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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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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1)폭포수 같은 나의, 낡은 수도꼭지 같은 친구들
    (11)폭포수 같은 나의, 낡은 수도꼭지 같은 친구들

    친구들과는 어느새 잘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됐다. 그들에게 했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그들은 한 달 몫의 우정을 한 번에 월급처럼 주는 데 출중한 능력이 있다. 우리가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목격자가 되는 일은 점점 드물어졌다. 이를테면 밤을 꼬박 새워 핏발 서린 눈으로 원고를 마감하고 다음 일정으로 급히 뛰어가다가 지하철 문과 역 사이 작은 틈새에 안경을 떨어뜨려 분실했을 때(나는 안경이 없으면 뵈는 게 없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에 껴서 마스크 사이로 홍삼진액을 빨아 먹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곳에 40분이나 늦었음은 물론 완벽히 틀린 장소에 잘못 찾아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강남의 벌판 같은 대로에서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행사장에 도착해 사죄한 뒤 3시간 동안 갖은 애를 쓰며 행사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운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을 잘못 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무도 없는 건너편 승강장에서 마지막 차를 기다리던 중 그러고 보니 온종일 한끼도 먹지 못했음을 ...

    1496호2022.09.23 14:2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0)치킨을 계속 먹는 한, 비는 계속될 것이다
    (10)치킨을 계속 먹는 한, 비는 계속될 것이다

    나의 휴가 준비는 조금 특별하다. 휴가지는 늘 똑같다. 숙소도 매년 같다. 매년 그 시기만을 기다리냐면, 정확히 짚었다. 나는 이 시기를 위해 한해를 살았다. 시기는 늘 8월 초였으며 목적지는 정동진이라는 작은 바다마을이었다. 준비는 부엌에서 시작했다. 채수를 내어 집에 있는 온갖 채소를 넣고 김치 한포기와 청국장 한덩이 빠뜨려 푸지게 청국장을 끓인다. 엄마가 키워 보내준 가지를 들기름과 간장양념에 고소하게 찐다. 온갖 잡곡을 섞어 밥도 넉넉하게 지어둔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찐다. 마트에서 소량으로 사기 어려운 재료들도 소분해 챙긴다. 국물을 낼 다시마와 고추장, 후추, 설탕, 양파다. 아침으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거트와 그래놀라로 정했다. 두유로 만든 그릭요거트를 파는 가게를 찾아가 두유 요거트를 넉넉히 사고, 그래놀라 맛집도 들러 이틀 치를 구입하면 준비 완료다. 그렇게 드디어 출발 당일, 친구와 나는 2박3일 여행을 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짐...

    1491호2022.08.12 13:32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9)해가 저물면 나는 야한 춤을 출 거야
    (9)해가 저물면 나는 야한 춤을 출 거야

    2000년대 브라운관에서 섹시는 오롯이 ‘섹시 가수’라고 명명된 이들에게만 부여된 자격이었다. 춤을 추기 전부터 보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화장, 쥐 잡아먹은 듯 빨간 입술, 손잡이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링 귀고리,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스커트와 가슴골이 보이는 상의가 그의 역할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노래는 십중팔구 템포가 아주 느리고 끈적했으며 목소리는 희미했다. ‘요 쏘 섹시’라든지 ‘섹시 보이’ 등 실제로 섹시라는 단어를 가사에 내포하기도 했다. 노래가 시작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들에게만 허락된 행위인 섹시 웨이브를 미꾸라지처럼 반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심하게 ‘섹시’했다. 그 옆에는 섹시가 무엇인지 초성부터 배워야 할 듯한 여자들이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솜사탕 같은 머리띠를 한 채 입을...

    1489호2022.07.29 14:1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8)너의 춤을 보면 어딘가 찌르르하거든
    (8)너의 춤을 보면 어딘가 찌르르하거든

    크게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언젠가 까맣게 그은 얼굴에 하얀 덧니를 드러내고 웃는 그 미소가 꼭 입체파 화가가 그린 작품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주근깨도 없이 매끈한 살결,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박함을 가진 그 애는 매주 끝내주게 재밌는 글을 가지고 나타났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것들을 글로 써왔다. 매일 아침 중년 여성들로 가득한 조기축구회에 나가 미친 듯이 공을 찬다는 얘기나, BTS가 너무 좋아 모든 안무를 다 외워버렸는데 막상 쓸 데가 없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모아 가르쳐준다는 얘기, 해외여행을 가서 새벽 6시부터 밤까지 돈 한푼 쓰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은 샅샅이 다 돌아다닌다는 얘기,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달동네에 살면서 매일 언니와 동생의 밥을 해주고 친구들과 단체로 김장을 하고 밤새 파티를 한다는 얘기, 제주도의 신비로운 동굴 같은 곳에서 종일 쉬지 않고 다이빙을 한다는 얘기, 친구들과 밤마다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나체로 미친 듯이 춤을 춘다는 얘기...

    1488호2022.07.22 11:1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7)집이 먼저일까, 이야기가 먼저일까
    (7)집이 먼저일까, 이야기가 먼저일까

    서울 종로구 어딘가에는 내가 거의 살 뻔한 한옥이 있다. 막 첫 직장을 구해 부천에서 강남으로 3시간씩 ‘대륙이동’을 하던 나는 세상 모든 회한과 우울을 품고 살았다. 그때 대문과 기와지붕, 대들보와 서까래, 문설주만 보고 당장 계약금을 지불했다. 운치 있는 동네의 한옥에 살다니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드디어 세상과 내가 주고받는 것이 비슷한 등가 교환의 관계로 접어들 수 있겠다 싶었다. 거기서라면 지옥 같은 사회생활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후에 거실에 앉아 기와지붕에 걸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내 인생도 제법 괜찮아 보이겠거니 생각했다.여러 은행에서 비싼 이율로 최대한도까지 대출받고 동시에 월세까지 내느라 한 달 월급의 반을 집에 써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일곱 걸음이면 왕복하고 가지고 있던 침대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살림의 대부분은 버려야 했지만 문제없었다. 마루에 앉으면 시커먼 앞집의 시멘트벽이 시야에 들어...

    1485호2022.07.01 14:51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6)들꽃마을에 철강공장이 웬일이니
    (6)들꽃마을에 철강공장이 웬일이니

    엄마가 사는 마을 옆에 어느 날 커다란 철강공장이 들어선다고 했다. 엄마가 산골짜기에 친구들과 작은 마을을 만든 지 반년도 안 된 때의 일이었다. 목장으로 쓰일 뻔한 부지를 사이좋게 나눠 사서 삼삼오오 집을 지어 만든 작은 터전이었다. 자연과 어울려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뜻에서 들꽃마을이라 이름했다. 어딜 보아도 초록 능선이 넘실거리고 앞으로 나가면 맑은 계곡이 졸졸 흐르고 밤이면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 곳이었다. 봄이면 그곳은 귀뚜라미와 개구리 우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겨울이면 적막해 별들의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엄마는 봄을 앞두고 마당에 새싹을 옮겨 심으며 말했다. “너도 나중에 여기 와서 살고 싶어질 만큼 멋진 마을을 만들 거야.”그 호언장담이 하루아침에 위기에 처했다. 새싹들이 합창하듯 꽃을 피워내던 봄, 공장이 들어선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떨어졌다. 마을의 100m 옆에 들어선다는 공장은 마을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지...

    1482호2022.06.10 14:0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5)화장대의 200달러와 아메리칸 드림
    (5)화장대의 200달러와 아메리칸 드림

    우리 집 화장대에는 200달러가 있다. 긴 봉투가 벽에 기대 소리 없이 웅크리고 있다. 그것은 이모를 위한 것이다. 그를 위해 직접 은행을 찾아 환전해둔 것이다. 이제 그 돈의 주인은 없다. 그가 더 이상 그 돈을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길을 떠나는 그에게 그 돈을 얼마간의 비상금으로 드릴 요량이었다. 알록달록한 해바라기 탈을 쓴 곰돌이가 반복적으로 그려진 봉투에 담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크고 낯선 나라로 향하는 길에 부적처럼 건네고 싶었다. 그는 들떠 있었다. 65년 만에 처음으로 이국땅을 밟아보게 됐다고. 말로만 듣던 큰 대륙의 공기를 맡아볼 수 있게 됐다고.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이었다.이모가 다니는 교회 신도의 물 건너 친척이 간병인을 찾은 게 화근이었다. 집에 모시는 노인이 나이가 들고 치매에 걸려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단다. 코로나19로 의료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말이 통하는 사...

    1480호2022.05.27 13:52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4)말로만 듣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4)말로만 듣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뻔했다. 귀를 의심했다. 그와 나는 몇 번의 데이트 끝에 그의 자취방에 온 상태였다. 갓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둔 음식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며칠 전 찜닭에 있는 당면이 그립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비건 지향인인 날 위해 닭을 뺀 비건 찜닭을 만들어준 참이었다. 뜨끈하고 달큰한 당면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오케이(OK), 아주 오케이인 상황이었다. 그의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일순에 모든 식욕이 사라졌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네. 겨우 두입 먹었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 추운 날 치마는 왜 입어서는. 머리하는 데 40분 걸렸는데. 휴대전화번호는 차단하면 된다 치고, 집 주소는 왜 알려줬지, 미쳤나 보다. 비건 찜닭? 놀고 앉았다. 그냥 집에나 있을걸.보지 못한 세계의 사람수백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젓는 동안 만남 이래 가장 긴 적막이 찾아왔다....

    1478호2022.05.13 14:17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3)신명 나는 우리 소리에 빠지다
    (3)신명 나는 우리 소리에 빠지다

    만남은 은밀해야 했다. 서로의 입을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연습실에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마주 앉았을 때는 신남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얗고 커다란 북을 껴안고 있는 선생님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둥글게 튀어나온 이마, 홑꺼풀의 상큼한 눈망울, 차분한 콧대, 백옥같이 하얀 피부, 평소 말할 때의 목소리가 한 배구선수를 닮은 것까지.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입이 보이지 않으면 정말 어려워서요.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였다. 판소리에는 악보가 없었다. 음원이나 반주도 없었다. 그가 건넨 종이에는 오롯이 글자만 있었다. 곳곳에 연필로 그려진 지렁이 같은 낙서가 있을 뿐이었다.모든 것은 입으로부터 시작됐다.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그 입에서 새소리가 나기도 하고 귀신 소리가 나기도 했다. 북처럼 웅웅대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도 났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듣고 있다가 어느덧 그것을 따라 내어보라고 했을 때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제 발로 찾은 ...

    1476호2022.04.29 15:3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소리를 찾아서(上)
    (2)소리를 찾아서(上)

    소리를 질러본 지 퍽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가슴께를 누르는 듯한 답답함의 출처는 분명 그것이었다. 한동안 소리를 지르지 못하면 답답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고 1년이 좀 넘은 시점이었다. 클럽, PC방, 당구장 등이 기약 없는 영업 중단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노래방도 포함이었다. 유흥과 오락은 새로운 흐름을 맞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블루투스 마이크를 사들였다. 작은 미러볼을 사서 불을 끄고 집에서 노래를 불렀다. 인테리어에 심취하고 홈 카페에 취미를 들였다. 그것도 아니면 퍼즐을 사고 보드게임을 사서 집으로 모였다. 예전엔 흐리멍덩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산책을 하듯 노래방으로 향했다. 열창을 시작하면 내 목소리는 쉬이 스피커의 그것을 넘어섰다. 마이크를 안 들고 불러도 방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나에게 집에서 블루투스 마이크라니 윗집과 아랫집과 옆집에 안 될 말이었다. 소리 지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빼앗기고 말았다.지르는 것의 쾌락나는 지르는 것...

    1474호2022.04.18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