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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의 시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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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의 시톡](28)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메모하다
    (28)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메모하다

    한 모임에서 “어릴 적, 한겨울에 거의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고 하자, 믿지 않더군요. 강원도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경기도 안성은 그럴 수 없다면서요. 억울한 마음에 휴대전화로 검색해 안성 옆 여주의 ‘영하 27도’까지 내려간 기록을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쉽게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기후위기도 그렇지 않을까요. 인류가 전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환경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사람들은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절망의 순간에 태어나는 시 이재연 시인(1963~ )의 두 번째 시집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는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재앙과 희망 없는 미래, 그런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어른들의 무책임, 그리고 신(神)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은유와 통찰을 통해 빼어난 솜씨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평범한 일상과 회상을 시간(경험)을 통해 재구성하면서도 적절하게 성경 구절과 신화를 시에 녹여냅니다...

    1561호2024.01.11 06:00

  • [김정수의 시톡](27)“십삼 년을 준비해온 속엣말”
    (27)“십삼 년을 준비해온 속엣말”

    대학에 다닐 때, 국어학 과제 중 하나가 유행어를 수집해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참새 시리즈’에 이어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했지요. 지금으로 치면 ‘아재 개그’쯤 될 듯합니다. 시중에서 유행하는 말을 수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국어대사전을 펼쳐 ‘정수’를 찾아보니, 20개쯤 됐습니다. 그걸 옮겨 쓰고는 ‘정수(正洙): 나’라고 끝에 추가해 제출했습니다. 이것도 언어유희의 하나라 생각했습니다.미량에서 미량까지김미량 시인(1970~ )의 첫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맨 앞의 시는 ‘미량’, 맨 뒤의 시는 ‘다시, 미량’입니다. 미량으로 열고, 미량으로 닫지요. 의도적인 배치입니다. 미량(微量)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적은 분량입니다. 동시에 ‘미량’이라는 이름의 시인을 지칭합니다. 좁게는 시인으로 활동한 14년을, 넓게는 생애를 의미하겠지요. 미량이라는 단어에는 자...

    1555호2023.11.30 07:00

  • [김정수의 시톡](26)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다
    (26)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다

    한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자주 본 사이가 아닌지라 얼굴과 이름이 헷갈렸지요. 떨떠름한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이름을 잘못 말했다는 것을요. 행사가 끝난 뒤 찾아가 사과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오래 남았습니다. 비슷한 얼굴과 이름 그리고 오랜 시간이 착각을 불러오지요. 어디 사람만 그런가요. 식물도 모양이 비슷한 게 많아 헷갈리긴 마찬가지입니다.다른 듯 닮은 것들첫 시집 <묵은지에 대한 묵상>을 낸 연규민(1962~ ) 시인은 농사를 짓다 보면 벼와 피, 밀과 독보리, 들깨와 개쑥갓의 구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중 “먹지도 못하는 개쑥갓”(이하 ‘털별꽃아재비’)은 쑥갓 흉내로도 모자라 “들깨인 척하고 있”으면 “눈곱만한 별꽃 달기 전에는/ 영락없는 들깨”라네요. “두메고추나물이란 ...

    1549호2023.10.13 11:06

  • [김정수의 시톡](25)한평생 되새김질할 외로움
    (25)한평생 되새김질할 외로움

    지난 주말, 산사에서 시 토크를 했습니다. 독경과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법당에서 시를 읽고, 그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험은 생소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함께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지요. 친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첫 만남이었습니다. 전생과 현생의 인연이 만들어낸 만남이었겠지요. 소극적 인연에 그친다면 관계는 시 한 편 읽고 끝날 것입니다. 그래도 함께 찍은 사진은 남을 것이고, 훗날 그 사진을 보며 기억을 되새기겠지요.가족의 애환이 서린 왕십리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가 당선돼 문단에 나온 조현석 시인이 등단 35년을 맞아 다섯 번째 시집 <차마고도 외전(外傳)>을 냈습니다. 시집은 회갑(回甲) 당일에 세상에 나와 의미를 더했습니다. 1987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 기획과 편집 일을 한 시인은 ‘문예중앙’과 ‘...

    1545호2023.09.11 14:01

  • [김정수의 시톡](24)순간 포착한 빼어난 이미지
    (24)순간 포착한 빼어난 이미지

    아파트 주차장을 지나면 화단이 있습니다. 국화를 심은 화단에는 접시꽃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지요. 한데 국화 옆에 뽑아놓은 잡초가 수북하더군요. 순간 접시꽃 혼자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스쳤고, ‘험한 손길에도 혼자 살아남았구나. 참 외로웠겠다. 곁의 비명에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얼른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지요. 이것이 바로 ‘디카시’입니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와 시가 결합한 새로운 문학 장르입니다.숫자가 의미하는 것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리호(1969~ ) 시인은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에 이어 3년 만에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을 냈습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Dona nobis pacem)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4부에 수록된 시 ‘도나 노비스 ...

    1541호2023.08.11 15:00

  • [김정수의 시톡](23)육체와 영혼까지 그대에게
    (23)육체와 영혼까지 그대에게

    지난 주말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살던 집 문이 열려 있어 빼꼼 들여다보자 개가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아무도 내다보지 않더군요. 제가 살던 집 옆 잠실은 낡아 허물어져 갔고, 공동우물은 뚜껑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얀 꽃 만발하던 이웃집 살구나무와 개나리 울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친구들과 공을 차던 마당은 왜 그리 좁던지요. 한밤에 살금살금 복숭아 서리를 하던 친구들은 어디서 잘살고 있을까요. 마을을 나서는데, 옷에 쓱쓱 문질러 먹던 복숭아 맛이 새삼 그리웠습니다.지고지순한 사랑인데 약간은 무서운지난 6월 사랑시선집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를 낸 강기원 시인(1957~ )은 사랑을 과일로 치면 복숭아 같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됐을 땐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가는 것&...

    1537호2023.07.14 11:19

  •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지난봄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녁 무렵 출국인지라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해가 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과 땅의 어둠 사이로 길게 빛이 드리웠습니다. 빛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깨어나는 듯했지요.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비행인지라 경계의 빛은 오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어둠의 속도를 추월할 수 없어 어느새 하늘은 캄캄해졌고, 별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 습한 여름이 거기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봄에서 여름으로 이동한 것이지요.몇 권째인지 모를 푸른 여권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는 채인숙 시인(1971~ )은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게 아니라 또 여름이라 합니다.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인 인도네시아는 항상 여름입니다. 한데 시인은 여름이 지속되는 게 아니라 여름이 가면 다시 여름이 온다고 합니다. 이는 타국에 살지만, 고국에서의 습관과 생체리듬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시인은 시 &l...

    1533호2023.06.16 11:48

  •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집 뒤에 북한산 자락 산책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종종 같이 올라갔는데, 좀 크니 따라나서지 않더군요. 혼자 가려니 쓸쓸하고, 능선을 오르는 길인지라 점차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둘레길이 생기고서야 아내와 가끔 걷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둘레길에서 벗어나 능선길을 걸었습니다. 조금 오르자 능선의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요. 오랜만에 찾았는데도 한결같은 모습이라 좋았습니다.시집 8권에서 88편 직접 선별커다란 바위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석중 시인(1938~ )은 18년 동안 8권의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2~3년마다 한 권을 낸 셈이지요. 한 문학모임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20여년이 흘렀지만, 시인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67세의 늦은 나이에 등단해서인지, 더 치열하게 시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중에...

    1527호2023.05.05 12:20

  • [김정수의 시톡](20)놓친 길 위에서 생명을 포착하다
    (20)놓친 길 위에서 생명을 포착하다

    봄햇살 말간 산책길이었습니다. 늘 다니던 골목길에 노란 씀바귀꽃 한 무더기 피어 있었지요. 시멘트 틈새를 비집고 만개한 꽃이 신기해 가던 길 멈추고 휴대전화로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어머나! 정말 예뻐요” 하더니만, “이거 제가 뽑아다가 키우면 안 될까요” 했습니다. “저 꽃이 있을 자리는 여기가 맞다”며 만류했지만, 내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뽑았습니다. 이튿날 다른 골목 화단에서 마주친 그 꽃은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지요.중심에서 발현되는 순간과 미혹의 시김휼 시인(1962~ )의 사진 시집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을 몇 장 넘기면 제가 본 장면과 비슷한 사진이 나옵니다. 시멘트로 포장된 골목길, 길과 벽 그 틈새에 맨드라미가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포장한 지 오래됐는지 길과 벽이 시커멓습니다. 맨드라미 키만큼 시커먼 벽은 위로 갈수록 점점 밝아지고, ...

    1522호2023.03.31 11:22

  • [김정수의 시톡](19)‘시똥 누는’ 쑥국 선생님반 아이들
    (19)‘시똥 누는’ 쑥국 선생님반 아이들

    “어머니가 빨아놓은 빨래가 잘도 말라요/ 이젠 정말 봄이 되었나 봐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쓴 시 앞부분이랍니다. 하교 후 동시 숙제를 하려고 봄빛 가득한 마당에 멍석을 깔고 엎드려 끙끙거리는데,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넣어놓은 빨래가 눈에 들어왔지요. 본 그대로 써서 냈습니다. 숙제 검사를 하던 선생님의 첫마디는 “이거 어디서 베꼈냐”였습니다. 아니라 해도 믿어주지 않더군요.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마음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습니다.재미난 시 너무 많아 선별 어려워전북 군산서해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시와 동식물,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쑥국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쑥국은 송숙 선생님의 닉네임입니다. 선생님은 해마다 아이들과 학교 공터에 화분을 들여 꽃을 심고 밭을 일구며 작은 연못도 가꿉니다. 선생님과 같이 일을 하는 아이들은 이곳에 찾아오는 곤충들의 이름을 알아가며 &lsqu...

    1517호2023.02.24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