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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 인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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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자 인물비평]임종인 의원
    임종인 의원

    ‘신념’ 꺾지 않는 유식한 행동가4월 4일 임종인 의원(무소속)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후손에 재앙을 가져올 분”이라고 ‘악담’을 했다. 악담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불과 두어 시간 뒤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단식투쟁 중이었다. 급성위출혈로 실신한 것이다. 그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기 전 한·미FTA특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반대를 위해 자임한 자리였다. 그는 늘 옳다는 생각이 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실언’이나 ‘실수’가 잦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지지자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다. 그는 탈당하기 전 열린우리당의 보수화에 끝까지 맞섰다. ‘단골 농성맨’이 된 것도 그런 이유다. 2004년 12일 동안 계속된 국가보안법 철폐 국회농성 때 참여한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11일 동안 철야농성을 한 사람이다. 또 이라크 파병반대 농성도 했다.그는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발표했을 때 ...

    720호2007.04.17 00:00

  • [1000자 인물비평]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

    청와대 소통통로서 남북평화 메신저로열린우리당 이화영 의원은 3월 28일 자신의 4월 재방북 입장을 밝혔다. 그 자리에서 ‘이해찬 전 총리가 재방북할 수도 있다’는 자신의 이름을 인용한 보도에 대해 “오보이며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그러나 그의 발언은 실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의 3월 방북이 안희정-리호남 참사 라인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의 방북이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다. 확인된 것이 한 차례, 예정된 것이 한 차례다. 그가 ‘남북평화의 사도’로 등장한 것이다. 남북 비밀메신저는 북한의 신뢰가 기본이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박철언 청와대 정책특보,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 등 사실상 ‘권력신뢰 1순위 인물’들이 맡았던 것이다. 그의 방북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와 이해찬 전 총리수행자 자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먼저 북한을 다녀온 ‘밀사’의 수행원들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화영 의원은...

    719호2007.04.10 00:00

  • [1000자 인물비평]조순형 민주당 의원
    조순형 민주당 의원

    후배들이 닮고 싶어 하는 ‘원칙맨’‘원칙’이란 무엇인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정도로 죄어진 가야금 줄이다. 조금만 더 늘어져도, 또 조금만 팽팽해도 낼 수 없는 소리가 ‘원칙’이라는 말이다. 25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말씀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원칙적인 사람을 들라면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의 생활이야기를 들어보자.“서울법대 출신이지만 고시를 보지 않은 것은 관심도 없었고 경쟁이 싫어서다.”“대학 재학 중 미국 유학을 간 것도 작은형이 거기서 공부하고 있어서다.”국회의원이 된 이유도 신통치 않다. 11대 총선에서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당선된 곡절치곤 너무 ‘느슨’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그 답변이다. 부친이 유석 조병옥 선생이고, 형이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인 정치명문가 출신이니 그럴 법도 하다. 정치규제에 묵인 조윤형 전 의원을 대신해서 서울 성북에 출마했다.그는 단순하다. 그는 한때 ...

    718호2007.04.03 00:00

  • [1000자 인물비평]통합신당모임 이강래 의원
    통합신당모임 이강래 의원

    위기 때 ‘한방’ 가진 최고의 전략가 “한나라당 후보들은 네거티브 한 방이면 갈 수 있는 취약한 후보들이다.”통합신당 모임의 이강래 통합추진위원장이 지난 3월 13일 한 발언이다. 이 말의 의미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쓰겠다’는 선전포고를 담고 있음은 정치 주변에 있는 사람이면 짐작하고도 남는다. ‘통합선거법’에도 후보를 당선시키는 행위 및 당선시키지 못하게 하는 행위 일체를 ‘선거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발언의 가치와 비중은 무슨 의미냐보다는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보통이다. 이강래 의원, 그는 이해찬-이강래·김한길-민병두로 이어지는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정치 입문기에 전략가로 눈에 띈 것은 아니다. 그는 은행원 출신이다. 그는 대경상고를 나와 은행원 생활을 잠시 했다. 주경야독 끝에 명지대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나왔다. 은행원의 특징은 정확성. 한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정세보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DJ) 눈에 띄었다....

    717호2007.03.27 00:00

  • [1000자 인물비평]‘순수함’은 이상민의 힘입니다
    ‘순수함’은 이상민의 힘입니다

    3월 7일 국회 의원식당,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 우원식 의원과 함께 같은 당 이상민 의원에게 다가가서 “전당대회 때 우리 서로 어긋났지”라고 인사를 했다. 2·14 전당대회 직전 “사과상자에 썩은 사과가 하나라도 있으면 다 썩는다”며 김 전 의장의 ‘상쾌한 용퇴’를 주장했던 것에 대한 ‘용서반 유감반’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사실 ‘유쾌한 퇴진’을 주장한 것은 분당급 탈당사태와 책임을 따진 것이다. 이상민 의원은 2월 첫째 주 서울 여의도동 자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2월 임시국회 회기중이었지만 국회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그는 “아파트 경비원조차 만나는 게 두려웠다”면서 “열린우리당에 희망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먼저 탈당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월 6일 김한길 의원 등의 열린우리당 집단탈당 사태에 대한 이 의원의 술회였다.지난해 국회 윤리위 간사 시절의 이야기다. 2005년 10월 ‘대구술집사건’(국정감사 중 법사위원들이 술을 먹고 종업원에게 욕설 등 ...

    716호2007.03.20 00:00

  • [1000자 인물비평]정치적 판단 뛰어난 ‘언론인 김현미’
    정치적 판단 뛰어난 ‘언론인 김현미’

    “언니, 어떻게 할 거야? 이렇게 정국이 복잡할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야”김한길 의원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무렵인 지난 2월 5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원계로 분류되는 한 여성의원이 김현미 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김 의원의 충고를 수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탈당한 ‘정동영 사람들’ 속에 그의 얼굴은 없었다.김현미 의원은 열린우리당에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다. 그는 ‘언론인 김현미’로 통한다. 그가 줄곧 공보와 정무업무를 맡으면서 익힌 정치적 감각과 판단이 베테랑 기자들 못지않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김 의원은 전·현직 대통령과 당내 최대계파를 이끄는 정동영 전 의장 등 늘 최고위층의 곁에 있었다.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사면복권되기 직전의 DJ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인산인해였다. 김 의원은 그 자리에서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싶다”고 생각했...

    715호2007.03.13 00:00

  • [1000자 인물비평]정인봉 변호사
    정인봉 변호사

    ‘정치에 봉사’ 하다 겸손을 배우다 이명박 ‘검증 뇌관’을 건드린 정인봉 변호사. 그의 이름으로 나온 3권의 저서와 한 권의 번역서가 있다. ‘그래도 골목에는 꿈이 있다’(1998년)는 그의 44년 인생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자전적 에세이다. 공천도 받지 못한 채 잊혀져가던 정치인 시절(1996년 총선·종로)에 쓴 책이다. 제17회 사법고시(경기중고·서울법대)에 합격한 뒤 1987년 느닷없이 판사직을 버리기까지 폈던 웅지가 담담하게 배어나온다. “정치는 큰 봉사”라며 “큰 봉사를 하고 싶다”고 적고 있다. 변호사로 변신한 뒤에는 돈 되는 사건은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정치를 큰 봉사’로 여기던 그에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물급 변호사’라는 명성이 국회 입성을 보장하진 못했다. 신민주공화당·무소속·신한국당 등 당을 바꿔가면서 출마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정 변호사는 “정치에서 겸손을 배웠다” “무한 부채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의...

    714호2007.02.27 00:00

  • [1000자 인물비평]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소신껏 독자행보 걷는 ‘된장 의원’한나라당 고진화 의원. 그의 신념체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이던 김진경 선생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특히 고등학교 졸업 후 김 선생을 다시 만난 것은 1980년대 한국의 정치적·교육적 상황을 압축하고 있다.1985년 미문화원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으로 송치되기 위해 끌려나가던 검찰서 복도. 누군가 파란 수의를 입은 고 의원의 머리를 건드렸다. 김진경 선생이었다. 하얀 죄수복을 걸친 김 선생도 ‘민중교육지사건’으로 구속된 상태. 고 의원은 김 선생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 못한다. 아니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규칙적으로 매질하는 타이핑 소리를 기억할 뿐. 그것조차도 ‘고진화’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김 선생님의 시 때문인지도 모른다.“타이프 치는 소리가/무표정하게 튀다 멎는/검찰청의 복도를 너는 걸어오고 있다.…두 손에 채워진 수갑이 무겁게 중얼거리고 있다/...

    713호2007.02.2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