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주간경향

연재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전체 기사 51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 용문석굴의 ‘노사나불’ 모델은 누구일까
    뤄양… 용문석굴의 ‘노사나불’ 모델은 누구일까

    노사나불의 모델이 측천무후라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모델이 측천무후일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아무리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한들, 최고 권력자가 아닌 그녀를 그 거대한 노사나불로 형상화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내레이션: 서기 65년, 중국의 어떤 황제가 꿈에서 석가모니를 만났다. 이로써 히말라야 산 양쪽 인류의 양대 고대문명이 조우하게 되었고, 약 800년에 걸친 문화 대융합을 가져왔다. 일찍이 한 서양학자가 말하길 “인류의 기우(奇遇)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시기는 그리스문명과 인도문명이 중국문화와 조우한 때”라고 했다.Scene: 백마사Scene: 용문석굴의 노사나불내레이션: 이 풍만하고 아름다운 얼굴, 사람의 넋을 빼앗는 두 눈, 온화하고 너그러운 기상. 그 앞에 처음으로 서는 사람은 누구나 일순간에 떨게 된다. 나선형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거대한 불두(佛頭)는 오늘날 중국의 불교예술 및 동방문명의 상징처럼 되었다. 전...

    1163호2016.02.02 09:47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문화유산 용문석굴 빈양중동 수난사
    뤄양…문화유산 용문석굴 빈양중동 수난사

    빈양중동이 완공되기까지 24년(500~523)이나 걸렸다. 높이 10m 가량에 너비와 안팎 깊이 각각 11m 가량인 석굴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그 세월의 열매들이 빈양중동에서 뜯겨져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311년, 흉노가 서진(西晉)의 수도 뤄양을 함락한다. 포로가 된 회제(懷帝)는 핑양(平陽)으로 끌려간다. 영가(永嘉) 5년에 벌어진 이 일을 ‘영가의 난’이라고 한다.영가의 난이 있기 전, 서진의 황실에서는 무려 16년(291~306)에 달하는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바로 ‘8왕의 난’이다. 당시는 가뭄·기근·돌림병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어가던 때였다. 서진의 멸망은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서진이 골육상잔의 권력투쟁에 빠져 있을 당시, 흉노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 훗날의 전조(前趙))은 날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유연은 뤄양을 두 차례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이 결국 뤄양을 함락...

    1162호2016.01.25 17:28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 관림에 묻힌 명장 관우 ‘성인’이 되다
    뤄양… 관림에 묻힌 명장 관우 ‘성인’이 되다

    관우의 목이 묻힌 곳, 바로 뤄양의 관림(關林)이다. 중국 역사상 무덤에 ‘림(林)’이라는 용어가 적용된 사람은 공자와 관우 두 명뿐이다. 공자가 묻힌 공림(孔林)과 관우가 묻힌 관림의 ‘림’은 성인(聖人)의 무덤을 의미한다.‘호사수구(狐死首丘)’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이 말은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300년 전, 굴원(屈原, 약 B.C. 340~B.C. 278)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수구초심을 토로했다.눈길을 멀리 두고 사방을 두루 훑어보며,언제이든 한 번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네.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여우도 죽을 때는 전에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향한다네.진실로 나의 죄가 아닌데 쫓겨났으니,밤이나 낮이나 어찌 내 고향을 잊을 수 있으리.()전국시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진(秦)·초(楚)·제...

    1161호2016.01.18 16:53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 중국불교의 발원지 ‘이천년고찰 백마사’
    뤄양… 중국불교의 발원지 ‘이천년고찰 백마사’

    2000년 역사를 지닌 백마사, 그 오랜 세월 동안 백마사는 수없이 파괴되었지만 거듭해서 다시 세워졌다. 실크로드의 문화가 중국으로 몰려들던 시기에 세워졌던 백마사,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중국이 굴기한 지금 백마사는 국제적 사찰로 발돋움하고 있다.영평(永平) 7년(64) 어느 날,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明帝)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몸에서 황금빛이 나는 이가 궁전 위를 나는 꿈. 날이 밝자 명제는 신하들에게 꿈속 금인(金人)의 정체를 물었다. 부의(傅毅)가 대답하길 ‘부처’라고 했다.이듬해 채음과 진경(秦景) 일행은 명제의 명을 받고 뤄양을 떠나 천축(인도)으로 가게 된다. 이들은 도중에 우연히 인도의 고승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난다. 섭마등과 축법란은 채음 일행의 요청에 따라 함께 뤄양으로 오게 된다. 이들이 불경을 실은 흰말을 대동하고 뤄양에 도착한 이듬해인 영평 11년(68), 뤄양에 불교사원이 세워진다. 불경을 싣고 온 흰말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은 백마사(白...

    1160호2016.01.11 17:06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 역대 아홉 왕조가 수도를 세운 ‘천하의 중심’
    뤄양… 역대 아홉 왕조가 수도를 세운 ‘천하의 중심’

    무왕이 “도읍을 세울 만한 곳”이라고 했던 뤄양, 역대로 많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흔히 낙양을 ‘9조 고도’라고 한다. 동주·후한·조위(曹魏)·서진(西晉)·북위(北魏)·수·당·후량·후당이 바로 아홉 왕조에 해당한다.“이곳은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거리가 모두 같다.”( ‘주본기’)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서주(西周) 성왕(成王)의 명에 따라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건설하고 구정(九鼎)을 안치한 뒤 이렇게 말했다. 주공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말한 낙읍, 바로 뤄양(洛陽, 낙양)이다. 앞으로 당분간 뤄양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먼저 그 이름부터 살펴보자. 낙(洛)은 낙하(洛河)를 가리킨다. 따라서 낙양은 낙하의 양(陽), 즉 북쪽이라는 의미다. 서울의 옛 이름 한양(漢陽)이 한강의 북쪽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이 강의 북쪽을 가리킨다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즉 ...

    1159호2016.01.05 11:27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 시안 성벽 18개 성문은 ‘역사의 산증인’
    시안… 시안 성벽 18개 성문은 ‘역사의 산증인’

    18개의 시안 성문, 여기엔 당나라 때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역사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물리적으로 훼손되기도 하고 복원되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기억도 하나씩 더해져 왔다. 18개 시안 성문의 이름에는 유가사상·중화주의·사회주의가 공존한다.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한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한다. 군벌을 타도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안은 류전화(劉鎭華)의 군대에 포위된 지 석 달째였다. 류전화의 시안 포위는 직계(直系)군벌 우페이푸(吳佩孚)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 류전화가 이끈 병력은 무려 7만명, “산시(陝西)로 쳐들어가서 한 자리 차지하고 부자가 되자!”는 구호로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류전화가 시안을 공격하기 시작한 건 4월 중순, 처음엔 시안성 안으로 무혈입성할 듯했다. 하지만 국민군 장군 양후청(楊虎城)과 리후천(李虎臣)이 1만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시안성을 사수했다. 무려 일곱 달이 넘도록! 이...

    1158호2015.12.29 15:13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 주원장이 세운 종루와 고루, 시안의 랜드마크가 되다
    시안… 주원장이 세운 종루와 고루, 시안의 랜드마크가 되다

    근현대시기에 종루는 참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민국 말 국민정부의 비밀감옥이기도 했고, 시안 최초의 영화관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천문관이 되기도 했고, 찻집으로 이용되기도 했다.아침 9시, 시안 성벽의 중심부 사거리 어딘가를 거닐고 있노라면 종루(鐘樓)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면 들려오는 북소리, 종루에서 서북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의 고루(鼓樓)에서 울리는 소리다. 시안의 종루와 고루에서는 2007년부터 이처럼 ‘아침 종과 저녁 북(晨鐘暮鼓)’ 울리기가 행해지고 있다. 100여 년 전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전통의 부활이라 하겠다.명나라 주원장 홍무(洪武) 17년(1384), 종루가 세워지던 당시에 그 위치는 장안성 중심에 있었다. 그 후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성이 확장되면서 종루의 위치도 점점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신종 만력(萬曆) 10년(1582)에 종루를 이전하게 되는데,...

    1157호2015.12.21 17:08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 ‘전한의 몰락, 왕망의 등극’은 찬탈? 선양?
    시안… ‘전한의 몰락, 왕망의 등극’은 찬탈? 선양?

    왕망에게 선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25년, 갱시제 유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기원전 54년, 태자가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 병사한다. 여인이 죽으면서 남긴 말, “신첩의 죽음은 천명이 아니옵니다. 다른 첩들이 저주하여 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태자 유석(劉奭)은 꽃다운 나이에 죽은 사마양제가 가련하다. 그녀를 저주한 여인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라면 꼴도 보기 싫다. 아버지 선제는 태자가 여자를 멀리하는 게 영 불안하다.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제는 황후에게 서둘러 태자의 짝을 맺어주라고 했다. 황후는 다섯 여인을 부른 뒤 태자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한다. 태자가 무심하게 지목한 한 여인, 그저 태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기에 선택된 이 여인은 왕정군(王政君)이다. 그녀는 태자와의 하룻밤...

    1156호2015.12.14 17:31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공주를 데려가기 위한 여섯 문제 ‘육시혼사’
    시안…공주를 데려가기 위한 여섯 문제 ‘육시혼사’

    가르통첸 일행을 따라 장안을 떠난 문성(文成)공주가 토번의 변경에 도착한다. 문성공주를 몸소 맞이하러 나온 손챈감포, 에 의하면 그가 대국의 복식과 예의(禮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고 한다.“대국(大國)이 나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당장 침략해 들어갈 것이다.”토번의 왕 손챈감포(중국 사서에서는 기종농찬(棄宗弄讚)으로 표기), 이번엔 어떻게든 당나라 공주를 아내로 삼을 작정이다. ‘돌궐과 토욕혼에는 공주를 시집보냈으면서 어째서 나의 요청은 거절한단 말인가!’ 손챈감포는 결국 송주(松州)를 공격했다. 거침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막강한 당나라가 아닌가. 당나라 선봉대가 토번의 군영을 야습해 천여 급을 베자 두려워진 손챈감포, 병사를 이끌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나라와의 통혼은 포기할 수 없는 일. 손챈감포는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다시 혼인을 요청했다. 강성해지고 있는 토번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 태종은 그 요청...

    1155호2015.12.07 16:56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 이역만리 정략결혼 여인의 ‘기구한 운명’
    시안… 이역만리 정략결혼 여인의 ‘기구한 운명’

    자신이 살던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 살아야 하는 건, 마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전혀 다른 토양에 심겨지는 것과 같다. 그 누가 이런 처지에 놓이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여인들이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물고기가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넋을 잃어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기러기가 구슬프게 비파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날갯짓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진다, 밝은 달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가만히 구름 뒤로 숨는다, 활짝 핀 꽃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움츠러든다. 물고기를 가라앉힌 침어(浸魚), 기러기를 떨어뜨린 낙안(落雁), 달을 숨게 만든 폐월(閉月), 꽃을 부끄럽게 만든 수화(羞花). 침어·낙안·폐월·수화는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시대(춘추시대·전한·후한·당)를 살았던 네 여인, 절세미녀였고 삶은 ...

    1154호2015.12.01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