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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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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정화의 정해사에서 영국군 노고를 달래다
    정화의 정해사에서 영국군 노고를 달래다

    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정해사, 일찍이 중국의 강성기에 세워졌던 이곳, 400여년 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된 난징조약 회담이 이루어졌던 곳이다.1842년 8월 29일, 영국 군함 콘월리스(Cornwalis)호에서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청나라와 영국 측은 정해사(靜海寺)와 콘월리스호에서 보름이 넘도록 회담을 가졌다. 아편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강철군함을 내세운 영국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청나라는 더 많은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이 원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홍콩을 할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난징조약 조인 이후, 청나라 흠차대신 기영(耆英)과 이리포(伊里布)는 영국군의 노고를 달래기 위한 잔치를 정해사에서 열었다. 영국의 군함에도 술과 음식이 전해졌다.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난징조약, 정작 당사자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 오랑캐를 어르고 달래서 성가신 상황을 얼른 끝내려 했을 따름이다.19...

    1183호2016.06.27 15:19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주원장이 묻힌 효릉, ‘참배정치’ 성지되다
    주원장이 묻힌 효릉, ‘참배정치’ 성지되다

    1912년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난징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능은 단 하나, 바로 주원장이 묻힌 ‘효릉(孝陵)’이다. 홍무(洪武) 15년(1382), 마황후가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16년 뒤, 주원장도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효릉은 마황후의 시호 ‘효자(孝慈)’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주원장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아들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임지에 그대로 머물고 수도로 오지 말라”는 주원장의 뜻이었다. 일찍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주원장은 생전에 26명의 아들을 두었다.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은 첫째·둘째·셋째를 포함해 모두 7명, 그가 사망할 당시...

    1182호2016.06.20 16:47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주원장이 세운 성벽 ‘13개 성문의 사연’
    주원장이 세운 성벽 ‘13개 성문의 사연’

    경성 성벽의 13개 성문은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고 보면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든 것이다.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4중 구조로 건설된 세계 최대의 성벽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1181호2016.06.14 10:24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미모의 기생 8명 ‘비운의 사랑과 운명’
    미모의 기생 8명 ‘비운의 사랑과 운명’

    ‘진회팔염’이라는 여덟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사랑했던 여덟 명의 남자. 진회하는 이들 만남의 증인이다. 강남공원의 수많은 과거 응시자들, 진회하에 늘어선 기루의 여인들, 얼마나 많은 이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랴.일흔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있다. 그의 생일잔치를 차려준 이는 한때 난징에서 이름을 날린 명기 마상란(馬湘蘭, 1548~1604). 마상란은 스물넷에 왕치등을 만난 뒤 삼십여년을 그만 바라봤다. 난초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결함’을 꿈꾸었던 마상란은 왕치등이 자신을 아내로 맞아주길 바라고 바랐지만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치등의 일흔 생일잔치를 치러주고 몇 달 뒤 마상란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예교와 명분과 명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진회하 일대의 여덟 미인 ‘진회팔염’마상란보다 70년 늦게 태어난 유여시(柳如是, 1618~1664), 그녀는 스물이 갓 지났을 때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났고 삼년 ...

    1180호2016.06.07 17:01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2만명 수용하는 과거시험장 ‘강남공원’
    난징…2만명 수용하는 과거시험장 ‘강남공원’

    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명의 장원과 10만여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이 책은 부귀공명을 골간으로 한다. 부귀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에 비열한 작자에게도 알랑거리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의지해 거드름을 피우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 고결하게 굴다가 남에게 간파되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도 있다. 부귀공명을 끝까지 마다하며 최상의 품격에 도달한 이는 황허의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한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부귀공명을 뼈대로 삼았노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책은 청나라 때의 풍자소설 다. 유림외사란 ‘유가 지식인 사회의 야사’라는 의미다. 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부귀공명의 루트는 ‘과거’였다.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 그렇게 일그러진 괴물을 양산해내는 과거...

    1179호2016.05.30 17:51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중국 근현대사 비극 간직한 ‘육조고도’
    난징…중국 근현대사 비극 간직한 ‘육조고도’

    차디찬 겨울을 이겨내고 피는 매화, 난징을 상징하기에 그야말로 제격이다. 모진 근현대사를 이겨낸 그 힘이 오늘날 난징의 성장 동력이 아닐까. 아편전쟁 패배로 중국이 외국과 체결하게 된 첫 번째 불평등조약은 ‘난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화로(火爐), 여름철 찌는 듯 더운 도시를 중국에서는 ‘화로’라고 표현한다. 이 말이 생겨난 건 민국시기다. 당시 매체에서 지칭한 ‘3대 화로’는 충칭(重慶), 우한(武漢), 난징(南京)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도시는 각각 창장(長江)의 상류·중류·하류에 자리한다. 세 도시에는 모두 창장대교가 놓여 있다. 창장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대교 중에서 우한과 난징의 것은 의미가 각별하다. 1957년에 개통한 우한창장대교는 제1호 창장대교다. 그런데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아서 만든 것이다. 중국이 독자적으로 건설한 첫 번째 창장대교는 바로 1968년에 개통한 난징창장대교다. 자동차가 달리는 위쪽 다리의 길이는 4589m, 기차가 달리는 아래쪽 다리의...

    1178호2016.05.23 16:02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항저우…애절한 사연들이 깃든 서호 ‘연인의 다리’
    항저우…애절한 사연들이 깃든 서호 ‘연인의 다리’

    맑은 날과 궂은 날, 새벽과 저녁, 봄·여름·가을·겨울, 시시각각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닌 서호에는 슬프고 비장한 전설과 역사가 가득하다. 그 비장함에서 나온 힘일까? 서호를 품고 있는 항저우는 오늘날 빛을 발하고 있다.서호에는 정인교(情人橋), 즉 ‘연인의 다리’로 불리는 3개의 다리가 있다. 단교·장교·서령교다. 이들 다리는 어떤 연인의 사연을 담고 있을까?한 쌍의 나비와 한 쌍의 연꽃이 된 연인들서호 동북쪽에 있는 단교(斷橋)는 그 이름만 보면 끊겨진 다리일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명나라 전여성(田汝成)의 에 따르면, 고산(孤山)에서 시작된 백제(白堤)가 이곳에 이르러 끊기기 때문에 ‘단교’라 이름했다고 한다. 단교는 서호십경의 하나인 단교잔설(斷橋殘雪)로도 유명하다. 아치형 다리에 눈이 내리면 다리 가운데 부분의 눈이 먼저 녹아,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가 끊어진 듯 보인다는 데서 ‘단교’라고 이름했다는 설도 있다. ‘백사전’ 전설의 백낭자와 허선이 만난...

    1177호2016.05.16 15:38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항저우…폭파 운명을 안고 개통한 ‘첸탕장대교’
    항저우…폭파 운명을 안고 개통한 ‘첸탕장대교’

    중일전쟁이 전면화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첸탕장대교가 1937년 11월 17일 개통되었다. 그러나 다리의 운명은 일본군이 항저우를 침입하는 그날에 폭파되어야 했다. 결국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2월 23일 오후,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1937년 11월 17일, 첸탕장(錢塘江)대교가 전면 개통했다. 첫 차량이 대교를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이 박수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첸탕장대교는 중국이 자력으로 만든 최초의 대교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현대식 대교는 죄다 외국인이 만든 것이었다. 황허(黃河)대교는 벨기에인, 화이허(淮河)대교는 영국인, 쑹화장(松花江)대교는 러시아인이 만들었다. 첸탕장대교는 무려 1453m에 달한다. 조수가 거세기로 유명한 첸탕장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첸탕장 바닥에는 40m에 달하는 진흙층이 있다. 이 진흙층을 뚫어야만, 다리를 지탱해줄 말뚝을 강바닥의 암석층에 박을 수 있다....

    1176호2016.05.10 16:15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항저우…청나라 최고 부자 ‘호설암의 성공과 몰락’
    항저우…청나라 최고 부자 ‘호설암의 성공과 몰락’

    홍정상인(紅頂商人), 상인으로서 고관에 봉해진 호설암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정은 청나라 고관이 쓰던 모자다. 호설암은 공신에게만 주어지는 황색 마고자인 황마궤까지 걸치며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다.1861년, 항저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수성(李秀成)이 이끄는 태평천국군이 항저우를 공격한 것이다. 장시(江西)에서 증국번(曾國藩)에게 패한 뒤 저장(浙江)으로 후퇴한 태평천국군은 저장 일대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태평천국군에 포위된 항저우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성 안의 양식은 바닥이 났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은 물론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동이 났다. 아사자가 십만을 넘었고 길에는 시신이 널렸다. 심지어 자식을 바꿔서 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인간세상의 천당이라던 항저우가 불과 몇 달 사이에 지옥이 된 것이다. 결국 저장순무 왕유령(王有齡)은 성문을 열고 백성들을 성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해 12월 29일, 항저우는 함락되었고, 왕유령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항저우가...

    1175호2016.05.03 11:39

  •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항저우…호포천 물로 우려낸 ‘용정차’는 천하의 명차
    항저우…호포천 물로 우려낸 ‘용정차’는 천하의 명차

    차를 마시지 않고 맹물을 마시는 것은 중국인에게 단순히 차와 맹물의 문제가 아니다. 차는 그들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뿌리 깊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땔감·쌀·식용유·소금·간장·식초와 더불어서 ‘차’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항저우 하면 서호를 떠올리게 되고, 서호 하면 용정차를 떠올리게 된다. 아름다운 서호와 향기로운 용정차는 환상의 콤비다. 항저우는 서호와 전당강(錢塘江, 첸탕장) 때문에 안개가 많이 낀다. 서호 인근에 분포된 차밭은 녹음과 운무가 가득하다. 게다가 차 재배에 적합한 온도와 강우량 덕분에 항저우는 용정차의 본향이 되었다. 사봉(獅峰), 용정(龍井), 오운산(五雲山), 매가오(梅家塢) 등 서호 인근에서 생산되는 용정차를 ‘서호용정차’라고 한다. 서호용정차는 용정차 중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나며, 중국의 10대 명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청나라 건륭제가 봉한 ‘18어차’용정차는 녹차에 속한다. 따라서 찻잎을 따는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명...

    1174호2016.04.25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