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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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봄비에 젖은

    약이다어여 받아먹어라봄은한 방울씩눈물을 떠먹였지차갑기도 한 것이뜨겁기까지 해서동백꽃 입술은쉽게 부르텄지꽃의 흘린 한 모금덥석 입에 물고방울새도삐! 르르르르르목젖만 굴려댔지틈새마다얼음이 풀린 담장처럼나는 기우뚱너에게기대고 싶어졌지봄비 내린다는 소식이 그저 반갑다. ‘봄’이라는 말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낸 탓이리라. 언 땅에 뿌려놓은 거름이 봄비에 스며들듯, 우리네 마음에도 생기가 돈다. 봄비는 약이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69호2018.03.19 14:43

  • 옛날이야기

    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정작 옛날에는 들려주지 못했던 이야기. 오늘날에 와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손이 날아와 입을 틀어막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누구나 알지만 그 누구도 끝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끝까지 가려던 사람들이 도중에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끝끝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되풀이되는 이야기.입에서 입으로 몰래 전해지던 이야기. 날이 갈수록 점점 은밀해지는 이야기. 누구누구가 죽었을 때에야 희미하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 점점 혐의가 짙어지는 이야기.내일도 모레도, 네가 여기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살아 있을 이야기. 어떻게든 혼자 있을 이야기. 옛날처럼 멀고 훗날처럼 막연하지만 오늘도 진행되는 이야기. 지하에서 허공에서 더욱 생생한 옛날이야기.여기 옛날이야기가 있어. 여기 아직 있어. 여기 아직 그대로 있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이야기. 입을 벌려도 차마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귀를 기울여도 답이 ...

    1268호2018.03.12 17:22

  • 웃는 돌

    돌이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힘껏 부딪치면열릴지도 모르겠다퇴적층이 없으니세월을 안다고 할 수도 없다오래전에 귓속으로 들어간 나비가반쯤 웃고 있다부드러운 살갗이 있던 자리귀를 대고 들어보니바람도 애벌레처럼 웃고 있다반쯤 눈을 감고 세상을 보면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보일 텐데돌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다정으로 쪼면 쫄수록 생각은 단단해진다사람이 여럿 모이면 말이 많아진다. 시간이 갈수록 거르지 않은 말들이 날아다닌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가볍기 그지없다. 이럴 때, 자신을 내세우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정으로 쪼면 쫄수록 생각이 단단해’지는 돌이 될 수는 없을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67호2018.03.05 16:00

  • 이성부(1942~2012)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지난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한겨울에는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더니만, 마침내 봄이 ‘더디게 더디게’ 왔다. 꽝꽝 얼어붙었던 유빙도 서서히 녹아 바닷물이 되어 흐른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물줄기를 끌어올리느라 바쁘고, 땅 속 깊은 곳에서는 기지개 켜는 소리가 우렁차다. 봄이다. <김시언 시인 2013년 ‘...

    1266호2018.02.27 16:01

  • 망가진 침대

    조말선(1965~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자저것은 침대처럼 무겁다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결정하자저것은 망가진 침대저것이 망가진 것뿐인데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침대를 옮기고 있다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내 몸 위로 침대가 버려진다내 몸에 이렇게 방이 많았나방마다 망가진 침대가 들어앉는다이렇게 좁은 입구를 뚫고어떻게 네가 들어온 거니?나는 어쩌자고 침대를 낳을 생각을 한 거니?좁아터진 방마다 침대가 만삭이다일요일에 해치울까?엘리베이터는 아직 수리 중이다신호등 앞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은줄곧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폭신한 구름다리를 들고 서 있는 골짜기들처럼나는 무거워졌다이사 갈 날짜를 잡아놓고 집안을 둘러본다. 세상에, 모든 물건이 짐이다. 나름 필요한 물건만 끼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체로 버려야 할 것들, 없어도 될 것들이다. 좀 더 가볍게 살려면 반드시 털어내야 한다. 집안 구석구석 퍼질러 앉은 짐들이 온몸을 ...

    1265호2018.02.13 14:47

  • 다음에

    박소란 (1981∼ )그러니까 나는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다음에’라고 말하면 편해진다. 할 일을 천연덕스럽게 미루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부득이 일이 생겼으니...

    1264호2018.02.06 14:51

  • 맹문재(1965~ )나는 저 작디작은 손들을 볼 때마다걸음을 멈추곤 한다은행과 보험사와 증권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골목의 구멍가게를 지나칠 때지친 나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나는 집으로 품고 가기 위해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알은체까지 하며봉지에 적당히 담는 것이다저것들이 눈을 활짝 열어주는 별이 되리라고나는 생각하지 않지만기쁜 그림엽서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또 내 그림자를 키우지는 못하겠지만정치 뉴스처럼 짜증스러운 하루를 보듬어주는우리 집 현관문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저것들의 눈빛이 있는 한나는 꽤 깊은 밤까지한 그루의 나무를 심듯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것이다꽝꽝 언 이 겨울 같은 세상살이에서주택부금을 들 때와 같은 기대감을 품고가장의 체면도 지킬 것이다빈손으로 가기엔 왠지 허전하다 싶을 때면 귤을 산다. 치르는 값에 비해 손이 묵직해져 순식간에 부자가 된 듯하다. 비닐봉지에 탱글탱글 담긴 귤은 빈 마음을 채워준다. 하나만 남아도 나누어 ...

    1263호2018.01.30 14:57

  • 겨울나무

    차창룡 (1966~ )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밥도 먹지 않고물도 마시지 않고벌거숭이로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그냥 지나가는구나눈이 이불이어서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머리는 땅에 처박고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동상에 걸린 채로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나무는 날씨가 어떻든간에 산과 들, 길모퉁이에서 뚝심있게 겨울을 살고 있다. 겨울나무가 없었더라면 춥기만 한 겨울을 어찌 버텨낼 수 있을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62호2018.01.23 15:02

  • 폭설

    황규관(1968~ )어머니가 빙판에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지셨다시골 터미널 앞 병원에 도착하니퉁퉁 부은 어머니의 오른손한가하게 산보하다 맞은 날벼락이 아니라당신이 사시는 아파트 청소를 하고달에 40만원 벌다 당하신 산재다환갑을 넘긴 양반이, 산재라니!(병원비 걱정은 없겠구나)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계단에서끊은 담배를 깊이 태웠다하늘이 너무 파래 어지러웠다10만원권 한 장 못 내놓고 병원문 나설 때내 마음 길바닥보다 더 빙판임을너무 오래 몰랐다는 걸 알았다삶이 재앙이라는 생각이제 그만 떨쳐내고 싶었는데해 떨어져 씨 다른 동생과 삼겹살을 구울 때난데없이 폭설이 내렸다세상에서 내가 지워지고 있었다문득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의심할 때가 있다. 무능함 때문에… 애써 무시한 현실이 빙판길처럼 나타나면 하얀 눈 덮인 세상으로 숨어 버리고 싶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

    1261호2018.01.16 15:33

  • 풀쑥

    오은(1982~ )몸을 열면 질병이입을 열면 거짓말이창문을 열면 도둑이, 도둑고양이가 튀어나온다우편함을 열면 눈알이내일을 열면 신기루가방문을 열면 호랑이가,종이호랑이가 튀어나온다속이는 것은속없는 겉이 하는 일갑자기,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풀쑥. 이 일은 기분 좋거나 신나기도 하고 난처하거나 갑갑하기도 하다. 어떤 때는 멍하니 있다가 ‘풀쑥’ 떠오른 생각에 긴장하고 설렌다. 그 일을 실천하면서 또 다른 ‘풀쑥’으로 나타난 일을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한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풀쑥’ ‘튀어나’오는 생각과 일의 연속이 아닐까.<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60호2018.01.09 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