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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 전체 기사 31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1)수상한 여자
    (21)수상한 여자

    ‘깜박했어ㅛㅇ!!!’ 자음과 모음이제 갈 길을 가는 주홍색 말풍선.그는 물건을 역 보관소에 맡겨달라 했다.나는 받을 돈만 있지 낼 돈은 없었다. “저… 지갑이 없어 그러는데….”사람들은 들은 척도 않고 지나쳤다.나는 오늘 지하철역에 가야 했다. 거기까지는 걸어서 7분 거리였다.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세수할 필요도 없었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잠옷에 짧은 패딩 점퍼를 걸쳤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바지는 남색 바탕에 하얀 땡땡이 패턴이었다. 누가 봐도 잠옷 바람이었지만, 각자 갈 길로 바쁜 사람들이 가득한 역사에서 입고 있다고 한들 시선을 살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금방 처리될 거였다. 나는 서랍장과 벽 사이의 틈에 끼워둔 종이 쇼핑백들을 뒤적거렸다. 빳빳한 재생 크라프트지로 된 적당한 사이즈의 쇼핑백을 골랐고, 거기에 약속된 물건을 넣었다. 정해둔 시간과 장소에 약속한...

    1524호2023.04.14 14:19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0)태양에 대한 통화기록
    (20)태양에 대한 통화기록

    울적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순간에 나는 때로 엄마에게 전화한다. 그것은 일요일 오후 4시쯤에 일어나는 일이다. 정점에 달한 오후의 햇살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우울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소를 마친 집 안은 깨끗했고, 방금 요리한 음식들로 배가 불렀다. 포만감과 온기로 내 몸은 흐드러지고 있었다. 이제는 덩어리들만 남아 있었다. 내가 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일들.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깨가 뻐근해지는 덩어리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파도에 덮쳐 숨을 쉴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엄마는 묻는다.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의례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했다. 정적 끝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치 숨을 내쉬는 김에 하는 것처럼 말한...

    1521호2023.03.24 12:50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9)소공녀 뷰티랩
    (19)소공녀 뷰티랩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말이 없다. 살벌한 긴장감이 흐른다. 내가 먼저 입을 연다. “기립하십시오.” 몸을 일으키는 세 사람의 얼굴엔 각각 어둠, 설렘, 결연함이 서려 있다. 세 사람은 삼각형으로 서서 어깨동무를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정수리를 붙인 채 일제히 땅을 바라본다. 이어서 내가 구호한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외친다. “예뻐진다, 예뻐진다, 예뻐진다!”내가 한명을 쳐다보며 말한다. “잠깐, 귤. 목소리가 작습니다.” 아까부터 얼굴이 어둡던 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내가 말한다. “예뻐지는 게 부끄럽습니까?” 귤이 대답한다. “살면서 이런 말은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말한다. “목소리 커질 때까...

    1517호2023.02.24 11:1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8)세 여자의 설
    (18)세 여자의 설

    이모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졌다. 설날 하루 전이었다. 동네의 작은 목욕탕은 여느 때처럼 한산했고, 누구도 그가 넘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소리는 짙은 수증기 속에 포근하게 묻혔다. 이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너무도 극심한 통증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한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시점에, 그는 천천히 바닥에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넘어진 건가? 그는 자문했지만, 일어선 곳에 넘어진 흔적 따위는 없었다. 그는 거품 하나 묻히지 못한 몸 그대로 탕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옷을 주워 입었다. 온몸이 얼얼하고 욱신거렸지만, 그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어딘가 한구석이 마비된 듯 무감각하면서도 뼈와 근육이 모두 제각각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목욕탕이 있는 사거리에 보이는 정형외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깊은 잠에 빠졌다....

    1515호2023.02.10 11:3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7)휴가라고 불러볼까
    (17)휴가라고 불러볼까

    “내 바지 어디 갔어?”엄마가 대뜸 묻는다. 분명 아까 여기 두었던 바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한다. “아까 차에서 본 것 같은데?” 그러자 엄마가 냅다 소리친다. “글쎄 내가 여기다 놨대두!”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엄마는 씩씩거리며 차에 갔다가 곧 얌전해져서 돌아온다. 바지는 차 안에 잘 개어져 있었다. 바지는 건드린 적도 없고 심지어 그 소재를 찾아주기까지 한 내 입장에서 엄마의 난데없는 호통이 얼마나 당혹스러운지를 설명하면서 운전하다가 인천공항에 가는 길을 잘못 들었다. 한참을 돌아 도착한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저가 항공사가 있는 H구역에 체크인 수속하는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 끄트머리에 엄마를 세워두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E 구역에서 환전한 돈을 찾고, D구역에서는 여행자 보험을 들어야 한다. C구역에서 우리가 입고 온 두꺼운 옷...

    1512호2023.01.13 11:3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6)쾌유를 빌며
    (16)쾌유를 빌며

    꿈에 그리던 퇴사를 하고 얼마 후 알 수 없는 두통이 시작됐다. 처음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컨디션이 안 좋나 보다 하고 잠을 더 잤다. 아무리 자도 자기 전과 똑같이 통증은 이어졌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두통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과에 가서 수액도 맞아보고 찜질도 받아봤지만, 두통은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게 어떤 일도 집중할 수 없는 며칠이 흘러갔다. 두통이 멈추지 않는 일상이란 늘 정신없고 시끄러운 페스티벌 현장에서 사는 기분이구나 하며 만성두통 질환을 가진 사람의 범죄율 증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루 중에 아프지 않은 순간보다 아픈 순간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통이 시작된 지 벌써 1주일이 넘었음을 깨닫게 될 즈음, 머리가 종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있는 머리카락을 다 뜯어버리고 싶어졌다. 뇌수막염을 의심케 하는 증상이었다.나의 친절한 한의원 선생님께서는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이것을 &l...

    1510호2022.12.30 14:5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5)밤을 넘어서
    (15)밤을 넘어서

    환절기면 부쩍 부고 소식이 들렸다. 나이가 들면 계절이 대수로워진다 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그저 몹시 춥고 더운 것을 넘어 삶을 흔들게 된다 했다. 계절이 몸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 새로운 계절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여름에서 가을이, 가을에서 봄이 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산을 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보이지 않는 흐름이라는 것이 정말 있나 싶었다. 꽃들이 계절에 따라 피어나고 지고 씨앗을 떨구듯이 사람도 날씨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것일까 하고.도시인에게 계절이란 감정만큼이나 부수적인 것이었다. 사계절이 아닌 출근과 퇴근, 주중과 주말만이 있었다. 계절의 변화는 벽에 걸린 액자의 그림이 바뀌는 것과 비슷했다. 빨간 날을 기점으로 어렴풋이 인식됐다. 겨울은 크리스마스, 가을은 추석이고, 여름은 휴가, 봄은 설날이었다. 도시를 가득 채운 도로와 빌딩은 매일 같은 모습이었다. 환절기는 옷 입기가 다소 까다로워지는 날들에...

    1508호2022.12.16 11:30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4)개미왕국에 이사 온 공주
    (14)개미왕국에 이사 온 공주

    그는 내가 아는 유일한 공주다. 그에게 묻는다. “공주야, 잘 잤니?”, “공주야, 뭐해?” 그가 답한다. “응, 잘 잤어.” 그를 감히 생명 분류로 설명하는 우를 범해보고 싶다. 전체적인 목(目·생물 분류의 한 단위)은 새송이버섯이다. 부정할 수 없이 버섯 같은데 매끈하고 큼직하고 맹하고 선한 느낌이 딱 새송이다. 목의 아래에 있는 과(科)는 코알라라고 말하고 싶다. 전혀 누구한테 안길 사이즈나 담겨갈 만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가 코알라를 닮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이 언젠가 새송이버섯목에 코알라과인 공주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면, 누구든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니까 그는 새송이버섯목에 코알라과 공주였고, 그래서 그를 공주라 부르는 순간은 늘 조금 웃겼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공주답지 않은 공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킨로션도 겨우 챙겨 바르고 도무지 색깔이 있는 옷을 ...

    1505호2022.11.25 14:28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3)회사원 Z와 달의 표면
    (13)회사원 Z와 달의 표면

    회사원 Z는 출근시간 마다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삶이 대체 언제 시작되는 건지 궁금했다. 분명한 건 아직 한 번도 시작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유치원 때는 초등학교 이후에, 중학교 때는 중학교 이후에,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교 이후에 삶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다. 오늘은 언제나 내일을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 했다. 내가 입고 싶은 옷과 가고 싶은 장소가 아닌 교복을 입어야 했고 학교에 있어야 했다. 대학생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는 것만이 출발선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졸업을 앞둔 그에게 지도교수는 말했다. ?별걱정할 필요 없어.? Z는 생각했다. 어떤 ?걱정?을 말하는 걸까. 아무것도 시작된 것이 없는데.회사원이 됐지만, 삶은 여전히 보류된 것 같았다. 눈을 뜨면 학교에 가는 대신 회사에 오게됐을 뿐이다. 3교시가 끝나면 점심을 먹듯이 오전 업무가 끝나면 점심을 먹고, 시간이 되면 하교하듯 퇴근했다. 월급을 받는다는 점이 달랐지만, 지극히 형식적...

    1504호2022.11.18 14:22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12)회사원 Z의 아침체조
    (12)회사원 Z의 아침체조

    바야흐로 세상에는 회사만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 등장한다. 회사만을 위한 마을이기 이전에 그곳은 들판이었다. 여름이면 풀과 잡초로 뒤덮여 눈부신 초록이 눈을 찔렀고, 겨울이면 모든 것이 잠들어 죽은 황야 같았다. 파란 하늘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시야를 채웠으며 새들이 아름다운 정렬을 이루고 날아갔다. 그곳에서 사람은 풀잎에 앉은 벌레만큼 작아 보였다. 풀을 누르고 자리를 잡은 것은 공룡만큼 커다란 건물이었다. 별안간 회색의 건물들이 줄 맞춰 들어섰다. 아침이면 일꾼을 옮기는 버스가 오갔다. 건물이 세워지고 인파가 쏟아져도 그 땅의 여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스스삭삭 숨어들었다. 그러면 다시 바람 부는 소리만 들렸다. 잡초들이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처럼 마구 휘날렸다. 마찬가지인 일이 저녁에도 일어났다. 밤이면 텅 비어 산속 깊은 곳처럼 적막했다. 24시 편의점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버스는 이른 아침 도시의 중심부에서 출발했다. 버스에는 번호도, 노...

    1499호2022.10.14 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