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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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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31)오피스 샤워
    (31)오피스 샤워

    내 샤워의 준비물은 미국 드라마 <오피스>다. 나는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본다. 그것은 거의 정해진 의식 행위에 가깝다. 휴대전화를 쥐고, 화장실에 간다. <오피스>를 틀고, 샤워기를 튼다. 어느 날은 무작정 샤워기를 틀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생각했다. 뭔가 아닌데, 이게 샤워가 아닌데. 잠시 후에 답을 찾았다. <오피스>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디 워시는 없어도 되지만, 칫솔질쯤 하루 걸러도 되지만, <오피스>는 그렇지 않다. 몇 시즌의 몇 화가 됐든지, 마이클의 씩씩한 목청이 들려오지 않으면 샤워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단단히 고장 난 샤워를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오피스>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미국의 대하(?) 시트콤으로, 미국의 스크랜턴이라는 소도시의 작은 제지회사 직원들의 일상을 담은 코미디 드라...

    1552호2023.11.03 11:12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30)앞집 언니
    (30)앞집 언니

    요즘 나는 앞집 언니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저녁에 렌즈를 끼던 도중에 실수로 한쪽을 잃어버렸다. 분명 눈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그 작고 투명한 것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불현듯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건조하게 말한다. “언니, 나 또 불행한 일의 목전에 있어.” 순식간에 커다란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고 나온다. “뭐라고!” 잠시 후 창문 밖으로 눈 부신 빛이 보인다. 빛을 제외한 주변은 칠흑처럼 어둡다. 엄청난 빛이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온다. 작고 결연한 걸음걸이, 팔꿈치 아래까지 찰랑이는 검은 생머리. 그는 나의 앞집 언니다. 한 손에는 대마법사 간달프의 지팡이 같은 엄청난 조명 기구를 쥔 채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반딧불이 같다.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집 문을 열어젖힌다. 바닥...

    1548호2023.10.06 11:0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9)모임
    (29)모임

    지금 이곳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뿜지 않고 있어요. 숱 많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근사한 버드나무 아래 앉았어요. 짙은 녹색의 머리칼 사이로 작은 빗방울들이 툭툭 나를 건드립니다. 잔잔히 흐르는 강이 내다보이는 정자로 자리를 옮기며 모임은 시작됩니다.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이름을 맞히는 게임을 합니다. 이름은 방금 옆 사람이 지어줬어요. 오늘은 신경숙과 황정은, 미셸 푸코와 토베 얀손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신경숙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130㎞를 달려 이곳에 왔습니다. 황정은은 설레 잠을 한숨도 못 잤대요. 토베 얀손은 틈만 나면 이유 없이 손뼉을 칩니다. 미셸 푸코는 내가 올여름에 본 가장 크고 듬직한 부채를 들고 다닙니다. 충주 우체국에서 줬대요. 그는 생각보다 신발 끈이 자주 풀리는 사람. 길가에 자주 멈춰 섭니다. 보다 못한 토베 얀손이 끈을 직접 묶어주겠다고 나서요. 푸코는 웃으며 쭈그려 앉아 끈을 묶습니다. 두 번이나요....

    1544호2023.09.01 10:56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8)인천 기행
    (28)인천 기행

    다음 버스까지는 18분이 남았다. 버스 배차간격을 확인하는 일은 서울에 살게 된 이후로 없어진 습관이다. 나는 다른 버스를 고른다. 일단 타고, 도착하면 방법은 얼마든 있을 거였다. 그 동네라면 훤했으니까.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10년 만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모두 빨간색이다. 빨간색 버스가 수시로 정류장을 드나들며 인천의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지만, 사실상 같은 버스는 30분의 한 대꼴로 온다. 서울을 나오는 날이면 버스 배차 시간부터 확인하곤 했다. 무턱대고 나왔다가는 한참을 기다리게 됐으니까.내가 기억하는 인천의 절반은 빨간 버스다. 평생 많은 버스를 타봤지만 잠을 자기에는 빨간 버스만 한 것이 없다. 관광버스처럼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좌석이 있고, 한 번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정차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해 매끈하게 내달렸다. 덕분에 잠에 빠지면 깰 일이 거의 없었다.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실패하는 날이 많...

    1540호2023.08.04 11:21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7)친구에 대해 쓰면서 친구에 대해 쓰지 않기
    (27)친구에 대해 쓰면서 친구에 대해 쓰지 않기

    얼마 전 내가 <아무튼, 친구>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친구들이 물었다. “내 얘기도 썼지?” 나는 웃을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작가인 친구가 친구를 주제로 책을 썼으니 그중 한 편쯤은 등장했으리라 기대하는 건 흔한 일이다. 물론 원고를 쓸 때마다 애틋한 얼굴들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언제든 전화를 걸어 맛있는 걸 먹자고 말하고 싶은 이도 줄을 섰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글에 쓸 수 없었다. 씀으로써 그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었다. 친구를 너무 사랑해 마지않아서 친구에 대해 쓰는 건데, 자칫하면 친구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나는 친구에 대해 쓰지 않으면서도 친구에 대해 써야 하는, 난해한 과제에 도전해야 했다.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있었고 심지어 비일비재하다. 나 혼자만의 고민도 아니다. ‘타인에 대해 쓰기’는 이 시기 ...

    1538호2023.07.21 11:1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6)목욕 일지
    (26)목욕 일지

    온탕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탕 저편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유진씨! 나 얼음 맥주 하나만!” 그러자 저 멀리 탕 입구로 들어오던 한 사람이 “얼음 맥주요?”라고 소리쳐 되묻는다. 아줌마는 다시 “나 오늘 다리가 아파서!”라고 외친다. 그들의 목소리가 목욕탕의 천장을 따라 둥글게 메아리친다. 다른 누군가가 탕으로 들어온다. 아줌마는 어김없이 소리친다. “수진씨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나 얼음 맥주 부탁하려고 기다렸는데.” 수진씨로 추정되는 분은 하하 웃으며 온탕에 입수해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아줌마와 대화를 이어간다.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목욕탕 안에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목욕탕에서는 휴대전화를 가져온 사람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로 한다. 이것은 목욕탕의 규칙보다 아줌마들의 기가 ...

    1536호2023.07.07 11:29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5)하수도가 터지면
    (25)하수도가 터지면

    유난히 터지는 게 많은 여름이었다. 잘하던 연애가 터지고 일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 엄마와 싸우느라고 박이 터졌다. 그러다가 하수도까지 터졌다. 아주 사이좋게 다 터지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빌라 반장님이 말했다. 그 집에서 설거지 한 번만 해도 지하 집에 물웅덩이가 생겨요. 나는 마포구에 있는 지은 지 33년 된 빨간 벽돌의 빌라에 살고 있었다. 그 정도면 뭐가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수도관은 땅속 깊숙이 파묻혀 있었고,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 포클레인을 불러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보름 동안 물을 못 쓰게 될 거랬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손을 씻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방금 물 썼죠? 지하에 물 내려오네요.” 나는 말했다. “아….”공사가 시작됐고, 물이 없는 생활은 곡예에 가까웠다. 수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하수도로 흘려보내는 것은 문제가 됐다...

    1534호2023.06.23 11:17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4)글쓰기 강연 요청을 받고
    (24)글쓰기 강연 요청을 받고

    서울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주제는 무려 글쓰기와 독서의 중요성이었다. 학교는 소위 강남 8학군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고, 청중은 남자 고등학교 2학년생 400명이었으며, 대부분이 이과를 지망한다고 했다. 들을수록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당장 다음날 강연을 앞두고 화면과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막막한 마음에 학생들이 독서모임에서 읽는다는 도서를 살펴봤다. 전부 AI와 과학 기술에 관한 책이었다. 학생들이 직접 발행한다는 교내 신문을 읽어보기도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와 치의과에 합격한 선배들을 직접 찾아가 입시 관련 인터뷰를 하거나, 의대 모집 정원을 늘릴 조짐이 보인다는 기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각 잡힌 글들이었다. 선생님께 요즘 국어 시간에는 무얼 배우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챗GPT를 사용해 작문하는 방법을 배우...

    1531호2023.06.02 11:29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3)첫 직장은 시민단체
    (23)첫 직장은 시민단체

    첫 직장은 시민단체를 추천한다.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내가 몸담은 시민단체의 구성은 기괴하고 심플했다. 고문단과 이사장 그리고 유일한 실무자인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수십 개의 머리를 가진 단 하나의 몸통이었다. 이사장이 그런 식으로 만든 시민단체 몇 개가 같은 사무실에 모여 있었는데, 그러니까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직원 몇몇이 더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총체적인 근대사 문화체험을 할 수 있었다.우선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회식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됐다. 술을 전혀 못 하는 나에게 “토할 때까지는 마셔라”라고 말했고, 잔을 부딪칠 때마다 이사장이 “다솔아! 여기 뼈를 묻자!” 혹은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혹은 “단체가 곧 내 삶이다!”라고 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월급은 쥐꼬리보다 짧았는데, 회식은 1차 소고기 2차 횟집 3차 노래방을 꼭 지켰다.이...

    1529호2023.05.19 11:25

  •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2)어떤 알바생의 꿈과 현실
    (22)어떤 알바생의 꿈과 현실

    처음 자취를 했던 곳은 상가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매일 지상철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면 기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철로를 따라 걸으면 역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게 낭만처럼 느껴졌다. 그 집에 살 때 처음으로 휴학계를 냈다. 아빠가 집을 떠나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고, 나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직서를 내듯 교수님께 휴학을 선언했고 면담을 나와버렸다. 학비를 벌어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 생활용품 브랜드 매장에 풀타임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곳은 국내에 여러 지점을 두고 있는 큰 브랜드였는데, 내가 일하는 매장은 서울역 바로 옆에 있는 대형마트 내부에 입점해 있었다.나는 그 브랜드를 좋아했다.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시내에 나가면 줄곧 그 브랜드의 매장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돈을 모아 그곳의 잠옷을 아빠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고급스러운 색감,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 정갈한 디스플레이와 아늑한 분위기. 그야...

    1527호2023.05.05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