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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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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로 본 세상]내가 살던 용산
    내가 살던 용산

    옛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아우슈비츠에 쓰여 있다고 하니, 이 문장을 보면 어딘가 마음이 비장해진다. 역사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이 문장을 꼭 인용하곤 했다. 끔찍한 폭력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로.최근 보궐선거를 보면서 이 문장에 진지한 회의감이 들었다.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용산참사를 두고 “과도하고 부주의한 폭력 행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력 투입으로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참사는 10여년 전 그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어났던 일이다. 그는 재개발과 재건축 공약을 내밀고, 이 정책에 ‘스피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용산참사 철거민들이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 행보다. 그는 후에 용산참사에 대해 한 말을 사과했지만, 내건 정책을 물리지는 않았다. 용산참사는 수십년 전 일...

    1423호2021.04.09 11:39

  • [만화로 본 세상]트랜스젠더가 나오는 만화들(하)
    트랜스젠더가 나오는 만화들(하)

    지난주 서론 격의 칼럼에서 트랜스젠더가 최소한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만화를 10편 발견했다고 썼다. 그후 몇편 더 찾아 이제는 15편이 넘는 리스트를 갖추게 됐다.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등장함에도 리스트에 포함할 수 없는 작품도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2쪽만 불법적으로 게시된, 제목을 알 수 없는 만화가 그 예다. 남자 주인공이 성관계 도중 상대 여성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장면이 담겼다. “게이였던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보아 트랜스젠더라는 말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 무렵 작품일 것으로 생각된다. 2001년 하리수가 광고 모델로 데뷔하며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알려지게 됐지만, 그 전에도 그 후로도 트랜스젠더 재현은 특정 방향으로 고정돼 있었다.우선 트랜스 남성은 드러나지 않고 트랜스 여성만이 가시화됐다. 다분히 성애화된 재현 속에서 남자 주인공과 독자를 ‘속이는’ 극적 반전...

    1422호2021.04.05 15:28

  • [만화로 본 세상]트랜스젠더가 나오는 만화들(상)
    트랜스젠더가 나오는 만화들(상)

    김기홍 씨와 변희수 하사가 유명을 달리한 후, ‘만화평론가’로서 모종의 사명감을 갖게 됐다.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만화를 찾아 소개하고 싶었다. 이심전심인지, 박희정 선생이 <나단이라고 불러줘>(카트린 카스트로, 상어, 2020)로 훌륭한 글을 써주었다. 주변인들의 변화가 나단의 ‘그 자신다운 삶’을 가능하게 했음을 힘주어 말한 그 글에 더없이 공감했다. 죽음을 멈출 변화가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너무나 동의했다. 하지만 댓글은 참담했다. 트랜스젠더는 물론이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조차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마치 트랜스젠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듯이, 이 글은 그 말들에 대한 응답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만화 안에서 많지 않다.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만화 작품은 단 4편이다. <나단이라고 불러줘>를 비롯해 <내 이름...

    1421호2021.03.26 12:57

  • [만화로 본 세상]꽃에게 묻는다
    꽃에게 묻는다

    먼저 부끄러운 과거의 일 하나를 고백해야겠다. 몇해 전 번화가의 인파 속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고립된 것을 보았다. 다가가 도움을 드리겠다 했고, 그는 어떤 식당을 찾는다 했다. 마침 위치를 알고 있어 길을 안내했다. 문제는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지하였다. 그가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나를 나무랐고,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그를 오히려 고마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나중에 시각장애인을 도울 때 그들이 요구하는 것만 도와야 하고, 선의로 내미는 손이 오히려 무례하거나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은연중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고, 그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약자라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멍청하게도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을 낮춰 다가오길 기대했다. 그래서 나는 혼이 났던 그 상황에 불만이 생겼고, 한동안 나서서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

    1420호2021.03.19 14:04

  • [만화로 본 세상]나단이라고 불러줘
    나단이라고 불러줘

    201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나단이라고 불러줘>는 한 10대 트랜스젠더 남성의 성장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상어출판사에 의해 한국에도 번역돼 소개됐다. “프랑스어, 퀴어,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이 1인 출판사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설립됐다. 출판사를 만든 ‘상어’의 말에 따르면, 여러 출판사에 번역 출간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방식이다.<나단이라고 불러줘>는 성소수자 문제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로 다가갈 것이다. 익숙한 서사와 달라서다. 작가는 나단이 ‘왜 남자가 돼야 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결국 소수자를 주류사회의 승인을 구하는 자로 머물게 할 위험...

    1419호2021.03.12 16:01

  • [만화로 본 세상]유색의 멜랑꼴리
    유색의 멜랑꼴리

    얼마 전 책방을 기웃거리다 <색이름>이라는 책을 샀다. 책에는 지금까지 대강 눙치고 넘어갔던 색깔들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검은색과 회색으로만 인식했던 색깔들에는 저마다 옻칠색, 기와색, 목탄색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따오기색, 도라지꽃색, 분홍난꽃색…. 이런 색을 하나하나 짚을 땐, 우리 옆에 있었지만 내가 잊고 지냈던 존재들을 다시금 깨달았다. 색을 짚으며 이름을 배우고 나아가 존재를 깨닫는 이 과정에서 문득 한 만화가 떠올랐다. 얼마 전 연재가 끝난 웹툰 <유색의 멜랑꼴리>(비나리 작가, 다음웹툰)이다.웹툰 <유색의 멜랑꼴리>는 에피소드마다 제각기 다른 컬러칩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여져 있다.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에는 이 색깔들의 의미가 명쾌하게 설명된 적은 없다. <유색의 멜랑꼴리>의 주인공은 30대 여성 유도완으로, 작품은 도완의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결혼식은 어딘가 계획이 틀어진...

    1418호2021.03.05 13:53

  • [만화로 본 세상]예술로서 만화가 할 수 있는 일
    예술로서 만화가 할 수 있는 일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익숙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 작품으로 인해 대상-대상의 재현이 맺는 관계나 언어-이미지의 관계가 재고됐으며, 회화를 보는 감상자의 시선 또한 되물어졌다. 핵심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하나에 의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갱신됐다고.<혼자를 기르는 법>(다음웹툰)으로 데뷔했던 김정연 작가의 신작 <이세린 가이드>(코난북스)도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로서 만화가 할 수 있는 일’을 갱신했다. 그 일의 목록을 다 논하기에는 훨씬 더 긴 지면이 필요하므로, 하나만 짚어보자.<이세린 가이드>는 만화 장르를 해체하고 확장한다. 마그리트의 문장을 변주하자면, ‘이것은 요리만화가 아니&rsqu...

    1417호2021.02.26 14:18

  • [만화로 본 세상]성평등과 폭력에 대한 부족한 고민
    성평등과 폭력에 대한 부족한 고민

    얼마 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넷플릭스를 통해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제작 중인 <극주부도>의 원작만화를 보았다. <극주부도>는 일본의 조직폭력배들이 야쿠자라는 말 대신 자신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선호하는 ‘극도(極道)’에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주부(主夫)’를 넣어 꾸민 말이다. 우리식으로 옮기자면 ‘조폭주부’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어판은 원제를 그대로 옮겼다.이 만화는 현지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한일 양국에서 만들어진 <럭키>라는 영화도 떠오르고, 조폭이 자취생의 집에 숨어 요리실력을 뽐내는 내용의 일본 드라마 <협반 남자의 밥> 같은 여러 작품이 생각날 만큼 소재가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특유의 개그코드와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피식거리다 보면 금세 책장이 넘어가는 종류의 만화다. 하지만 이 만화가 딛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는 잠시 고...

    1416호2021.02.19 14:40

  • [만화로 본 세상]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
    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

    한때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게 낯설고 무서웠다. 2시간마다 깨서 젖 달라고 우는 아이를 돌보느라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초반엔 깼다가 다시 잠들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지 않았다. 깜빡 눈 붙이고 나서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2달도 넘게 이어졌다. 낮이고 밤이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각성 상태가 계속돼 그런지 깨어 있어도 살만은 했다. 머리가 무겁고 때론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이었지만 할 일은 다 하고 살았다. 다만 서늘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하루에 1~2시간만 자고 산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떨면서 인터넷을 뒤졌다. 어딘가의 상담페이지에 올린 누군가의 글을 보게 됐다. 나처럼 극심한 수면장애를 겪는 이의 이야기였다. 나처럼 1~2시간, 길어야 3시간 정도를 잔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

    1415호2021.02.05 14:52

  • [만화로 본 세상]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만화 <나, 여기 있어요>는 주인공 ‘현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강의가 끝나고 서둘러 장소를 옮겨 면담자를 만난 현지는, 면담자로부터 한 사건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님 혹시, 정한섭 사건은 아시나요? (…) 그 사건 피해자들은 업계를 다 떠났대요.” 그 말을 들은 현지는 조용히 웃는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나, 여기 있어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만화로, 한 유명 만화가로부터 성추행당한 일을 피해자가 직접 그렸다. 작중에서 ‘정한섭 성폭력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2014년에 있었던 일이지만, 작가는 그보다 더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비단 정한섭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현지는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가족 안의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친오빠의 잦은 구타, 작은 아빠의 성폭력까지. 부모의 만류로 대학에 진학하지...

    1414호2021.01.29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