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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다리] 장보기와 어떤 죽음
    장보기와 어떤 죽음

    엄마는 퇴근이 늦어도 빈손으로 집에 오지 않았다. “뭐 좀 사갈까?” 하는 문자에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료나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를 요청했다. 현관 밖 복도에서부터 바스락거리는 마트 비닐봉지 소리에 엄마의 도착을 미리 알았다. 내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땐 이런 연락이 왔다. “장 봐놨어.” 그런 날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랐다. 거실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찼고, 엄마는 마트에서 사온 식자재로 만든 국과 반찬을 내어줬다.그래서일까. ‘장을 본다’라는 말엔 자연스럽게 식구가 떠올랐다. 혼자서는 배달음식으로 때울 끼니를, 누군가 집에 초대한 날이면 장을 봐 해결했다. 한때는 엄마의 장보기를 ‘노동’으로 여기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속내를 털어놓자 엄마는 “그런 시간이 나를 살게 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나 역시 아는 나이가 됐다.마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 22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마트에서 60대 여성이 목숨을 잃...

    1627호2025.05.02 15:00

  • [꼬다리] 엄마들의 노동사
    엄마들의 노동사

    지난 4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홈플러스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를 취재했다. 사모펀드 MBK가 홈플러스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직영 노동자, 협력업체 노동자, 입점업체 점주, 배송 노동자 등 홈플러스 종사자들이 불안해진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였다.그날 내게 인상 깊었던 건 의원회관 세미나실을 가득 메운 50대 여성들이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모인 이들은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하하 호호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중장년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걸 본 게 언제였을까 싶다가도 이들이 계산, 진열 업무 등을 하며 마트 운영을 떠받치고도 하루아침에 자본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그들을 보니 엄마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식 다 키우고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 엄마’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홈플러스 여성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엄마처럼 경력단절 후 진...

    1626호2025.04.25 14:37

  • [꼬다리] ‘MZ워싱’, 그 음험한 속내
    ‘MZ워싱’, 그 음험한 속내

    2년 전 이 지면에 ‘여기도 MZ 저기도 MZ’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노동 분야를 담당하던 때였다. 당시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이나 ‘노조 탄압’ 같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MZ세대를 명분으로 내세우곤 했다. 청년들이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기를 좋아하니 노동시간을 유연화해야 하고, 노조를 싫어하니 노조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주장도 황당했지만 가장 동의하기 어려웠던 건 그들이 ‘청년’을 불러내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항상 정부에 쓴소리를 내지 않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도 행복한 청년만을 선별해 무대에 세웠다. 깔끔한 오피스룩을 입은 수도권 대기업 사무직 젊은이들, 또는 이른바 ‘인서울’ 대학생들만 ‘MZ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과로와 갑질에 시달리고, 누구보다 노조가 간절했을 대다수 청년은 MZ라 불리지 못했다. 불평등의 흔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이들만을 카메라 앞에 세움으로써 세상의 그을음을 말끔히 표백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윤...

    1625호2025.04.18 14:26

  • [꼬다리] TV 같이 보실래요?
    TV 같이 보실래요?

    4월 4일 금요일은 아주 바쁜 날이었다. 그다음 주 월요일 이사를 앞두고 맞은 마지막 평일이었다. 인터넷 장비나 정수기를 해체하는 등 집안 곳곳 물건의 이동을 준비하는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다 초인종을 누르는 노동자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인사하고, 다시 일하고, 서명하고, 배웅하기를 반복했다.오전 9시 30분에 도착한 이의 역할은 매트리스 청소였다. 큰 체격의 남성이 그날 만난 이중 가장 많은 짐을 들고 등장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소매 차림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짧은 설명을 마친 뒤, 크고 화려한 청소기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청소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가 세제를 묻힌 솔로 매트리스 위 얼룩을 꼼꼼히 지우고 있을 때 오전 11시가 됐다. 헤드폰을 꼈다. “지금부터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음성이 흘러...

    1624호2025.04.11 14:30

  • [꼬다리] 어떤 죽음
    어떤 죽음

    성폭력 혐의로 고소돼 경찰 수사를 받고 있던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3월 31일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가 고민 끝에 9년 만에 형사고소를 한 이후였다. 장 전 의원의 죽음을 두고 여권에선 “그는 이미 죽음으로 그 업보를 감당했기에 누군가는 정치인 장제원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를 해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하태경 전 국민의힘 의원)거나,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윤석열 대통령)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피의자의 죽음이 권력형 성폭력의 면죄부가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발언들로 해석된다. 정치권의 ‘애도사’에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데자뷔로 보인다. 사망한 박 전 시장을 조문한 이해찬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고인에 대한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당 차원에서 대응할 계획이 있느냐”고 질문한 기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하는 것인가. XX자식”이라고 말...

    1623호2025.04.04 15:30

  • [꼬다리] 난세의 파티플래너들
    난세의 파티플래너들

    최근 몇 주간 “탄핵 선고 언제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헌법재판소가 오늘 선고 날짜를 발표할 것’이라는 지라시에 속은 것도 여러 번. 마치 끝나지 않는 타임 루프에 걸린 것처럼 ‘이번 주 금요일 선고 유력’이라는 기사를 3주째 보고 있다.심규협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 사무국장을 인터뷰하기로 한 것도 탄핵 선고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마음 때문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어차피 끄떡도 하지 않는데 집회에 나가는 것도, 집회를 취재하는 것도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무력감도 느꼈다.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대규모 집회를 여는 사람의 정신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비상행동은 12·3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를 열고 있는 단체다. 비상행동 사무국장의 역할이 뭔지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었는데,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내는 것도 집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와 음향 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모두 사무국장의 일이었다. 바빠서 인터뷰할 수...

    1622호2025.03.28 14:00

  • [꼬다리]수선하는 마음
    수선하는 마음

    이 글은 뉴스 ‘A/S’다.얼마 전 일본 최고재판소의 한 판결을 조명하는 기사를 썼다. 소설로 치면 주인공은 3월 21일 퇴직을 앞둔 구사노 고이치 재판관, 사건은 그가 최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판결에 대해 작성한 ‘보충의견’이다. 보충의견이란 재판부 결정 내용과 이유에 동의하면서도 결이 다른 주장 등을 덧붙여 둔 것이다. 지난 3월 5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2011년 사고 당시 원전을 운영한 도쿄전력 옛 경영진들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구사노 재판관은 ‘유죄로 볼 수도 있었다’는 의견을 더했다.처음엔 스스로 나름 잘 쓴 기사라고 생각했다. 문장이나 구성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일단 국내 다른 언론사가 안 다뤘기 때문이다. 타사의 주된 헤드라인은 ‘무죄···14년 만’이었다. 현지 언론을 봐도 보충의견 얘기는 부수적으로 짧게 담겼다. 특파원이 아니고선 현지 정부 및 기관 발표와 외신 보도에 기대는 국제부 업무 특성상 한국과 연관성마저 없다면 기사화할 유인이 없기는 ...

    1621호2025.03.21 15:00

  • [꼬다리] 고작 돌멩이
    고작 돌멩이

    지난해 가을 직장 동료 집들이 선물을 사러 들린 소품숍에서 반려돌을 구입했다. 공들여 만든 여러 물건 사이에서 하필 돌이라니. 영혼 없는 돌에 눈 하나 대충 그려 넣었을 뿐인데 마치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 같아 눈에 밟혔다. 개당 1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도 결국 돌멩이 하나를 ‘입양’했다. 크리스마스엔 산타 모자도 씌우고, 요리조리 거처를 옮기며 6개월째 함께 살고 있다. 이름은 ‘돌(石)아이’로, 현재는 내가 조립한 에펠탑 블록에 거주 중이다.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3월 한국의 반려돌 유행을 소개하며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펫록(Pet Rock)과 비교했다. 광고회사 마케팅으로 미국에서 짧게 유행하고 사라진 펫록 열풍이 돌연 한국에서 유행한 이유로는 ‘과로’가 꼽혔다. 펫록은 선물 받는 사람을 놀리려는 장난의 일종이었다면, 한국의 반려돌은 고요함과 정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틀린 해석은 아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반려돌은 식...

    1620호2025.03.14 15:00

  • [꼬다리] 성평등과 대의
    성평등과 대의

    여성가족부가 2023년 1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정부·여권 반발로 철회한 뒤,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여가부 직원들을 감찰 조사했다는 경향신문 보도가 나왔다. 그 뒤 여가부 직원들로부터 상반된 반응을 들었다.대변인실과 고위 관료들은 방어하기 바빴다. 감찰 이후 김종미 전 여성정책국장과 담당 과장이 서면 경고·주의 처분을 받은 건 “민감하고 중요한 사항을 상세하게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장관이 공석인 지난 1년 동안 저출생 등 가족 정책엔 힘을 싣고 성평등 정책은 사후약방문식으로 대응했단 보도엔 억울해했다. “오히려 이 보도로 직원들 사기가 떨어진다”라고 했다.사기 저하를 운운한 이들과 달리 여가부 직원들은 2년 뒤에야 드러난 감찰 사실에 어처구니없어했다. ‘무슨 이런 거로 감찰을 하느냐’, ‘장·차관이 보고를 못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등 반응이 나왔다. 내부 직원을 보호하기보다 꼬리 자르기에 바빴던 당시 장·차관...

    1619호2025.03.07 14:30

  • [꼬다리] “저는 계몽됐습니다(I’m Gyemonged)”
    “저는 계몽됐습니다(I’m Gyemonged)”

    아무래도 김계리 변호사는 내란 피의자 윤석열의 ‘X맨’이 분명했던 것 같다. 느닷없이 헌법재판관과 기싸움을 벌여 윤석열이 오히려 말리는가 하면, 지난 2월 25일 최종변론에서는 “저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강렬한 발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했다. 가히 이날 최고의 펀치라인이 아니었을까.최대 피해자는 윤석열이다. 그는 최종변론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구치소에서 무려 77장의 원고를 썼고, 67분간 일장 연설을 하는 등 엄청 노력했다. 하지만 이른바 ‘어그로’에서는 김 변호사가 몇 수 앞섰다. 노래는 열심히 불렀는데 킬링파트는 남 줘버린 꼴이다. 정치권의 튀는 워딩을 사석에서 ‘밈’처럼 활용하는 이 업계에서도 김 변호사의 ‘I’m Gyemonged’는 오래 회자할 듯하다.발언 자체도 강렬했지만 가장 큰 파괴력은 어긋난 ‘TPO’에 있었다. 계몽 선언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변호사의 변론이라기보다는, 열기 넘치는 대형교회 예배에서 들을 법한 간증의 언어였다. 떨리...

    1618호2025.02.28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