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주간경향

연재

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문제

    손병걸(1967~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청취자 퀴즈가 흘러나왔다보기 1, 보기 2, 보기 3, 보기 4위 보기 중 정답 하나를 골라 보내주세요나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청취자 퀴즈 말인데요듣기가 맞지 않나요다음날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청취자 퀴즈가 흘러나왔다듣기 1, 듣기 2, 듣기 3, 듣기 4위 듣기 중 정답 하나를 골라 보내주세요무심코 넘기는 말들이 참 많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당연히 넘기는 말들. 시인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한다. ‘나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다음날 멘트가 바뀌었다. 우리 주변에 또 어떤 말들이 그러한가 살펴보게 된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39호2017.08.08 15:42

  • 습작생

    박덕규(1958~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 올려야 하고요.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책상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음악을 듣는 게 그 다음입니다.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모은 여자가허공에 떠 있습니다. 수학시험에 못 푼 문제들이꼬리를 뭅니다. 도대체...

    1238호2017.08.01 10:09

  • 동사무소(洞事務所)에서

    김해원(1971~ )끈적끈적한 무더위가 묻어나는 동사무소 3번 창구사람들 틈을 비집고 내가 나임을 증명하던[주민등록증 분실신고서]를 밀어넣었다.8절지 한 장 가득 쓴 내 부재신고서(不在申告書)….아이새도우가 짙은 여직원은 14일 이후에나 찾으러 오라며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없음을 선고(宣告)한다.아, 나는 여기에 있는데 장차 어떻게 나를 증명할까.동사무소를 빠져나오며한라산 아흔아홉골에 초당(草堂)을 짓고한동안 칩거하기로 결심했다.장마가 오려는지 한라산 이마가 잔뜩 흐려져 있다.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날이 이어진다. 무더운 날, 속 시원하게 일이 펼쳐지지 않으면 더 덥다. 휴가철이라 공항은 연일 북새통이라지만, 훌쩍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한라산 아흔아홉골에 초당을 짓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여름은 곧 지나갈 것이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2015...

    1237호2017.07.24 16:52

  • 불경기

    종정순(1954~)거미가 형광등 밑에 집 한 채 건축했다인삼은 판매하지 않고우두커니 계산대나 지키는 전자저울긴 목이 썰렁하다스르르 끼어드는 졸음못 이기는 척, 따뜻한 패널에 귀를 대고 눕는다옆 점포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누군가의 전화통화를 도청하지 않을 수 없다가게 한 구석에 방을 들인 생쥐의 이빨처럼 사각사각시멘트벽을 갉아먹는 물방울소리가 떨어진다먼지 한 점 날지 않는 통로좌판에 쌓인 인삼뿌리에 곰팡이 번지는 느낌처럼누가 오는 소리다민첩해진 반가사유상 눈꺼풀들,점포마다 얼굴 꽃대 일어선다얼굴보시를 렌즈처럼 모아들이는 탁발스님흰 고무신 걸머진 바랑, 공복의 위처럼 훌쭉하다내민 고개들이독경소리 목탁소리를 귀에 담고쪼르륵 곯은 속을 들여다본다불경기가 佛經期다불경기를 이겨나가는 모습이 짠하다. 스님의 탁발소리가 ‘불경기가 불경기(佛經期)’가 되는 깨달음이 이 시대를 사는 서민들의 내공일까.<김시언 시인 ...

    1236호2017.07.18 16:16

  • 7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김종해(1941~ )흙은 원고지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촘촘히 심은내 텃밭의 열무씨와 알타리무씨들원고지의 언어들은 자라지 않지만내 텃밭의 열무와 알타리무는 이레 만에 싹을 낸다간밤의 원고지 위에 쌓인 건방진 고뇌가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텃밭에서 호미를 쥐어보면 안다땀을 흘려보면 안다 물기 있는 흙은 정직하다그 얼굴 하나하나마다 햇살을 담고 사랑을 틔운다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내 텃밭에 와서 일일이이름을 불러낸다칠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텃밭에서 내가 가꾼 나의 언어들하늘이여, 땅이여, 정말 고맙다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은 혹시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그는 묵묵히 더위를 받아들이며 열무김치로 밥을 비벼먹거나 국수를 말아먹지 않을까. ‘텃밭에서 내가 가꾼 나의 언어들’인 열무김치가 아침밥상에 올랐다. ‘자라지 않는’ ‘원고지의 언어들’과는 견줄 수 없다. ‘물기 있...

    1235호2017.07.11 15:29

  • 여름의 달력

    하재연(1975~)초록색 사과를 깨물면 내가 있고사과를 네 쪽으로 갈라서 깎기를 좋아하던 당신이 있고나는 구름이 변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구름의 발목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본다.발목이 발목을 데리고 가는 순간에,당신의 전화가 울린다.여름의 구름은 대기의 규칙을 따른다.오른발을 먼저 내미는지 왼발을 먼저 내미는지하얀 선 앞에 서보고 싶었는데.멀리서 시작된 누군가의 달리기.당신의 자동응답기는여름의 목소리만 담고 있다.그리고 당신의 달력은월요일부터 시작한다.구름과 초록은 대기로 스며들고사라지고내 여름의 달력은일요일부터 시작한다해마다 처음 맞는 ‘여름’은 같은 사람에게도 다르게 다가온다. 소나기 한 줄기를 고대하기도 하고 그늘 한 줌을 찾기도 한다. 여름이 여름 같으려면 어떠한 날씨여야 하고 어떠한 마음이어야 할까. 가물어 갈라진 논도, 더위에 지쳐 늘어...

    1234호2017.07.03 17:35

  • 저울의 힘

    전남진(1966~ )저울이 버려져 있다무게만큼의 숫자가 나오는 부분이 떨어져나간 채수평을 잃은 발판에 조금씩 녹이 자라고 있다더 이상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자신 위에 놓인 많은 질문들에게 답을 주었을 저울저울이 정의 내린 숫자들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을 때그 힘으로 저울이 저울다울 수 있었을 때그렇게 아름다웠던 저울은 지금아파트 뒷길에서 하늘을 재며 녹슬고 있다나는 가만히 버려진 저울 위에 올라가 앉아본다잠시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세상에 앉아본다.감자를 캐어 저울에 올려놓았다. 무게가 과연 정확할까. 햇볕과 바람과 키우는 이의 손길 무게도 쟀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지 못하는 저울은 ‘버려져’ ‘더 이상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2015)이 있음.

    1233호2017.06.27 11:51

  • 냉장고

    강연호(1962~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지난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 텐데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냉장고를 친구한테 줘버린 사람이 있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시끄럽고 냉장...

    1232호2017.06.20 13:39

  • 문화이발관

    이시영(1949~ )대방동 구불구불 옛 골목길 문화이발관이 아직 거기 있네흰 수건을 탁탁 빨아 새하얗게 걸어놓은 집아침이면 물 뿌린 거기로 제일 먼저 따스한 햇살이 모이고저녁이면 금성라디오가 잔잔히 흘러나오던 곳동네 처녀들 알전구 환한 불빛을 피해 숨어 다녔지공군회관에선 한때 춤으로 날렸다나얽은 얼굴이지만 백구두에 씩씩한 맘보바지, 바지런한 손말할 때마다 거울 속에서 쫑긋쫑긋 웃는 선량한 귀밤꽃 향기 아래 굵은 팔뚝이 자랑이던 우리들의 영웅그 짙은 포마드 향기는 다 어디로 갔나이제는 하얀 중늙은이가 되어옛 철봉대 아래 그윽이 웃고 있네문화이발관대도시 어느 골목에 기계가 아닌 ‘가위질’을 고수하는 이발관이 있다. 이곳에선 아직 면도를 옛날 방식으로 하고, 이 방식을 찾아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온다. 비누거품을 내서 바르고, 면도해서 신문지에 거품을 걷어내야 비로소 면도한 것 같다는 사람들은 대개 ‘하얀 중늙은이’이다. ‘가위질을 ...

    1231호2017.06.13 14:57

  • 감자를 먹습니다

    윤이산(1961~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 하며 먹습니다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오직 당신을 따르겠다*는 그 일념만으로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눈물을 먹습니다*감자꽃의 꽃말감자꽃이 한창입니다. 보...

    1230호2017.06.05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