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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플라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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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재의 플라이룸](69) 유행의 과학과 인과관계의 실종
    (69) 유행의 과학과 인과관계의 실종

    화려해 보이는 최첨단 현대 생물학의 성공은 이제는 잊힌 낡은 실험실의 퀴퀴한 냄새와 그 안에서 솟아난 엄밀한 논리의 승리 덕분이다. 모건이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좁고 지저분한 플라이룸에서 초파리와 씨름하며 유전의 염색체 지도를 그려냈을 때, 그를 지탱한 것은 거대한 연구비나 화려한 기기가 아니라 관찰된 현상 이면의 인과관계를 끝까지 파고드는 유전학적 집요함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은 이 ‘플라이룸’의 정신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거대 자본이 투여된 ‘빅 사이언스’의 시대는 데이터의 양으로 질적 엄밀함을 대체하려 하며, 인용지수라는 숫자의 놀음 속에 ‘유행하는 과학’이 학술지의 지면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최근 신경과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 ‘뉴런’에 발표된 비판적 논평은 지난 10여 년간 생물학계를 휩쓸었던 ‘장내 미생물-자폐증 연결고리’라는 거대한 유행이 얼마나 허술한 인과관계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서늘하게 폭로한다.장내 미생물 연구의 정치경제학: 자...

    1660호2025.12.26 15:28

  • [김우재의 플라이룸] (68) 수컷의 변신은 생존 전략이다
    (68) 수컷의 변신은 생존 전략이다

    교미를 마친 암컷 초파리가 보여주는 변화는 극적이다. 알을 낳기 시작하고, 더 이상 다른 수컷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식성까지 변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수컷이 넘겨준 정액 단백질에 의해 조종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유전학의 쾌거였다. 그에 비해 수컷은 그저 유전자를 배달하고 사라지는 소모품이자, 수컷 초파리의 교미 후 변화는 기껏해야 잠시 지쳐 쉬는 ‘불응기’ 정도로 치부돼왔다.하지만 최근 여러 연구는 겨우 두 달 남짓 살아가는 초파리 수컷조차 교미 후 복잡한 생리학적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컷에게 교미는 끝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변신의 시작이다. 교미라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수컷의 뇌와 몸은 생존과 다음 번식을 위해 완전히 재설계된다.틴베르헌의 위계와 행동의 재편동물행동학의 거두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동물의 행동이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고 보았다. 배고픔, 성욕, 두려움 같은 본능이 서로 경쟁하며, 상황에 따라 하나의 행동이 선택되면 나머지는 억제된다...

    1656호2025.11.28 14:40

  • [김우재의 플라이룸] (67) 노벨상의 쓸모, 혹은 망령
    (67) 노벨상의 쓸모, 혹은 망령

    10월의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한바탕 열병이 한국사회를 휩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낭독되는 몇몇 과학자의 이름이 지구 반대편의 나라를 통째로 들었다 놓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면역 관용’의 비밀을 파헤친 메리 E. 브렁코, 프레드 램스델, 사카구치 시몬에게 돌아갔다. 물리학상은 거시적 양자 터널링 현상을 발견해 양자컴퓨터의 기틀을 닦은 미셸 H. 드보레, 존 M. 마티니스, 존 클라크가 수상했고, 화학상은 가스를 가두고 물을 수확하는 분자 구조물 ‘금속-유기 골격체(MOF)’를 개발한 기타가와 스스무, 리처드 롭슨, 오마르 M. 야기에게 수여됐다.세계는 새로운 지적 영웅들의 탄생에 잠시 환호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한국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언론은 옆 나라 일본의 수상자 숫자를 헤아리며 자조 섞인 기사를 쏟아내고, 정치권은 ‘과학 강국’을 부르짖으며 공허한 약속을 남발한다. 온 국민은 마치 오래된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학생...

    1651호2025.10.24 15:08

  • [김우재의 플라이룸](66) 과학의 정치적 종말
    (66) 과학의 정치적 종말

    전 세계 생의학 연구를 선도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2025년부터 국제 공동 연구의 생명줄을 끊는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은 미국 연구 과제에 해외 기관이 하위 과제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우려 국가’ 연구자들의 핵심 데이터베이스 접근을 차단하며, 수년간 진행된 국제 프로젝트의 중단 가능성까지 예고하고 있다. 이 건조한 행정 언어 뒤에는 세계 과학계를 이끄는 초강대국 미국이 스스로 연구 생태계 주변에 장벽을 쌓고 있다는 섬뜩한 현실이 숨어 있다.평화로운 시대의 종말론존 호건은 저서 <과학의 종말>(1996)에서 위대하고 혁명적인 과학 발견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다윈의 자연선택, DNA 이중나선 구조와 같은 현대 과학의 근본적인 기둥들이 현실에 대한 본질적으로 참된 지도를 형성했으며, 이 지도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다만 문제는 미래의 과학 활동이 지도를 새로 그리는 것이 아니...

    1647호2025.09.19 14:16

  • [김우재의 플라이룸](65) 미국 초파리 기지의 비극
    (65) 미국 초파리 기지의 비극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광기가 학문의 전당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 야만적 칼날이 마침내 현대 유전학의 심장부, 하버드대학의 플라이베이스(Flybase)를 겨눴다. 전 세계 초파리 유전학자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이 위대한 지식의 보고가, 자금난이라는 석연찮은 이유로 해고의 칼바람을 맞았다. 지식의 등대가 꺼져가고 있다. 연구자들의 항해를 돕던 큐레이터들이 해고되면서, 인류가 쌓아 올린 유전학의 위대한 서고는 이제 표류할 위기에 처했다. 과학은 축적의 역사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선 그 역사를 지우려는 퇴행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학 옥죄기 속에 초파리 유전학의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 플라이베이스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하버드 팀의 해고는 단순한 실직이 아니라 기초과학과 질병 연구의 초석을 허무는 지적 파괴 행위에 가깝다. 20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초파리 유전학의 최전선 기지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종언을 고하려 한다.초파리 유전학의 탄생과 ...

    1643호2025.08.22 14:31

  • [김우재의 플라이룸](64) 성과 집착이 만든 학술지 출판 인플레
    (64) 성과 집착이 만든 학술지 출판 인플레

    생물학자라면 CNS가 뭘 뜻하는지 잘 안다. CELL-Nature-Science, 영향력지수가 가장 높은 세 학술지의 약자다. 저 학술지 중 한 곳에라도 논문을 실을 수 있으면, 그날로 과학자는 장원급제라도 한 듯 학계에서 추앙받게 된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생물학자들은 자연스레 CNS의 노예가 된다.논문 중심주의가 초래한 한국 과학의 참담한 결말막 대학원생이 됐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포스텍 생명과학과는 남홍길, 오병하, 신희섭 교수 등이 CNS에 논문을 출판하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대학 소속의 교신저자만으로 이루어진 CELL 논문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배석철 충북의대 교수가 바로 그런 논문을 출판해 당시 한국 생물학계가 시끌벅적한 적이 있다. 자기 분야 외에는 주변 분야에 별 관심도 없던 생물학 대학원생과 교수들도, 배석철이라는 이름은 모두 알게 됐다. 일반인에겐 하루 이틀 화제가 될 그 뉴스가, 과학...

    1639호2025.07.25 14:11

  • [김우재의 플라이룸](63) 질병 너머 생물학의 다양성을 위한 소고
    (63) 질병 너머 생물학의 다양성을 위한 소고

    생물학자들에겐 기분 나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생물학자 대부분은 자유롭게 연구주제를 고르지 못한다. 물론 연구비와 논문 따위 상관없이 ‘안드로메다 행성에 존재할지도 모를 원숭이를 닮은 생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연구비 지원은커녕 출판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좀더 현실적으로, 초파리 날개 무늬의 진화 역사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연구를 상상해보자. 다윈 이후 이어진 생명의 장대한 진화사를 밝히는 이 주제에 현대 생물학계가 부여하는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까?한국 과학계, 유행의 노예가 되다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연구는 결코 큰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할 것이고, 혹시 그 연구가 ‘네이처’, ‘사이언스’처럼 명망 있는 학술지에 실릴지라도, 곧 잊히고 말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선 이런 연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마 한국에선 거의 확실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아예 이런 연구가 시작조차 될 수 없을 것...

    1635호2025.06.27 14:13

  • [김우재의 플라이룸](62) 초파리의 재발견…곤충 유전학의 잠들었던 거인을 깨우다
    (62) 초파리의 재발견…곤충 유전학의 잠들었던 거인을 깨우다

    유리병 속에서 쉼 없이 날갯짓하는 초파리, 라틴어 학명으로 Drosophila melanogaster, 이슬을 사랑하는 노란 곤충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생명체는 단순한 실험 대상이 아니라 현대 유전학의 탄생을 증언한 살아 있는 역사이자 수많은 노벨상 연구의 산실이다. 20세기 초, 토머스 헌트 모건이 뉴욕의 ‘플라이룸’에서 초파리와 함께 시작한 여정은 인류 생명과학의 지도를 완전히 다시 그렸다. 유전자가 염색체에 실려 있다는 사실, 성염색체 연관 유전, 돌연변이 메커니즘 등 혁명적 발견은 모두 초파리의 눈 색깔과 날개 모양 등을 통해 밝혀졌다.인간중심주의의 당위와 모순 속에서우리는 인간의 인지 구조에서 비롯되는 체계적 오류, 즉 인지적 편향 및 휴리스틱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우주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거창한 꿈을 내세우는 과학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특히 현대 과학연구의 대부분은 어떻게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1631호2025.05.30 14:15

  • [김우재의 플라이룸](61) 그림자 교향곡, 교세포와 보통 과학자
    (61) 그림자 교향곡, 교세포와 보통 과학자

    교세포(膠細胞·glia)는 한때 뇌의 단순한 ‘접착제’로 여겨졌다. 19세기 신경과학자들에게 교세포란 신경세포들을 접착시키는 수동적인 연결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세포는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고, 뇌의 면역을 담당하며, 심지어 기억과 학습에까지 관여하는 뇌의 중심으로 재탄생했다. 이는 과학사를 넘어 우리 사회가 내포한 역설적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진정한 변화의 요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접착제’에서 시작된 오해뇌과학의 역사는 신경세포 연구에 주로 집중돼 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뇌를 신경세포 중심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신경세포는 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종류의 조직이며, 실제로 다양한 외부환경의 정보를 취합하고 계산을 통해 해당 생명체가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동물의 뇌에는 신경세포와 동일하거나 더 많은 수의 교세포가 존재한...

    1627호2025.05.02 14:57

  • [김우재의 플라이룸](60) 엘리트 카르텔과 한국 과학의 미래
    (60) 엘리트 카르텔과 한국 과학의 미래

    과학의 본질은 자유로운 탐구와 실패를 통한 혁신이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주의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엘리트 카르텔―학벌과 고시 합격자로 구성된 폐쇄적 네트워크―은 연구 자율성을 억압하고, 권력 유지를 위한 규제와 형식주의를 고수한다. 이들의 영향력은 정부 부처부터 대학 연구실까지 침투해 있으며, 과학계의 역동성을 말살하고 있다.윤석열 탄핵 사태는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구조적이며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최상목과 한덕수 등 엘리트 관료들은 국정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고통을 외면했고 특정 정치집단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최고의 엘리트 관료라 불리는 이들은 국가적 위기보다 집단의 기득권 유지에 집중해왔다. 한국 엘리트 카르텔의 표본이 된 서울대 출신 공직자들이 주도하는 ‘모피아’ 집단은 재정 지원을 특정 분야에 편중시키고, 학연·지연을 통해 신진 연구자들을 배제하는 ...

    1624호2025.04.11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