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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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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나라를 돌보지 않은 대가 ‘여산의 재앙’
    나라를 돌보지 않은 대가 ‘여산의 재앙’

    신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여산행을 강행한 경종은 유왕·진시황·현종·목종의 전철을 밟았다. 이 어찌 여산의 불행이 그를 덮친 것이랴. 나라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은 대가일 터.“거긴 절대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기어코 가겠다는 황제를 신하들이 극구 말린다. 좌복야 이강(李絳)과 간의대부 장중방(張仲方)이 여러 번 간언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다. 이번에는 습유 장권여(張權輿)가 나섰다. 그는 바짝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옛날에 주나라 유왕(幽王)은 여산(驪山)에 행차했다가 견융(犬戎)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진시황이 여산에 묻힌 뒤 그 나라가 망했사옵니다. 현종께서 여산에 궁을 짓고 지내시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여산에 행차하셨다가 오래 사시지 못했사옵니다.”이야기의 장소는 장안성 대명궁의 자신전(紫宸殿), 때는 바야흐로 보력(寶曆) 원년(825), 신하들의 읍소를 듣고 있는 황제는 열일곱의 경종(敬宗)이다. 엎드려 조...

    1143호2015.09.07 16:1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중국 공산당 기사회생한 ‘시안사변.’
    중국 공산당 기사회생한 ‘시안사변.’

    시안 시내에 총성이 울려 퍼지던 새벽, 시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청지(華淸池)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화청지의 오간청(五間廳)에 묵고 있던 장제스에게 새벽의 총성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그는 얼른 뒤쪽 산으로 도망쳤다.1936년 시안에 좀 특별한 치과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장은 베를린대학 출신의 치의학 박사 윈치 히버트(Winch Hiebert). 유대계 독일인이자 독일 공산당원인 그는 일찍이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가했다가 독일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추방당했다. 1936년 그는 ‘중국의 소리(The Voice of China)’ 창간인인 매니 그래니치의 권유로 중국 상하이로 오게 된다. 상하이에는 중국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외국인이 꽤 많았다. 이곳에서 히버트는 치과를 운영하면서 뜻이 통하는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 에드가 스노, 조지 하드무, 루이 엘리, 한스 시페 등이 바로 그...

    1142호2015.09.01 16:22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글자 없는 측천무후 비에 무어라 쓸 것인가
    글자 없는 측천무후 비에 무어라 쓸 것인가

    측천무후의 치세가 ‘무주(武周)의 치’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녀가 뛰어난 통치능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측천무후를 능력 있는 ‘여성’으로 강조하는 건 문제다. 그녀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었을 뿐 보살핌과 배려의 ‘여성성’은 전무했던 인물이다.701년, 공간의 명칭이 역사의 시간 좌표인 연호로 사용된 해다. 바로 장안(長安) 원년. 연호를 ‘장안’이라 할 만큼 이 해는 장안에 특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안이 한동안 상실했던 수도의 지위를 회복한 해다. 690년, 측천무후는 성신(聖神)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라이름까지 주(周)라고 바꿨다.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이 여황제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해에 연호가 재초(載初)에서 천수(天授)로 바뀌었다. 세계가 황제에게 속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게 바로 연호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자신만의 새 연호를 사용했다. 하늘의 길조나 나라 안팎으로 큰일이 생기면 연호를 바꾸기도 하는데,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

    1141호2015.08.24 16:20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흉노를 제압한 한나라 곽거병, 그를 기리는 ‘마답흉노’ 석상
    시안-흉노를 제압한 한나라 곽거병, 그를 기리는 ‘마답흉노’ 석상

    마답흉노 석상에 나타난 말과 흉노의 기묘한 모습은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의 분신을 자기화하는 것만큼 완벽한 승리는 없을 터, 이 석상은 곽거병의 공적과 한나라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찬가다.열여덟에 부대장, 스물에 장군, 스물둘에 장관, 스물넷에 사망. 다름 아닌 한나라 때의 곽거병(B.C. 140~117) 이야기다. 그는 열여덟(B.C. 123)에 표요교위(驃姚校尉)로 임명돼 몽골고원 대사막 남쪽에서 흉노를 격파했다. 스물에는 표기(驃騎)장군이 돼 간쑤·닝샤·산시(陝西) 일대의 흉노 세력을 잇달아 공격하여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스물둘에는 고비사막을 건너 흉노의 본진을 공격해 큰 전공을 세움으로써 대장군 위청(衛靑)과 더불어 대사마(大司馬·국방부장관 격)가 됐다.그리고 스물넷, 젊은 영웅 곽거병은 돌연 사망하고 만다. 전장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조차 없다. 에서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표기장군은 원수(元狩) 4...

    1138호2015.08.04 16:4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이세민의 당나라 건국을 견인한 여섯 준마
    이세민의 당나라 건국을 견인한 여섯 준마

    문화수집광이었던 열강의 후안무치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자국의 문화재 반출에 빌미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지대한 도움을 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다. 소릉육준 석각은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 반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쪼개졌기 때문이다.“하늘이 수(隋)나라의 어지러움을 없애려 하시니 상제께서 육룡(六龍)을 보내셨도다.” 송나라 시인 장뢰는 ‘소릉육준(昭陵六駿)’이라는 시에서 당 태종 이세민의 여섯 준마를 이렇게 칭송했다. 시안에서 70㎞ 떨어진 리취안(醴泉)에 태종과 문덕황후의 합장릉인 소릉이 있다. 능 북쪽의 제단에는 말이 새겨진 석각(너비 2m, 높이 1.72m)이 동서 양쪽으로 각각 세 개씩 세워져 있다. 정관 10년(636)에 문덕황후가 병사하자 태종이 소릉을 조성하라는 조서를 내린 뒤 만들어진 이것이 바로 소릉육준 석각이다.태종의 묘인 소릉에 있는 6개의 석각“짐이 탔던 전마는 짐을 위난에서 구해주었으니, 그 진짜 모습대로 새겨서 좌우에 두도록 하라.” 태종은 자신...

    1137호2015.07.27 17:01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비석의 숲 비림, 서구로부터 지켜낸 ‘경교비’
    비석의 숲 비림, 서구로부터 지켜낸 ‘경교비’

    당나라 때 이미 중국에 기독교 교파가 들어왔음을 증명해주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서구인들은 이 경교비를 서구세계로 가져가고자 했다. 비석의 무게가 2톤이나 나가지 않았다면, 중국인이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면, 경교비는 비림이 아닌 서구 열강의 어느 박물관에 있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비림(碑林), 비석의 숲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많은 비석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세남·저수량·구양순·장욱·안진경 등 내로라하는 서예 대가의 친필 석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곳, 한나라 때의 비석부터 소장돼 있으니 무려 2000년 세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 비림이 조성된 건 북송 철종 때 공부낭중(工部郞中)이자 섬서전운부사(陝西轉運副使)였던 여대충(呂大忠)의 공로다. 그는 당나라 말 이후 전란 탓에 방치돼 있던 개성석경(開成石經)과 석대효경(石臺孝經)을 경조부학(京兆府學)의 북쪽(현재의 비림이 위치한 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이를 계기로 역대 비석들이 이곳에 한데 모이게 ...

    1136호2015.07.21 14:1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내란과 전쟁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곽자의
    내란과 전쟁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곽자의

    곽자의는 현종·숙종·대종에 이어 덕종까지 무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안사의 난과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당나라를 지켰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비록 나의 나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경이 다시 세운 것이오”라는 숙종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당신 아버지가 천자라고 위세 부리는 거요? 내 아버님은 천자 자리 따윈 하찮으셔서 그 자리에 오르시지 않는 거요!”젊은 두 남녀의 부부싸움 끝에 튀어나온 놀라운 말! 남편은 곽애(郭曖), 아내는 승평(昇平)공주. 곽애는 곽자의(郭子儀)의 아들이고 승평공주는 대종(代宗)의 딸이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발언이란 말인가, 어디 감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 공주는 냅다 수레를 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남편이 한 말을 일러바친다. 그런데 아버지 대종의 반응은 공주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다.“네가 뭘 제대로 모르는구나. 네 남편 말이 정말 옳다. 만약 곽자의가 천자가 되고자 했다면 천하가 ...

    1135호2015.07.13 16:52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두보 시에 비친 장안성 ‘두 얼굴의 민낯’
    두보 시에 비친 장안성 ‘두 얼굴의 민낯’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두보의 이 절규는 장안의 민낯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장안,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였던 장안, 그곳은 완벽한 도시계획에 따라 세워졌다.에이즈·조류독감·사스·신종플루·에볼라 그리고 메르스까지, 그야말로 바이러스 전성시대다. 원숭이·닭·사향고양이·돼지·과일박쥐·낙타가 진원지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 동물들이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종도 아니고, 과학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데 왜 이들이 내뿜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이란 말인가? 무시무시하고도 엄중한 복수다. 생태계의 균형을 깨버린 인간을 향한 자연의 가차 없는 복수.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균형의 상실은 극한에 이르렀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토록 균형감각이 없는 한심한 족속이다. 이런 인간의 속성은 그 유래가 꽤나 오래됐고, 인이 박여서 떨쳐낼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으로부터 1260년 전, 두보(杜甫)가 진저리쳤던...

    1134호2015.07.07 11:33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당 태종도 현종도 자신의 욕망에 무너졌다
    당 태종도 현종도 자신의 욕망에 무너졌다

    위징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영원히 나라의 안정을 누리고자 하되 마음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뿌리를 베고서 나무가 무성하길 바라고 원천을 막고서 물이 멀리까지 흐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옛날 우왕(禹王)이 산을 깎고 치수했을 때 백성들이 비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이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秦始皇)이 궁전을 만들 때 백성들이 원망하며 반대한 이유는 자신만을 위하고 남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진기한 것은 물론 사람이 욕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멸망의 위기가 곧 닥치게 된다. 짐은 궁전을 짓고 싶고 필요한 자재도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진나라를 교훈으로 삼아 자제할 것이다. 왕공 이하 대신들은 마땅히 짐의 뜻을 이해하라.”태종의 궁전 건축을 반대한 장현소정관(貞觀) 원년(627년), 당 태종은 자신만을 위한 토목공사에 국고를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이렇게 대신들 앞에서 공포했다...

    1133호2015.06.30 11:09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황제의 솔직한 자기반성, 백성을 감동시키다
    황제의 솔직한 자기반성, 백성을 감동시키다

    ‘죄기조’란 천재지변이나 정권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제왕이 자신을 꾸짖는 내용을 담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현종의 경우처럼 말의 형식일 수도 있고, 덕종의 경우처럼 글의 형식일 수도 있다. 죄기조의 기원은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은(殷)나라 탕왕(湯王)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군주가 어떻게 하면 명군(明君)이 되고 어떻게 하면 혼군(昏君)이 되오?”“두루 들으면 현명한 군주가 되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리석은 군주가 되옵니다. 여러 의견을 두루 듣고 받아들이면 권신이 감히 기만할 수 없으며, 아랫사람의 의견이 윗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사옵니다.”장안성 태극궁 북문 ‘현무문의 변’‘정관(貞觀)의 치(治)’라는 태평성세를 이끈 당 태종과 재상 위징(魏徵)이 나눈 말이다. 황제와 신하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소통, 거슬리는 말일지라도 기꺼이 듣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 이것이 바로 정관의 치를 가능하게 한 동력이다. 태종과 신하들의 문답이 담긴 를 보면, 간언을...

    1132호2015.06.23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