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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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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렌즈로 본 세상] 그늘의 온도
    그늘의 온도

    드론이 고도를 낮추자 붉은 점이 점점이 흩어진 밭 사이로 파라솔 몇개가 떠올랐습니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한여름 볕이 정수리를 곧장 내리꽂는 시각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 아래 웅크려 앉아 손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고추는 익을수록 붉어지고, 사람은 그 붉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늘 밑을 떠나지 못합니다.같은 시각, 해변에서도 파라솔이 펼쳐지고 있을 것입니다. 같은 그늘이지만 그 아래 놓인 시간은 서로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더위를 피해 몸을 누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위를 견디며 몸을 씁니다. 폭염특보가 연일 이어지는 여름, 파라솔은 누군가에게는 휴식의 상징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하루가 저물면 해변의 파라솔은 접혀 여름의 추억이 되지만, 밭의 파라솔은 접혀 다음 이랑으로 옮겨갑니다. 같은 여름을 나는 방식은, 이렇게도 다릅니다.

    1691호2026.08.11 06:00

  • [렌즈로 본 세상] 드러나야 보이는 것들
    드러나야 보이는 것들

    봉수산 정상에 올라서면 무안 갯벌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해가 기울면서 바닷물이 서서히 물러나고, 드러난 갯벌은 노을빛을 그대로 머금어 붉게 물듭니다. 물길 사이사이 남은 웅덩이들이 마지막 햇살을 반사할 때, 갯벌은 마치 오래 숨죽이고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지난 7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 2단계 확대 등재를 결정했습니다. 서산·여수·고흥과 함께 무안 갯벌이 새로 이름을 올리며 세계유산은 모두 여섯 곳으로 늘었습니다. 무안 갯벌은 2001년 국내 첫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2008년 람사르 습지를 거쳐 25년 만에 국제적 가치를 다시 인정받은 셈입니다. 눈에 띄지 않게 밀물과 썰물을 반복해온 시간이 쌓여, 마침내 하나의 유산이 된 것입니다.갯벌은 하루에도 몇번씩 사라졌다가 되돌아옵니다. 그 반복이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그 안에서 수많은 생명이 자라고 물을 정화하며 해안을 지켜왔...

    1690호2026.08.04 06:00

  • [렌즈로 본 세상] 반 고흐가 사랑한, 타는 동안 피는 꽃
    반 고흐가 사랑한, 타는 동안 피는 꽃

    가까이 다가가 찍은 해바라기는 꽃이라기보다 두꺼운 물감 같았습니다. 꽃잎 끝은 열기에 말라 뒤틀려 있었고, 그 위로 얹힌 빛은 유화의 붓 자국처럼 뭉쳐 있었습니다. 노랑은 한 가지 색이 아니었습니다. 태양 가까운 자리는 거의 흰빛으로 타들어 갔고, 그늘진 안쪽은 짙은 갈색으로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뷰파인더 속, 정지된 꽃들은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해바라기 연작을 떠올리게 했습니다.반 고흐는 유독 해바라기에 깊은 애정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고통의 부르짖음에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소박한 해바라기 속에 감사를 담고 있다고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타들어 가면서도 피어 있는 꽃, 그것이 그가 오래 바라본 해바라기 이미지였습니다.이 여름, 한반도는 타는 날과 잠기는 날을 번갈아 겪고 있습니다. 볕이 살을 익힐 듯 내리쬐던 다음 날엔 어김없이 굵은 비가 대지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폭염에도, 폭우에도 해바라기는 고개를 떨구지 않고 그저 다음 해가 뜨는 쪽을 향해 ...

    1689호2026.07.28 06:00

  • [렌즈로 본 세상] 사라진 개들, 그리고 남겨진 이름들
    사라진 개들, 그리고 남겨진 이름들

    초복을 하루 앞둔 서울 광화문광장, 사람들의 발치에 하얀 천으로 감싼 상자가 줄지어 놓였습니다. 저마다 손에도 작은 상자 하나씩 받쳐들고 있습니다. 상자 겉면에는 서툰 손글씨로 적힌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맑음이, 소원, 별이, 대식이, 동백. 사람의 이름과 다르지 않은, 그러나 사람은 아닌 이름들입니다.2024년 국회를 통과한 개식용종식법은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27년 2월부터 도살과 유통에 대한 처벌을 시작합니다. 정부는 최근 전국 개 사육농장의 82%가 문을 닫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장에 있던 개들이 어디로 갔는지, 몇마리가 살아남았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유예기간이라는 이름 아래 도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이날 사람들이 들고 선 상자 속에는 그사이 세상을 떠난 개들의 유골이 담겨 있었습니다.폐업률은 숫자로 집계되지만, 그 안에서 사라진 개들은 좀처럼 세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름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이름을 손에...

    1688호2026.07.21 06:00

  • [렌즈로 본 세상] 하늘이 고인 자리서 곱씹는 연꽃의 의미
    하늘이 고인 자리서 곱씹는 연꽃의 의미

    경기 양평 세미원의 연못은 아침부터 고요했습니다. 바람이 잦아든 수면 위로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내려앉았고, 그 사이사이 연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꽃은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하늘 한가운데서 피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연꽃은 맑은 물이 아니라 진흙에서 뿌리를 내리는 식물입니다. 잎에 물방울이 떨어져도 스미지 않고 굴러떨어지듯, 탁한 바닥에 있어도 더러움이 배어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 사는 자리는 거꾸로인 듯합니다. 40여년 전,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이 누군가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비극적인 전쟁으로 요동치는 기름값 앞에서 누군가는 담합으로 이윤을 챙깁니다. 굴러떨어져야 할 것들이 자꾸 수면 위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연못에 비친 하늘은 진짜 하늘이 아니지만, 연꽃에는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습니다. 무엇이 진흙에 남고 무엇이 꽃으로 피어나는지, 그 경계를 다시 들여다볼 시간입니다.

    1687호2026.07.14 06:00

  • [렌즈로 본 세상] 산이 사라진 자리, 그곳을 채우는 ‘먹먹한 풍경’
    산이 사라진 자리, 그곳을 채우는 ‘먹먹한 풍경’

    깊이 100m, 지름 500m의 거대한 구덩이입니다. 두부를 자른 듯한 수직 절벽이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결을 드러내고, 그 아래로 절단 장비와 트럭이 작게 움직입니다. 한때 해발 100m 남짓한 산이었던 자리입니다.전북 익산 황등면의 화강암은 포천석, 거창석과 함께 전국 3대 화강암으로 불렸습니다. 청와대 영빈관의 돌기둥과 국회의사당, 대법원 청사에 이 돌이 쓰였습니다. 1858년부터 170여년 동안 캐낸 돌로 지어진 건물이 전국 곳곳에 서 있는 사이, 산은 조금씩 깎여들어가 마침내 사라지고 거대한 구덩이만 남았습니다. 이제 채석은 3~4년 안에 끝날 예정이고, 그 구덩이는 전망대 카페와 미디어아트, 공연장이 들어설 문화공간으로 다시 채워지는 중입니다.산이 깎여나간 자리에 사람들이 다시 무언가를 채우려 합니다. 사라진 것의 흔적 위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1686호2026.07.07 06:00

  • [렌즈로 본 세상] 가라앉은 땅, 가라앉지 않은 말들
    가라앉은 땅, 가라앉지 않은 말들

    서해의 노을이 새만금 간척지 위로 내려앉을 즈음, 땅 한가운데 둥글게 꺼진 웅덩이 하나가 붉게 물듭니다. 평평하게 메워진 땅 위에 유독 깊이 가라앉은 그 자리는, 오랜 시간 새만금 한편에 조용히 자리해왔습니다.새만금은 늘 정치의 언어로 먼저 불려 나왔습니다. 선거철마다 공약의 이름으로 호명됐고, 이제는 현대차를 비롯한 대규모 투자 소식으로 다시 전국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굴착기와 크레인이 들어설 자리를 그리는 동안, 그 아래 땅이 가라앉아 시간은 누구의 계획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노을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지지만, 그 빛을 받는 땅의 모습은 해마다 달라집니다. 가라앉은 웅덩이 위로 붉은빛이 번지고, 그 고요한 수면 아래로 무언가는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685호2026.06.30 06:00

  • [렌즈로 본 세상] 초록으로 멍든…호수가 보내는 경고
    초록으로 멍든…호수가 보내는 경고

    강원도 강릉 경포호가 초록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봄빛 초록이 아니었습니다. 수면을 빼곡히 채운 것은 파래였습니다. 호수 너머로는 동해가 보였습니다. 눈부시게 푸르고 맑은 바다였습니다. 불과 몇백m 사이를 두고 이토록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파래는 원래 이 호수의 것이 아닙니다. 바닷물이 유입되고 기온이 오르면서 수온이 높아지고, 비가 내리지 않아 물흐름이 멈추면, 호수는 파래가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그렇게 뒤덮인 파래가 썩기 시작하면 악취가 퍼지고, 호수는 제 모습을 잃어갑니다. 올해만의 일이 아닙니다. 해마다 기온이 오르는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풍경입니다.경포호는 오래전부터 철새가 쉬어가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던 호수였습니다. 그 호수가 지금 초록 파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호수는 말이 없지만 어쩌면 이것은 호수가 보내는 신호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은 재난으로만 경고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초록빛 침묵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1684호2026.06.23 06:00

  • [렌즈로 본 세상]빛으로 담은 간절한 마음…어둠 속의 고백
    빛으로 담은 간절한 마음…어둠 속의 고백

    충남 아산 송악저수지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풀숲 사이에서 작은 빛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반딧불이입니다. 빛 한 점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르면, 또 다른 빛이 그 뒤를 따릅니다. 저수지 수면에는 그 빛들이 번져 어둠과 빛이 함께 출렁였습니다.반딧불이는 깨끗한 물과 오염되지 않은 풀밭에서만 삽니다. 그 작은 생명이 켜지기 위해서는 한 계절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로 살다가 번데기를 거쳐 마침내 빛을 얻기까지, 길게는 두 해를 땅속에서 보냅니다. 날개를 달고 빛을 내 날아다니는 시간은 고작 보름 남짓입니다.반딧불이의 빛은 사랑을 찾는 신호입니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어 온 힘을 다해 빛을 내고, 어둠 속에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 저수지의 밤은 그 간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1683호2026.06.16 06:00

  • [렌즈로 본 세상] 올라갈수록 멀어지는 내 집
    올라갈수록 멀어지는 내 집

    서울 반포주공 1단지 재건축 공사 현장에 타워크레인 수십기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습니다. 크레인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습니다. 저렇게 높이 올라가면 마침내 누군가의 집이 될 것입니다.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이 될까요.반포주공아파트는 1970년대 정부가 서민과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을 돕겠다며 지은 공공주택입니다. 누군가의 첫 집이었고, 아이들이 뛰놀던 마당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설 새 아파트의 예상 시세는 50억원을 훌쩍 넘습니다.서울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이제 계획의 영역이 아니라 운의 영역이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크레인은 오늘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집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손에 닿지 않는 높이로.

    1682호2026.06.09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