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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플라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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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재의 플라이룸](77) 달을 향한 불꽃놀이
    (77) 달을 향한 불꽃놀이

    초파리를 다루는 유전학자에게 실험실은 하나의 우주다. 성공한 실험은 아름답고, 실패한 실험은 더 아름답다. 실패 속에 다음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의 연구 현장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땅의 과학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정부가 ‘K-문샷’을 선언했다. AI 3대 강국 도약, 12대 국가 난제 해결, 신약 개발 주기 10분의 1 단축. 구호는 장엄하다. 그런데 나는 이 장엄한 구호가 불안하다.DARPA 혁신 모델의 정수: 엘리트 유목민과 권한의 디테일혁신은 슬로건에서 오지 않는다. 혁신은 구조에서 온다.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60년 넘게 인터넷, GPS, 스텔스 기술, 음성인식을 잇달아 만들어낸 것은 예산이 많아서도, 구호가 거창해서도 아니었다. DARPA의 핵심은 놀랍도록 단순한 원칙 하나에 있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전권을 주고, 관료의 통제로부터 완전...

    1678호2026.05.08 14:36

  • [김우재의 플라이룸](76) 의학 논문은 왜 이렇게 많이 철회될까
    (76) 의학 논문은 왜 이렇게 많이 철회될까

    나는 초파리를 연구한다. 정확히는 초파리의 신경계와 행동의 유전적 기반을 탐구하는 기초과학자다. 임상 현장과는 거리가 멀고, 캐나다 의대에서도 근무해봤으며, 퇴행성신경질환 논문도 출판해봤지만, 여전히 내 정체성은 기초과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학 논문 생태계의 이상 징후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언젠가부터 의학이 현대 생명과학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의학연구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어떤 문제는 그 영역의 외부에 있을 때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논문 공장의 산업적 범죄로 사상 최대 철회 2023년 한 해에만 전 세계에서 1만건이 넘는 논문이 철회됐다. 과학계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철회 논문의 절반 이상이 의학 및 생명과학 분야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의학은 전체 과학 가운데 가장 많은 논문을 쏟아내는 동시에 가장 많이 철회당하는 분야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온라...

    1676호2026.04.24 15:05

  • [김우재의 플라이룸](75) 돈으로 쓴 논문들의 무덤
    (75) 돈으로 쓴 논문들의 무덤

    과학에도 거품이 있다. 주식시장처럼 과학의 거품 역시 처음엔 혁명처럼 보이다가 나중엔 낭비의 흔적만 남긴다. 2000년대 초 DNA 마이크로어레이(microarray·DNA 칩)가 그랬고, 지금은 단세포 RNA 시퀀싱(sequencing)이 그러하며, 인공지능(AI) 분야에서는 대형언어모델(LLM)이 그러하다. 이 세 가지 거품의 공통점이 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갔고, 화려한 데이터가 쏟아졌음에도 정작 우리가 알고 싶었던 인과관계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측정하는 능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이해하는 능력은 제자리를 맴도는 기묘한 시대에 살고 있다.2000년대 초반, 미국 유전체 분석기업 아피메트릭스(Affymetrix) 칩 하나면 수만개 유전자의 발현량을 한 번에 측정할 수 있었다. 당시 연구자들의 흥분은 이해할 만했다. 암 조직, 뇌, 간 심지어 통제가 부실한 샘플에도 앞다퉈 칩을 돌렸다. 학술지에는 “유전자 발현 서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논문...

    1674호2026.04.10 14:42

  • [김우재의 플라이룸] (74) 뇌와 면역계의 은밀한 대화
    (74) 뇌와 면역계의 은밀한 대화

    뇌는 오랫동안 면역계로부터 격리된 성역으로 여겨졌다. 혈뇌장벽이라는 물리적 방어선 뒤에 숨어 면역세포들의 침입을 원천봉쇄하는 요새. 그 개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뇌와 면역계는 서로 완전히 격리된 2개의 독립 왕국이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때로는 서로를 파괴하기도 하는 복잡한 짝패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무너질 때,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이 찾아온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뇌는 고독하지 않았다면역학 교과서를 처음 펼쳤을 때, 뇌가 ‘면역 특권 기관’이라는 표현을 배웠다. 마치 외교관처럼 면역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특별한 지위.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었다. 뇌 안에는 이미 소교세포와 성상세포라는 이름의 면역 감시자들이 상주하고 있고, 이들은 신경세포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뇌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문제는 이 감시자들이 만성적으로 활성화되면,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1672호2026.03.27 13:38

  • [김우재의 플라이룸](73) 과학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73) 과학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이 과학적 발견의 전 과정을 통째로 대체할 수 있다는 기술-자본주의적 환상이 학계와 산업계를 배회하고 있다.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설을 세우며, 심지어 논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에 생성형 AI와 자율형 AI 에이전트가 도입되면서 ‘과학자의 역할이 과연 모두 자동화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의 이면에는 과학을 단순히 데이터를 투입해 정답(논문이나 특허)을 산출하는 기계적인 알고리즘으로 취급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업적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과학을 효율적인 논문 생산 자동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 시선은, 과학이 지닌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숭고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간과한 지독한 기만이다.자동화의 신화와 과학이라는 본질천재적인 영웅 과학자의 신화를 걷어내고 나면, 과학의 진정한 얼굴은 매일 실험실에 출근해 실패한 데이터를 마주하고, 피페팅을 하며, 밤을 새워 코드를 디버깅하는 ‘보통 과학자’들의 고단한 육체적·...

    1670호2026.03.13 14:53

  • [김우재의 플라이룸](72) 아프리카 모기와 고독한 유전학자들
    (72) 아프리카 모기와 고독한 유전학자들

    우리는 종종 첨단 과학기술이 인류 모두의 고통을 평등하게 덜어줄 것이라 낭만적으로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의 과학은 자본과 권력의 지형도를 잔인하리만치 정확하게 반영한다.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는 여전히 5세 미만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이다. 매년 60만명 이상이 사망하지만, 이 질병은 ‘글로벌 북반구’라 불리는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에 종식된 과거의 질병으로 치부된다. 제약사와 주류 과학계의 투자 우선순위에서 철저히 소외돼온 것이다. 최근 ‘네이처’에는 이 끔찍한 무관심과 생물학적 한계라는 이중의 장벽을 맨몸으로 뚫고 나온 위대한 논문 1편이 실렸다. 영국의 유전학자들과 탄자니아의 현지 과학자들이 20년이 넘는 고독한 사투 끝에, 말라리아를 근원적으로 차단할 ‘유전자 드라이브(Gene Drive)’ 모기를 아프리카 현지에서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잊힌 질병과 싸우는 고독한 유전학자들, 그리고 아프리카...

    1668호2026.02.27 13:08

  • [김우재의 플라이룸](71) 거미의 엉덩이와 개미의 냄새
    (71) 거미의 엉덩이와 개미의 냄새

    대한민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경제 규모로나 문화적 파급력으로나 우리는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은 단순히 국내총생산(GDP) 수치나 K컬처의 유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선진국이란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고, 당장의 국익과 무관해 보이는 인류 공통의 지적 자산을 축적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선진국은 ‘소비하는 국가’가 아니라 ‘생산하는 국가’여야 하며, 그 생산의 최상단에는 바로 ‘기초과학’이 존재한다.미국: 유전체 문법의 해독과 인공지능의 결합기초과학의 최전선인 미국은 이제 실험실의 벤치를 넘어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생명의 코드를 다시 쓰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가 최근 발표한 ‘알파게놈’은 기초과학이 기술과 결합해 어떻게 생명 현상의 근본적인 이해를 확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압도적인 사례다.알파게놈은 1메가베이스에 ...

    1666호2026.02.06 14:30

  • [김우재의 플라이룸](70) 과학에 만능열쇠는 없다
    (70) 과학에 만능열쇠는 없다

    과학은 논문으로 기록되지만, 사람으로 전승된다. 우리는 이것을 ‘학풍(School)’ 혹은 ‘계보(Lineage)’라고 부른다. 관료들은 과학을 거대한 자판기처럼 생각해서 예산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노벨상이나 혁신 기술이라는 캔음료가 툭 하고 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 과학의 현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비효율적인 도제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진보가 무정부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미셀 모랑주의 언급은 인공지능(AI)으로 과학연구를 가속화하겠다는 작금의 시대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혁신은 계획된 로드맵이 아니라 엉뚱한 호기심이 빚어낸 우연한 조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파리방의 유령들과학의 역사는 때로 한 장의 족보처럼 읽힌다. 현대 신경생물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리콴 루오(Liqun Luo)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그 족보의 가장 빛나는 가지 중 하나다. 그의 학문적 뿌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넝 잔(Yuh-Nung Jan)과 릴리...

    1664호2026.01.23 14:59

  • [김우재의 플라이룸](69) 유행의 과학과 인과관계의 실종
    (69) 유행의 과학과 인과관계의 실종

    화려해 보이는 최첨단 현대 생물학의 성공은 이제는 잊힌 낡은 실험실의 퀴퀴한 냄새와 그 안에서 솟아난 엄밀한 논리의 승리 덕분이다. 모건이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좁고 지저분한 플라이룸에서 초파리와 씨름하며 유전의 염색체 지도를 그려냈을 때, 그를 지탱한 것은 거대한 연구비나 화려한 기기가 아니라 관찰된 현상 이면의 인과관계를 끝까지 파고드는 유전학적 집요함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은 이 ‘플라이룸’의 정신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거대 자본이 투여된 ‘빅 사이언스’의 시대는 데이터의 양으로 질적 엄밀함을 대체하려 하며, 인용지수라는 숫자의 놀음 속에 ‘유행하는 과학’이 학술지의 지면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최근 신경과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 ‘뉴런’에 발표된 비판적 논평은 지난 10여 년간 생물학계를 휩쓸었던 ‘장내 미생물-자폐증 연결고리’라는 거대한 유행이 얼마나 허술한 인과관계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서늘하게 폭로한다.장내 미생물 연구의 정치경제학: 자...

    1660호2025.12.26 15:28

  • [김우재의 플라이룸] (68) 수컷의 변신은 생존 전략이다
    (68) 수컷의 변신은 생존 전략이다

    교미를 마친 암컷 초파리가 보여주는 변화는 극적이다. 알을 낳기 시작하고, 더 이상 다른 수컷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식성까지 변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수컷이 넘겨준 정액 단백질에 의해 조종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유전학의 쾌거였다. 그에 비해 수컷은 그저 유전자를 배달하고 사라지는 소모품이자, 수컷 초파리의 교미 후 변화는 기껏해야 잠시 지쳐 쉬는 ‘불응기’ 정도로 치부돼왔다.하지만 최근 여러 연구는 겨우 두 달 남짓 살아가는 초파리 수컷조차 교미 후 복잡한 생리학적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컷에게 교미는 끝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변신의 시작이다. 교미라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수컷의 뇌와 몸은 생존과 다음 번식을 위해 완전히 재설계된다.틴베르헌의 위계와 행동의 재편동물행동학의 거두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동물의 행동이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고 보았다. 배고픔, 성욕, 두려움 같은 본능이 서로 경쟁하며, 상황에 따라 하나의 행동이 선택되면 나머지는 억제된다...

    1656호2025.11.28 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