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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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잘 익은 사과

    김혜순(1955∼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돈다. 자전거 바퀴는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어느새 가을이고… 또다시 가을일 것이다. “소리 없이 깎이는” 소리가 지천이다.

    1249호2017.10.24 14:12

  • 구름

    문인수(1945~)저러면 참 아프지 않게 늙어갈 수 있겠다딱딱하게 만져지는, 맺힌 데가 없는지제 마음, 또 뭉게뭉게 뒤져보는 중이다구름은 절기, 시간, 날씨, 바람,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 햇빛 달빛 아래서도, 산 너머 산 아래에서도 색과 모양이 다르다. 가을이 깊다. 발걸음을 멈추고 시인처럼 마음을 ‘뒤져보면’ 어떨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48호2017.10.17 15:16

  • 저 물결 하나

    나희덕(1966~)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물결 하나 일으켜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물결 하나 일으켜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사랑도 물결 하나처럼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한 번도 같은 자리로 내려앉지 않는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예전에 살던 곳을 지날 때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그곳에서 보낸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사람도 건물도 풍광도 많이 바뀌...

    1247호2017.10.10 18:53

  •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이선영 (1964~ )이 작은 포도알 속에도몇 개의 딱딱한 씨가 들어 있다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입안에서 터지는 이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맺혀 있다이 달콤한 포도알을 굴리거나 누르며 지그시 씹을 때도절로 생겨나 거저 여물 리 있겠느냐는 듯난자이며 정자인 씨가 혀에 걸린다손길만 닿으면 건들건들 떨어져내리는 포도알 하나에도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옥니박이 씨가 숨어 있구나!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비 온 날이 많아 포도농사를 망친 친구가 있다. 포도알이 한창 익을 무렵, 비가 왜 그리 많이 오던지. 그 친구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예약 주문을 모두 취소했다. 그러고 나서 묵묵히 그나마 성한 포도를 골라 즙...

    1246호2017.09.26 15:43

  • 45 나누기 21

    차주일(1961~ )친구 결혼식에 나눗셈하러 갔다늦은 나이에 어린 아내를 맞는 게 면구스러운 친구는말도 통하지 않는 아내에게알아볼 수 없는 수화와 몸짓으로내가 불알친구임을 말해주었다신부 볼에 핀 수줍음이 몽고반점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나는 그들의 행진에평소보다 많은 박수를 쳐주었지만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 심사가 무한소수처럼 남았다언젠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동남아 한 산간마을 풍경을 본 적 있다우리말과 비슷하게 발음되고 뜻이 같은 몇 단어 중엄마와 우리 그리고 구들이라는 말이 있었는데지금 신부가 마음으로 오물거리는 엄마라는 단어가자꾸만 그의 입술에서 도드라지는 것이다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저 심사와그 속내를 볼 수밖에 없는 내 눈치가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유전형질 같은 우리일 것이다썰렁한 신부 측 하객석에 홀로 앉는다몽고반점이 구들처럼 따뜻해져 온다‘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갈 어린 신부가 안쓰럽다....

    1245호2017.09.18 18:27

  • 나무들의 변명

    양해기(1965~ )학교 교실 안한 친구의 지갑이 사라졌다해진 스웨터를 입고 있던내가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되었다솔직히 얘기하면용서해주겠다고없던 일로 해주겠다고선생님이 날 달래고 있었다수군거리는아이들과문틈으로 보이는교장선생님의 무서운 얼굴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데창밖 나무들이허공에 손을 휘저으며그게 아니라고그런 게 아니라고대신 변명을 해준다느닷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얼마나 막막할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없고, 모두 자백하라는 눈초리를 보낸다. 그때 ‘창밖 나무들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해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지 못하는 나무가 대신 하다니.<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44호2017.09.12 14:37

  • 감이 붉으면

    신경림(1936~)전실 딸 셋의 철물점 주인 중늙은이한테 후살이를 간전화교환원을 지낸 새파란 전쟁미망인이 좋아서,그 옆 두 평짜리 가게에서 풀빵을 굽던 머리 검노란그녀의 동생이 더욱 좋아서,인사 한 번 옳게 않다가도 밥사발이 비면 주걱으로채워주던 두 볼이 붉은 상밥집 젊은 새댁이 좋아서,늙은 나무에 감이 익는 청국장 냄새가 짙게 배었던그집 널따란 마당이 더더욱 좋아서,그래서 더욱 슬펐던 내 산읍에서의 한철…….시외로 가는 완행버스를 탄다, 한 백 리 가서 내리면퇴락한 장터, 골목으로 접어들면 상밥집도 있겠지,청국장을 끓여 달래 요기를 하고, 그리고 걷자,해 떨어지기까지, 그 산읍에서처럼,담 넘어오는 따뜻한 숨소리를 엿들으며, 감이 붉으면.초록 감이 툭 툭 떨어진다. 얼마 안 있으면 감은 붉게 물들고, 좀 더 지나면 이파리를 떨군 채 붉게 물들 것이다. 시인은 언젠가 ‘그래서 더욱 슬펐던 내 산읍에서의 한철&helli...

    1243호2017.09.04 17:44

  • 뒷짐

    이정록(1968~ )짐 꾸리던 손이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밀쳐놓은 빈손 위에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나이가 들면 점점 뒷짐질 일이 많아진다. 달려들 일도, 해야 할 일도 줄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짐지면서 몸이 편해지기도 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 수 있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시인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뒷짐을 ‘...

    1242호2017.08.29 11:18

  • 해바라기집

    오철수(1958~ )시를 써서, 만약에돈을 벌게 되어 근교 어디쯤에 집을 사게 된다면나는 마당에 뒤란에 담장 옆에해바라기를 엄청나게 많이 심을 것이다 하여이웃들이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잠깐 다니러 온 이들도 우리집을 보며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머리 희끗희끗한 내 처가 출퇴근하는 것을 보고는논 건너 아랫마을 분이 ‘저기 해바라기집 안사람이야’라고 소개하고아들도 해바라기집 아들로 불리고친정 나들이하는 딸도 해바라기집 딸로 불리고가끔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외상 신세지는동네 구멍가게 장부에도 ‘해바라기’로 적히도록해바라기를 많이 아주 많이 심을 것이다마당이 온통 노란 날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내 집에 처음 오는 이들도 버스기사에게상갓집이라고 묻지 않고해바라기집이 어디냐고 물을 수 있게만약에 내가 시를 써서 돈을 벌어…‘몇 동 몇 호’보다 풀꽃이나 나무집으로 불리면 행복할 것...

    1241호2017.08.22 11:13

  • 서시

    윤동주(1917~1945)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가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살펴보았다. 시인은 살아서 시 한 편도 발표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 100여 편은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있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40호2017.08.16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