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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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버릇

    박성우(1971~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입속에 다시 넣었구요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돌발상황이 벌어졌을 때, 미처 생각지 못한 행동이 나올 때가 있다. 두고두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벌어진 일을 어쩌랴. 가장 빠른 해결방법인 것을. 수없이 맛을 구별하고 음식을 씹고 삼켜온 혀는 ‘코앞까지’ 온 냅킨보다 잽싸다. 수없이 되풀이해온 버릇이 촌스럽기보다는 왠지 믿음직스럽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59호2018.01.02 19:23

  • 빈 곳

    배한봉(1962~ )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틈이 생명줄이다.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틈이 생긴 구석.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언제든 안을 준비돼 있다고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은 것.틈은 아름다운 허점.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꽃이 피는 곳.빈곳이 걸어 나온다.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오른 자리.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새 달력을 걸고 새 수첩을 펼친다. 잘 살자. 틈이 많고 허술한 점이 많다 보니 새해 각오도 어딘가 틈이 보이는 듯하다. 일이든 사람 관계든 야무지고 빈틈없이 처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결코 내가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아챈다. 틈이 있는 대로, 비어 있는 대로 그냥 두자. 비어 놓으면 뭔가가 차오르겠지. ‘빈곳이 걸어 나온다.’김시언 시인 2013년 &l...

    1258호2017.12.26 18:59

  • 겨울 나기

    도종환(1955~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나무들이 있다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뿌리까지 얼고 만 밤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이 겨울 우리 몇몇만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차가운 겨울 하늘에도 봄볕은 숨어 있고 눈서리 길어도 그 속에는 꽃 소식이 있어 그까짓 추위는 몇 번 비벼서 따뜻해진 손으로 마주 잡으면 살아지겠지 살아지겠지.<김시언 시인 2013년 &lsq...

    1257호2017.12.19 18:44

  • 바보처럼 웃으리

    이승훈(1942~ )하늘 봐도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봐도 들길 가는 사람구멍가게 앞 빈 의자 봐도 들길 위에 서 있는 사람봐도 웃으리 웃으리 바보처럼 웃으리 바다 봐도바다에 떠 있는 기선 봐도 바다 아래 물길 가는 고기들봐도 돌멩이 돌멩이 앞 물고기들 봐도 돌멩이 위에 서있는 사람 봐도 웃으리 웃으리 바보처럼 웃으리얼어붙은 바위도 앙상한 나무도 말없이 웃는 바보. 그저 실실 웃는 나는 찡그린 바보보다 웃는 바보.<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56호2017.12.12 16:21

  • 호시절

    심보선(1970~ )그때는 좋았다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사람들의 말 하나 하나가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그때는 좋았다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그때는 좋았다격렬한 낮은 기어이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오늘의 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렸다그때는 좋았다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그러니까 그때는지난 시절은 대체로 좋다. 사는 일이 힘겹고 고단했어도 행복했다. 지났으니까. 서로 이해하고 힘내라고 했으니까.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버겁고 힘겨울 ‘지금’도 훗날...

    1255호2017.12.05 10:49

  • 탁! 탁!

    이설야(1968~ )마을버스에서 내린맹인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탁! 탁! 칠 때마다 땅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꾹. 찌르며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집을 찾아가는 지팡이무수한 길들이종아리 속에 뻗어 있다맹인 소녀의 지팡이 소리가 우렁차다. 허공을 찌르고 길을 두드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소년에게로, 땅속 벌레들에게로 뻗어나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두드려 길을 내는 지팡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탁! 탁!<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54호2017.11.28 11:31

  • 뻔디기

    서정주(1915~2000)예수의 손발에 못을 박고 박히우듯이그렇게라도 산다면야 오죽이야 좋으리오그렇지만 여기선 그 못도 그만 빼자는 것이야.그러고는 반창고나 쬐끔씩 그 자리에 붙이고뻔디기 니야까나 끌어 달라는 것이야.“뻐억, 뻐억, 뻔디기, 한 봉지에 십원, 십원,비 오는 날 뻔디기는 더욱이나 맛좋습네.”그것이나 겨우 끌어 달라는 것이야.그것도 우리한테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국민학교 6학년짜리 손자놈들에게까지 이어서끌고 끌고 또 끌고 가 달라는 것이야.우선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제에길!최저임금에 겨우 꿈쩍이며 사는 세상이 차라리 순교라면 참을 만하겠지. 못 빼내고 반창고로 임시처방하는 현실에 자식 손자의 삶은 달라질까. 그저 끌고 끌고만 가라는 걸까. 아침 바람이 매섭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53호2017.11.21 16:01

  • 근성

    조정권(1949~2017)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나는 뿌리들이 여지껏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우리만큼흙의 혈을 물고 나온다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뿌리에 묻어 있는 피이놈들은 어둠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독하게 제 하반신을 스스로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흙의 육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고 생각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 스스로 악착스럽게 잡고 버티게 하는 힘이 있다. ‘뽑혀지더...

    1252호2017.11.15 09:21

  • 조각보

    전윤호(1964~ )아침이면전날 밤 만취해마구 풀어 헤쳐놓은 꿈들주섬주섬 보자기에 챙기고단단히 매듭을 지어 묶는다어머니가 남겨준 조각보몇 군데 깁기는 했으나아직은 쓸 만하다거리를 나서면허둥지둥 갈 길을 찾아 가는가지가지 모양의 짐 보따리들더 들어갈 여유도 없이잔뜩 부푼 얼굴들행여 쏟아질까 두려워종일 꼭지만 움켜쥐고 산다산다는 건 그저갖가지 천 조각을 이어보자기를 만드는 일나는 오늘도 가위를 들고적당한 크기로하루를 자른다오늘이 어제인가 내일이 오늘인가. 또다시 십 년 뒤 거리를 서성댄다. 구멍 난 호주머니 사이로 툭툭 삐져나오는 꿈도 집어넣는다. 화자는 꿈들을 ‘주섬주섬 보자기에 챙기고 단단히 매듭을 지어 묶는다.’ 산다는 건 ‘그저 갖가지 천 조각을 이어 보자기를 만드는 일’.<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51호2017.11.07 14:26

  • 나도 모른다

    김명은(1963~ )우리 몸의 세포 수를 아십니까 세포 하나의 길이를 아십니까한 해 임산부가 먹는 사과의 개수를 아십니까쇼처럼 보이는 토마토 축제에서 가장 멀리 던져진 토마토를 아십니까 붉은 플라스틱 컵과 그 속에 꽂힌 붉은 빨대의 성관계를 아십니까꽃이 필 때까지 색깔을 알 수 없는 꽃을 아십니까달리고 싶은 기차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수를 아십니까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글씨체를 아십니까사자를 묶을 수 있는 거미줄의 강도를 아십니까한반도 비핵화 유혼과 종북몰이의 새로운 희망을 아십니까태변에서 지금까지 눈 당신 똥의 분량을 아십니까고무젖꼭지를 빠는 찌찌파티를 아십니까꼬리를 흔드는 고양이 머리를 통째로 입에 넣고 있는 들쥐를 아십니까 뉴욕 월스트리트에 살고 있는 황소와 곰의 관계를 아십니까직장에서 직장으로 직장을 옮겨도 즐겁지 않은 비정규직 신입 사원의 찢어진 이력서가 몇 장인지 아십니까팔을 이마에 얹고 눈을 뜨지 않는 딸의 슬픔을 아십니까방금 부러진 분필의 목...

    1250호2017.11.01 0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