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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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1967~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그을 수 있는,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겉으로 보기에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여도, 마음에선 순간순간 휘몰아치고 소용돌이치는 이가 있다 치자. 그에게도 이탈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라고 깨닫는 순간이 거듭되면서 그는 감행할 것이다. ‘찬란한 태양도’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지만 그는 벗어...

    1229호2017.05.29 21:26

  • 중력

    성윤석(1966~ )문제는 무게다.어떤 이에겐 구름도 무겁다.명자나무 꽃 위 부전나비는하늘을 들어 올린 채 날고 있다.혼잣말을 하며 가는 사람 뒤를 걸으며,나도 혼잣말을 한다.혼잣말이 나는 가장 무겁다.내가 나에게 말하고짓눌린 채한 번 대답도 못했지.말(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주고받는 말은 언제 무겁고 언제 가벼울까.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무게가 많이 다를 것도 같다. 말은 시시때때로 중력이 다르다. 시인은 ‘혼잣말이 나는 가장 무겁다’고 한다. 그 무게에 ‘짓눌린 채’ 한 번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혼잣말을 할 때는 분위기마저 가라앉아 더 무겁다.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28호2017.05.23 11:20

  • 밥 먹는 풍경

    안주철(1975~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유성처럼 흘러내릴 때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아무 말 없이 엄마가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이런 때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출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비장하다. 저벅저벅, 마치 모자란 잠과 결투라도 벌이듯 로봇 군단처럼 앞만 보고 간다. 어제가 방금 전 같은데, 또다시 새로운 하루라니. 일터에서는 마음의 상...

    1227호2017.05.16 09:48

  • 좋은 언어

    신동엽(1930~1969)외치지 마세요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조용히될수록 당신의 자리를아래로 낮추세요.[…]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날언어들을 고되게부려만 먹었군요.때는 와요.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허지만그때까진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채워야 해요사전투표를 했다. 출근하는 길에 투표장을 들른 사람들이 반갑고 정겨웠다. 투표장 층층대를 하나하나 내려오면서 대선후보들이 쏟아낸 말들이 생각났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말이나 따스한 말 대신 듣기에 거북하고 불편한 말들. 자신이 얼마나 함량미달인지 확인시켜 주는 말들. 마음이 따뜻하고 정의가 살아 숨 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해도 만사형통하는 나라를 꿈꿔 본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

    1226호2017.05.08 18:55

  • 대추 한 알

    장석주(1955∼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대추야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대추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아주 늦게 싹을 틔운다. 개나리꽃과 진달래꽃이 필 때도 겨울나무처럼 오롯이 서 있다. 그래서 지인은 우스갯소리로 ‘죽은 척하는’ 나무라고도 한다. 대추나무는 기다림 속에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대추로 여문다. 시인은 대추를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고 ‘혼자서 둥글어질 리 없다’고 한다. 대추 한 알에는 태풍, 천둥, 벼락, 번개, 무서리 내리는 밤, 땡볕 내리쬐는 두어 달, 초승달 몇 날, 그믐 몇 날이 들어서 있다. 또 마을 곳곳...

    1225호2017.05.02 19:28

  • 숨 쉬기도 미안한 4월

    함민복(1962~ )배가 더 기울까 봐 끝까지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옷장에 매달려서도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나 혼자를 버리고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2학년들아!그대들 앞에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우리 모두는……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침묵도, 반성도 다 부끄러운죄다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가녀린 손가락들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주던,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핸드폰을 다급히 품고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을공기 방울 글씨엄마,아빠,사랑해!대선후보 토론이 열린 다음날,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대선토론 이야기가 한창이다. 이 시간 변함없이, 세월호 광장 분향소에는 참배객이 이어진다. 여전히 ‘숨 쉬기 미안한’ 4월이다. 미안하다.<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rsqu...

    1224호2017.04.25 16:44

  • 명이

    최두석(1956~ )요즘에는 별미의 나물이지만예전에는 섬사람들 목숨을 잇게 해서명이라 부른다는울릉도 산마늘잎 장아찌밥에 얹어 먹으며 문득세상에는 참 잎도 많고입도 많다는 것 생각하네세상의 곳곳에서기고 걷고 뛰고 날며혹은 헤엄치며하염없이 오물거리는 입들과연 잎 없이 입 벌릴 수 있을까 생각하네우연의 일치일까, 종각역 스크린도어에서 이 시를 봤을 때 플랫폼 의자에는 노숙인이 배낭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고단한 그의 옆으로 역시 고단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산마늘(Mountain Garlic)이라고도 불리는 명이는 예전에 목숨을 잇게 해주는 음식이었다. 명이를 캐어다 먹고 목숨을 이어 ‘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름이 짠하다. 요즘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잎’과 ‘입’, 발음의 유사성에서 이 시를 생각한 시인의 내공이 엿보인다. 대선주자들의 &...

    1223호2017.04.18 14:52

  • 질문들

    임창아(1965~ )광화문 글판에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글을 읽다가 문득, 나였던 그 아이는 낮이건 밤이건 내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알았다 집에서 학교에서 길에서 영화관에서 언제나 나를 따라다님을 알았다 내가 웃고 싶을 때 먼저 웃고 내가 울고 싶을 때 먼저 우는, 그 아이 없이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다 내가 화날 때 대신 열받고 내가 힘들 때 대신 끙끙 앓는, 그 아이 없이는 사랑도 배신도 못하고 오지도 가지도 못하였다 그 아이로부터 나는 시인이며 엄마며 딸이었다 그 아이는 견딜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나를 떠나지 못해 나를 거부하고,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 떠나기도 하는, 굳이 못 볼 것도 없지만 그 아이 절대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였던 그 아이는 지금도 나이고 싶을까너는 누구니.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까. 바빠서, 바로 코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도무지 질문할 새가 없다. 도처에 깔린 정답을 ...

    1222호2017.04.11 11:51

  • 윤동주(1917~1945)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풀포기처럼 피어난다.즐거운 종달새야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푸르른 하늘은아른아른 높기도 한데…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봄은 온다. 시인은 아쉽게도 조국의 해방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지만, 해방의 조짐은 미리 알아챘을 것이다. 4월에는 눈 가는 곳마다 봄꽃이 지천이다.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즐거운 종달새’는 ‘어느’ 곳에서나 즐겁고 신나게 노래할 것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겪어서는 안 되는 일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볕이 따스하게 비췄으면 좋겠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21호2017.04.04 14:00

  • 물수제비

    이병국(1980~ )돌 하나가 물 위에 상처를 낸다 잠든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늘어가는 흔적만큼 지워낸 자신이 물아지랑이로 둥글게 흩어진다 울어본 적 없는 아이의 울음이 덮인다 엄마는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고요를 삼킬 수는 없다 상처가 아물수록 얼굴은 짙어진다 아무리 밟아도 파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엄마에게서 떠난 아이 울음이 돌과 함께 가라앉는다 물 아지랑이가 둥글게 흩어져 상처를 나에게 보낸다 나는 물 위의 내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마침내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1073일 만의 일이다. 이후 빠르면 열흘, 늦으면 14일 정도 걸려서 목포신항에 도착한다고 한다. 물수제비를 떠도 ‘잠든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부디 가족의 품에 안기길 기도한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20호2017.03.28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