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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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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하나라·상나라·서주는 여자 때문에 망했다?
    하나라·상나라·서주는 여자 때문에 망했다?

    역사서에서는 하·상·서주가 멸망한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프레임은 전통 시대 모든 분야에서 철저히 작동되었다. 말희·달기·포사는 그러한 프레임의 희생양이 아닐까.시안은 13조의 고도(古都), 즉 13개 왕조의 수도로 말해진다. 하지만 시안을 수도로 삼았던 왕조의 수는 논자에 따라서 10조설부터 17조설까지 다양하다. 10조설은 서주·진(秦)·전한·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북주·수·당이다. 왕망이 세웠던 신(新)을 더한 것이 11조설이고, 여기에 서진(西晉)을 더하면 12조설이다. 또 후한을 더하면 13조설이 되는데, 13조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다. 14조설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앞의 13조설에 탕구트족이 세운 대하(大夏)를 넣거나 측천무후가 세운 무주(武周)를 넣는다. 13조설에 대하와 무주를 포함하고, 황소가 세운 대제(大齊) 및 이자성이 세운 대순(大順)을 넣으면 17조설이 된다. 혹은 13조설에 유현(劉玄)...

    1153호2015.11.24 11:2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당나라 시절이 ‘견우·직녀 설화’의 전성기
    시안…당나라 시절이 ‘견우·직녀 설화’의 전성기

    에 ‘칠석’을 제목으로 한 시가 82수나 될 정도로 칠석과 견우·직녀는 당나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가 쇠락하면서 견우·직녀 신앙의 중심지였던 곤명지도 점차 말라가게 된다.“멀고 먼 견우성, 밝은 직녀성… 맑은 은하수 사이에 두고서 애틋하게 바라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네.”(한나라 말의 고시 19수) 은하수를 사이에 둔 채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 칠월칠석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烏鵲橋)를 놓아 둘을 만나게 해준다는 이야기,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두루 전해져 내려온 친숙한 설화다.이 설화의 주인공 견우와 직녀는 앞의 시에서처럼 하늘의 별, 즉 견우성(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과 직녀성(거문고자리의 베가)에서 유래했다. 칠월칠석 즈음 밤하늘에 은하수가 남북으로 흐를 때 밝은 직녀성(0등성)은 밤하늘 천정에 높이 걸리게 되는데, 때마침 은하수를 사이에 놓고 견우성과 마주하게 된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밤하늘을 ...

    1152호2015.11.17 11:32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진사 합격 축하연은 사윗감 찾는 ‘혼인시장’
    시안…진사 합격 축하연은 사윗감 찾는 ‘혼인시장’

    앞길이 창창한 남편감을 만나길 바라는 여자와 권문세가의 사위가 되어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남자, 대갓집 규수는 아버지를 따라 곡강연을 찾고 과거 합격자는 그런 그녀에게 시를 바치며 마음을 전한다.봄바람이 살랑인다. 살구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급제화(及第花·살구꽃)가 핀 행월(杏月·음력 2월) 방방일(放榜日·과거 합격자 발표일), 급제자와 낙제자의 운명이 갈리고 그들의 환호와 눈물이 1300년 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가득 채운다.수천 명의 응시생 가운데 진사(進士) 합격자는 서른 명 남짓, 창창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설레게 한다. ‘서른에 명경과(明經科) 합격은 늦은 셈이고 쉰에 진사과 합격은 이른 셈’이라는 당나라 때 속담이 대변하듯, 진사과 합격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수 삼수는 기본이고, 10년 20년 심지어는 평생을 시험에 매달려서야 겨우 진사에 합격했다. 물론 평생을 바쳐도 끝내 낙방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들이 비일비재했다....

    1151호2015.11.09 18:33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대안탑,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 된 까닭
    시안-대안탑,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 된 까닭

    대안탑이 기울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하수의 변화다. 당나라 때 관중 지역은 강수량이 많았는데 송나라 때부터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와 대안탑 부근에서 지하수를 대량으로 뽑아 써서 탑의 기울기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현장 같은 대안탑이여! 그대는 자랑스러워할지니,현장이 영혼으로 그대를 설계했음이라.대안탑 같은 현장이여!그대는 행복하나니,평생 부지런히 추구하여 마침내이상을 실현했음이라.”시인 거자잉(葛佳映)의 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리를 찾고자 인도로 떠났던 현장, 그 결과물인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대안탑. 대안탑은 현장의 삶이 농축된 상징물이다.대안탑이 있는 자은사 터에는 일찍이 북위 때 정각사(淨覺寺)라는 절이 있었고, 수나라 때 무루사(無漏寺)라는 절이 있었다. 648년, 태자 이치(李治, 훗날의 고종)가 태종에게 주청하여 어머니 문덕황후를 위해 절을 짓게 되는데 바로 자은사다....

    1150호2015.11.03 15:3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현장의 수제자를 능가한 신라승려 원측
    시안-현장의 수제자를 능가한 신라승려 원측

    시안의 흥교사에는 현장과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를 흥교사탑이라고 한다. 현장의 구법 여행, 중국의 유식종 탄생, 신라의 유식종 탄생이라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압축된 상징물이 바로 흥교사탑이다.당 태종 정관 19년(645),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현장(602~664)이 장안에 도착했다. 17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후 약 20년 동안 현장은 자신의 일생을 경전 번역에 쏟아 붓는다. 과 으로 대표되는 경전의 번역을 기반으로 그는 유식종을 창시하게 된다.규기에게 강의할 때 문밖에서 ‘도강’현장의 번역 작업은 규모면에서 방대하고 가치면에서 위대한 일이었다. 존재의 궁극을 부처님 말씀에서 찾고자 했던 이들에게, 이 일을 함께하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뛰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장과 함께한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들에게 경전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풀리지 않는 ...

    1149호2015.10.26 17:17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유방에게 의리 지킨 한신, 토사구팽 당하다
    시안-유방에게 의리 지킨 한신, 토사구팽 당하다

    한신은 왕이 되라는 유혹을 뿌리치며, 유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유방은 천하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한신은 병권을 빼앗겼고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실크로드: 장안-천산(天山) 회랑 노선망(Silk Roads: the Routes Network of Chang‘an-Tianshan Corridor). 2014년 6월 22일 중국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공동으로 신청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실크로드 유산 가운데 중국 구간 유산의 정식 명칭이다. 이때 등재된 유산 가운데 한나라 미앙궁(未央宮) 유적지가 있다.기원전 139년, 장건(張騫)은 바로 미앙궁에서 한 무제의 명을 받고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서역으로 떠났다. 장건의 서역 원정이 실크로드 개통의 계기가 되었던 만큼 미앙궁은 시공간적으로 실크로드의 기원과 관련된 상징적 장소다. 실크로드의 동방 기점으로 불리는 미앙궁은 당나라의 운명과 함께 장안이 정치 중심...

    1148호2015.10.19 18:18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천하를 잃은 항우와 천하를 얻은 유방
    천하를 잃은 항우와 천하를 얻은 유방

    출발 지점에서 한참 앞서 있던 항우가 결국 유방에게 패하고 만 것은 다름 아닌 인재 활용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재 활용의 능력이란 바로 오늘날 지도자의 최고 덕목이기도 한 ‘소통’의 리더십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아! 대장부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함양에서 진시황의 행차를 본 한 남자가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여기 또 한 남자, 그는 회계산을 둘러본 뒤 절강을 건너는 진시황의 행렬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저 사람을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멸족을 초래할 엄청난 말이 아닌가! 함께 있던 숙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진시황을 목격한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두 남자에게 그의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이 두 남자의 뇌리에 잊히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아! 대장부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고 탄식한 남자는 유방이다. 그는 고향 패현을 떠나 함양의 공사 현장에 요역하러 왔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우연히 ...

    1147호2015.10.12 17:02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황위 찬탈을 둘러싼 ‘제국의 피비린내
    황위 찬탈을 둘러싼 ‘제국의 피비린내

    호해는 조고를 만날 수 없었다. 황제가 아닌 왕이 될 수도, 왕이 아닌 제후가 될 수도, 제후가 아닌 평범한 백성이 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호해는 이사가 죽은 지 1년 만에 자살하게 되었다. 부소를 자살로 내몬 지 3년 만이었다.’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胡亥)는 이사(李斯)·조고(趙高)와의 음모를 통해 제위에 올랐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2세 황제를 불안과 의심, 그리고 이에 따른 잔혹함으로 내몰았다. 그는 몽염과 몽의 형제를 죽게 한 것을 필두로 기존의 대신들을 모두 제거했다. 또한 본래 황제가 되었어야 할 부소를 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손위 형제자매를 죄다 잔인하게 죽였다. 신하들과 공자·공주의 죄를 심리하고 처형하는 일은 조고의 몫이었다. 진시황의 수레와 옥새를 관리했던 조고는 호해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조고는 호해의 마음속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호해의 불안과 호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고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 어쩌면 조고는 호해의 불안과 욕망...

    1146호2015.10.05 18:27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흉조 중의 흉조 ‘형혹수심’ 천문현상
    흉조 중의 흉조 ‘형혹수심’ 천문현상

    저 세상에서도 영원한 제국을 소유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능을 조성했던 진시황. 정작 죽어서는 시신이 썩을 때까지 수레에서 내려오지도 못했고, 평생을 바쳐 일군 진제국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어찌 형혹이 심수를 침범했기 때문이라 하겠는가.수화(綬和) 2년(기원전 7년) 봄, 흉조 중의 흉조라는 천문현상이 일어났다. 형혹수심(熒惑守心). 형혹(화성)이 이동하다가 심수(心宿, 전갈자리)에서 머무는 현상을 형혹수심라고 한다. 화성과 전갈자리 모두 붉은 빛이니 공포심을 더욱 자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화성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과 죽음을 상징했다. 또한 심수를 구성하는 심전성(心前星)·심중성(心中星)·심후성(心後星)은 중국에서 태자·천자·서자를 상징했다. 형혹이 심수에 머무는 것은 천자에게 변고가 생길 징조였다. 천자가 그 자리를 잃거나 죽음을 맞게 될 아주 불길한 징조.이 불길한 징조에 한나라 성제(成帝)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즉시 승상 적방진(翟方進)을 불러들였...

    1145호2015.09.21 17:29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진왕 암살 프로젝트 ‘형가의 암살 사건’
    진왕 암살 프로젝트 ‘형가의 암살 사건’

    암살은 실패했다. 이로 인해 연나라는 위험해졌다. 노한 진왕은 연나라를 공격했다. 수도는 함락되고 연나라 왕과 태자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연왕은 희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친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나라는 다시 연나라를 쳤고, 5년 뒤 연나라는 멸망한다.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 영정은 중국을 통일한다. 시황제(始皇帝), 그는 제국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 수도 함양에서 제국의 동서남북으로 뻗은 치도(馳道)를 따라 시황제는 천하를 순행하면서 곳곳에 자신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태산 석각에서부터 낭야·지부·동관·갈석·회계 석각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고 있다. 이 칭송을 관통하는 논리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기에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천하가 태평해졌다는 것이다. ‘진시황본기’에 전해지는 석각의 글을 꼼꼼히 읽다보면 장이머우 감독의 (2002)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진나라가 육국을 차례대로 접수해나...

    1144호2015.09.15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