웃사이더들-탈북사회 ‘수저 계급론’을 아시나요

    고위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금수저라는 세습성을 유지한다. 최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불신으로 저변화되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출발조차도 동일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제는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젠체하는 편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를 대하는 명칭만큼은 아직도 낯설고 이질적일 때가 많다. 6·25 한국전쟁 전후에 월남한 분들은 실향민 혹은 월남자로 명칭이 통일돼 있지만 정전협정 이후 탈북한 사람들은 수십 가지의 호칭으로 상황에 따라 불리는 기현상(奇現象)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물론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법적·행정적 표현은 북한 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다. 내 경우에는 군 출신으로 휴전선을 넘어 왔으니 귀순자였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그 호칭만 빼고 수십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적응 압력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총을 들고 넘어왔으니 보로금도 상당할 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동대문시장에서 25만원이면 살 수 있는 무기여서 크게 기대하...

    1216호2017.02.27 17:46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5) 미생의 삶 :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탈북자 흔적 지우고 입사지원 했더니 …
    (5) 미생의 삶 :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탈북자 흔적 지우고 입사지원 했더니 …

    100곳 가깝게 지원서를 제출하여 한 번도 통과된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안 됐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이곳 출신의 친구들과 다르게 학교시절의 목표는 졸업이었지만 정작 졸업을 목전에 두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행정고시나 언론사 취직,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몇 명을 제외한 정치외교학과 친구들 대부분이 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생활비 마련 등으로 경제적으로 지치고 궁핍했던 나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뒤로한 채 학부졸업장을 들고 구직활동에 뛰어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입사원서를 쓰고 지원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계속되는 구직활동 속에서 몇 달이 훌쩍 지났고 봄날은커녕 매서운 취업의 한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졸업 후 취업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함께 공부했던 ...

    1214호2017.02.14 10:57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4)  대학진학 그리고 취업-벅찬 등록금 때문에 혹독했던 대학생활
    (4) 대학진학 그리고 취업-벅찬 등록금 때문에 혹독했던 대학생활

    호프집, 치킨 배달, 건설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전단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것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며 홀로 일터로 가야 했던 내 모습이다.공부만이 살 길임을 깨달은 후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대입학원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대학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터 동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빈정과 면박을 주기도 했는데,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사갈시한 나머지 오기를 부려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후회가 밀려왔다. 영어와 수학은 물론이고 대학입학을 위한 논술의 기본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한의 이질적인 커리큘럼을 탓하기 전에 북한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을 먼저 탓할 수밖에 없었다.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과감히 학원 등록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학창시절 일찌감치 직업군인으로 살려는 꿈을...

    1212호2017.01.24 16:16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3) 실업과 호구지책 사이-하나원 퇴소 후 나는 곧 잉여인간이 되었다
    (3) 실업과 호구지책 사이-하나원 퇴소 후 나는 곧 잉여인간이 되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굶어봤고, 돈 벌기 위해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퇴짜당하기 일쑤였다. 각종 구인 광고지는 집에 켜켜이 쌓여갔지만 탈북민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하나원(통일부 소속 탈북민 정착 지원기관)에서 운 좋게도 어마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서울 변두리의 임대주택에 배정됐다. 대부분의 탈북민은 수도권 거주를 선호하는데, 그에 비해 임대주택은 매우 제한적이다. 때문에 수도권 지원 추첨에서 탈락하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산간오지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하나원 교육과정에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승자 독식의 원리를 간접적으로 배웠다면, 거주지 선택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강한 희비가 교차하는 수도권, 혹은 산간오지라는 ‘복불복’ 대신 중간지대(도시)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방편도 있다. 한때 주거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는 추첨제를 두고 탈북민을 원자화·분산화시키려는 정부의 의도적 정책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됐지만 수도권...

    1210호2017.01.10 10:00

  •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2) 사선을 넘어 또 다른 사선에 서다-남한 땅에서 받은 싸늘한 첫 질문 “너 왜 왔어?”
    (2) 사선을 넘어 또 다른 사선에 서다-남한 땅에서 받은 싸늘한 첫 질문 “너 왜 왔어?”

    탈북민이 남한 땅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오랜 기간에 걸친 호소와 행동을 통한 변천사이기도 하다.비무장지대의 MDL(중앙분계선)을 넘은 내가 국군 GP(경계초소)초소를 지나쳐 GOP(일반전초) 초소로 간 것은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남과 북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수년간의 DMZ 생활을 통하여 경험했기 때문이다. 중앙분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귀순사실을 알리고자 허공에 총을 연발로 쏜 탓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전투방한복에 스몄고,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GOP에 도착하여 군홧발로 철책선을 찼다. 잠시 후 철책선을 가운데 두고 국군들과 마주섰고, 앳된 얼굴의 초소장은 신분확인 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빨리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고 싶은 나의 생각을 멈춰 세운 것은 예상치 못했던 초소장의 다음 요구였다. “입고 있는 방한복도 전부 벗어주세요.”방금 헤치고 온 어둠길로 곧 북한군 추격조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차마 전투방한복만은...

    1208호2016.12.26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