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주간경향

연재

정태겸의 풍경
  • 전체 기사 100
  • [정태겸의 풍경] (100) 경기 파주 보광사-따사로우면서도 알싸한, 산사의 겨울 시선
    (100) 경기 파주 보광사-따사로우면서도 알싸한, 산사의 겨울 시선

    계절은 하루아침에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눈 뜨니 겨울이 돼버렸다. 가을은 이대로 사그라지는 듯하더니 그래도 반짝 제빛을 뽐내고 빠르게 스러져버린다. 오래 아껴두고 있던 절을 찾아 올랐다. 이때쯤 가겠노라 꼭꼭 감춰뒀던 곳이다. 이곳에 가면 겨울이 주는 감정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기도 파주의 보광사. 가깝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다.예상 그대로였다. 낙엽은 비처럼 산등성이에서 쏟아지고, 쨍하게 차가운 공기는 태양의 광선을 눈부시게 산란시키던 오전의 산사 풍경이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 어명으로 도선이 지었다는 이 절은 볼 게 많다. 범종이며 목어, 운판이 모두 문화재다. 시간이 손수 쓸어넘긴 곳마다 그 흔적이 가득하다. 마침 스님의 사시예불 소리가 경내에 가득하다. 이 계절에는 강렬한 겨울 시선이 짙은 그림자를 곳곳에 드리운다. 그래서 더 강렬하게 눈에 다가와 담긴다. 어실각 옆 영조가 어머니를 그리...

    1655호2025.11.26 06:00

  • [정태겸의 풍경] (99) 경기 평택 원평나루-가을은 억새를 흔들며 온다
    (99) 경기 평택 원평나루-가을은 억새를 흔들며 온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일어났다. 억새가 흔들리며 바람의 결이 드러났다. 멀뚱하게 키가 큰 이 풀은 멀리서 보면 하얗게, 가까이에서는 은빛으로 머리를 흔든다. 지금 경기 평택 원평동 군문교 바로 아래는 온통 억새로 가득 차 있다. 원평나루라고 부르는 이곳은 평택의 가을 명소.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입소문을 타고 인근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곁으로 안성천이 흘러 억새가 자라기에 참 좋은 조건을 갖췄다. 하마터면 우리는 이 억새밭을 잃어버릴 뻔했다. 평택시가 노을유원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군문교 주변 30만㎡에 캠프장, 야구장 등을 조성하려 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수달의 배설물이 발견되며 사업은 백지화됐다.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일일지 모르겠으나, 이토록 멋진 자연을 곁에 두고 가을마다 억새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매력적인 일이다.햇살 좋은 가을의 복판, 사람들은 이곳을 거닌다. 나도 그 가운데로 들어가 가을을 느낀다. 돌아 나오는 길, 멀리 ...

    1653호2025.11.12 06:00

  • [정태겸의 풍경] (98) 경기 시흥 관곡지-하늘도, 연밭도, 사람도 다정하다
    (98) 경기 시흥 관곡지-하늘도, 연밭도, 사람도 다정하다

    도로를 달리다가 눈에 띄는 이정표를 찾아 들어갔다.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 이때쯤이면 생각나는 곳 중 하나인지라 오늘은 어쩐지 이곳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기록에는 관곡지가 조선 세조 때 연못이라고 나온다. 사헌부 감찰이던 권만형의 집안에서 소유한 사유지였다고. 여기에 권만형의 장인인 강희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연(蓮)의 씨앗을 심었다고 한다. 그는 문신이자 농학자였고, 가져온 씨앗은 관곡지에서 시작해 널리 퍼져나갔다. 그래서 시흥에서는 이 마을을 연꽃의 마을이라며 ‘연성’이라 불렀다.가을마다 이곳이 생각난 건 몇 년 전 보았던 풍경 때문이었다. 한여름 우아한 자태를 뽐냈을 연꽃은 지고 이파리며 줄기는 이미 시들었지만, 촘촘히 모여앉은 가을의 연밭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볕 좋은 날 관곡지를 찾은 사람들은 고샅길을 따라 걷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며 가을을 즐기는 풍광. 이때쯤이면 어디든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이겠지만, 이곳은 아직 남...

    1651호2025.10.29 06:00

  • [정태겸의 풍경](97) 강원 철원-꽃밭 위로 쏟아진 저무는 햇살에 잠겨
    (97) 강원 철원-꽃밭 위로 쏟아진 저무는 햇살에 잠겨

    경기 포천시에서 촬영 하나를 마치고 고민을 시작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가까운 강원 철원 고석정에서 가을 꽃축제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났다. 게으름이 짜르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마음은 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몸은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고 보채는 상황. 에라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운전대를 철원 방향으로 틀었다.한편으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주차를 하고 걸어서 꽃밭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기대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내가 바라던 풍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마치 햇살이 고운 파우더를 공기 중에 뿌려놓은 듯 대지 위로 쏟아졌다. 종일 화사한 빛을 뽐내던 꽃들도 그 빛에 물들어갔다. 꽃 사이를 걸었다. 꽃만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절정의 순간이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에게는 꽃 사이의 사람까지 모두 다 꽃과 어우러지는 풍...

    1649호2025.10.08 06:00

  • [정태겸의 풍경](96) 전남 강진-장인의 손으로 빚은 선 고운 옹기
    (96) 전남 강진-장인의 손으로 빚은 선 고운 옹기

    몇 번이나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전남 강진은 숨어 있는 보석 같다. 먹을 것, 볼 것, 할 것이 생각보다 많음에도 가치에 비해 덜 알려진 여행지다. 원래 이곳은 청자로 유명세를 날리던 땅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진의 청자만 쳐다보다 이곳의 옹기가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건 놓치고 있었다. 칠량 바닷가 옹기장인 정윤석씨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강진의 옹기를 알게 됐으니.칠량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옹기를 만들었다. 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을 뒷산의 흙이 옹기를 빚기에는 제격이다. 자연스레 그 역사가 길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졌다.장인에게 옹기 빚는 과정을 들었다. 듣기만 하면 뭐하냐면서 물레 앞에 앉는다. 곱게 내린 흙을 치대어 만든 반죽이 물레 위에 오르고, 때리고 돌려 다듬으며 옹기 하나를 빚기 시작한다. 하나의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힘이 있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장인은 말 한마디 없이 옹기를 빚는 동안 물레...

    1647호2025.09.24 06:00

  • [정태겸의 풍경] (95) 충남 부여-백제의 마지막 지켜본 소나무산
    (95) 충남 부여-백제의 마지막 지켜본 소나무산

    충남 부여는 경주 못지않은 역사 도시다. 경주가 신라의 고도라면 백제의 마지막 수도는 부여였다. 경주에 비하면 부여에 관한 관심은 덜한 편이다. 더구나 한여름이어서일까. 인적이 드물었다. 부여의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백마강, 그리고 그 곁에 솟아오른 언덕. 우리에게는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마지막으로 기억되는 낙화암이 있는 곳. 그곳이 부소산성이다. ‘부소’는 백제의 고어로 소나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부소산은 곧 소나무산이다. 106m의 키 작은 이 산은 백제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저 나무가 그때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겠지만, 자꾸만 눈길이 간다. 그만큼 산길을 오르는 내내 소나무가 길가를 지키고 섰다.성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538년. 처음 토성을 쌓고 123년이 지난 후 백제는 마지막 빛을 잃었다. 낙화암까지 오르고 나니 백마강이 널리 휘돌아가는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자리에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고? 믿기지 않는다. 낙화암 아...

    1645호2025.09.10 06:00

  • [정태겸의 풍경](93) 전남 광양 이순신대교-제철소 너머의 아름다운 여름 풍광
    (93) 전남 광양 이순신대교-제철소 너머의 아름다운 여름 풍광

    전남 광양은 그 유명한 불고기를 먹으러 다녀왔을 때를 제외하면 온전히 여행해본 적이 없다. 요즘에는 좀처럼 기회가 없던 도시나 지역에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이번에 제대로 광양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광양은 제철소의 도시이고, 해양공업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다. 여행지라는 인식은 많지 않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생각할 것이다.처음에는 여름의 꽃 해바라기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태양과 여름 내내 이어진 폭염을 미처 생각 못 했다. 해바라기는 이미 시든 뒤였다. 헛헛한 마음을 풀러 광양에서 제법 경치가 좋다는 카페를 찾았다.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커피를 마시다 눈에 들어온 풍경에 그대로 뛰쳐나갔다. 꽃밭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맞은편의 다리. 이런 경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순신대교 바로 옆에는 광양제철소가 있고, 푸른 바다는 그 곁을 유유히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갔다.이제는 다르다. 광양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라 해도 ...

    1641호2025.08.13 06:00

  • [정태겸의 풍경](92) 전남 여수 거문도- 남 거문도, 북 녹산…풍경이 된 등대
    (92) 전남 여수 거문도- 남 거문도, 북 녹산…풍경이 된 등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마치 섬에 들어오는 여행자를 두 팔 벌려 반기는 듯한 풍광. 두 시간 남짓 물 위를 달려 배는 거문도의 품에 안겼다.거문도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깊게 각인된 건 등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거문도에는 꼭 찾아봐야 할 등대가 남쪽과 북쪽 두 군데 있다. 거문도 최남단에 자리한 거문도등대는 역사가 깊다. 120년 전인 1905년 4월에 만들어졌다. 국내 최초의 등대인 인천 팔미도등대가 1903년 6월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딱 2년 후다. 한반도의 바다를 밝히는 세 번째 등대였다. 거문도등대로 가는 길은 온통 동백터널이다. 햇빛조차 스며들지 못할 만큼 어둡지만, 여름엔 그래서 시원하다. 그 끝에서 만난 거문도등대는 아직도 10.4m라는 최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반대로 거문도 입구를 지키고 선 녹산등대는 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양쪽으로 풀이 가슴까지 자랐고, 그 너머로 바다가 넘실댄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

    1639호2025.07.30 06:00

  • [정태겸의 풍경](91) 강원 태백 철암탄광역사촌-1970년대에 멈춰 선 골목 풍경
    (91) 강원 태백 철암탄광역사촌-1970년대에 멈춰 선 골목 풍경

    강원도 태백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길도 멀고 험해서 오지 중 오지였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나오는 석탄은 수없이 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지금의 20~30대는 잘 모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태백의 철암지역은 석탄 산업의 중심지였다.서울의 명동이나 종로만큼 사람이 북적대던 태백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 건 액화가스가 보편화하면서부터였다. 사람은 사라지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랬던 철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번화가였던 건물이 통째로 전시장이 됐고, 백두대간협곡열차라고 부르는 관광열차가 철암까지 이어졌다. 철암의 변화는 입소문을 타고 여행객을 불러들이고 있다.페리카나, 호남슈퍼, 진주성, 봉화식당 그리고 한양다방. 옛 시절 이곳에서 장사하던 가게의 이름이 그대로 전시장의 이름이 됐다. 어떤 곳은 예술가의 전시공간이 됐지만, 어떤 곳은 예전 태백의 기록사진이 상설전시돼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건 탄광회사 사무실의 월급날 풍경이다. 남편들이...

    1637호2025.07.16 06:00

  • [정태겸의 풍경](90) 전남 여수 낭도-젖샘 막걸리가 그리워지는 여름밤
    (90) 전남 여수 낭도-젖샘 막걸리가 그리워지는 여름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남 여수의 낭도는 외떨어진 곳이었다. 한번 들어가려면 배를 타고 한참을 뱅 돌아야 간신히 닿았다. 그때만 해도 고요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포근함이 느껴지던 섬이었다. 다리가 놓여 육지에서 차로 들어가는 지금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아직 변하지 않은 하나가 이 섬에서 나오는 막걸리다.낭도는 장점이 많은데, 그중 제일은 물이다. ‘젖샘’이라는 샘물이 나온다. 젖샘은 바닷물과 섞이지 않아 철분이 많다는 게 이 섬 주민의 설명이다. 이 물을 마시면 젖이 잘 돌고, 그 젖을 먹으며 오랜 시간 사람이 살아왔다는 거다. 그 맛 좋다는 샘물로 막걸리를 만드는 술도가가 있다. 강창훈 사장은 낭도에서 얼굴이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인사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섬의 대소사를 챙긴다. 그래서 섬을 다녀간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다.이 섬을 찾았다면 그가 만든 막걸리를 마실 수밖에 없다. 여행이나 캠핑, 낭도에 와야만 마실 수 있기에 사람마다 두 손 가득히 막걸...

    1635호2025.07.02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