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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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거미줄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새끼를 건드리면 움찔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한밤에 전화가 왔다어디 아픈데는 없냐고,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어디 전화 한 통 해야겠다. 요즘 어찌 지내냐고. 나도 조신하게 살고 있다고. 알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그대에게도 있다는 걸.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79호2018.05.28 14:01

  • 모란이 피네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마지막 종소리를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그런데 얘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그것의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긴긴 오뉴월 한낮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당신께 보여주려고,꽃모서리까지 환하게펼쳐놓는 모란보자기5월 광주의 진실이 모란꽃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벙그는 종소리가 코만 베어오고 머리만 떼어온 것이 아니라 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아 세상에 울려퍼지길….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깨비><2015>이 있음.

    1278호2018.05.21 16:07

  • 화학 선생님

    중간고사 화학 시험은문항 50개가 전부 O× 문제였다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번호순으로 채점 결과를 발표하셨다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아니 이 녀석은 전부 ×를 쳤네, 이 세상에는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 과목이정말로 100점으로 적혀그 점수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백발 성성한 지금도 이 세상에는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걸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이 선생님은 어우러져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화학(和學) 선생님이셨을까. 옳은 것이 60점보다 많은 세상인 것을 믿게 해주는 100점 세상이면 좋겠다. 지혜를 주는 선생님들을 생각합니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

    1277호2018.05.14 13:51

  • 각을 끌어안는다

    가파른 산 위로 오를수록너럭바위가 팔 뻗쳐 길을 막는다제 안에 각을 부수고잡아당긴다 끌어안는다말 건넨 적 없고 표정도 없지만긴 팔이 쭉 나온다길 잃은 이들을 불러들인다호주머니에서 삐져나오는 카드 영수증연락 두절된 전화번호와 전하지 못한 쪽지,비집고 나올 공간을 찾지 못해귀갓길에 운전대를 잡고 내지르는 비명,다 털어 버리라고 잡아당긴다너럭바위가 각진 모서리를 끌어안는다빗물과 짠 눈물 바람으로 닳도록 두들겨수직과 수평 틈으로 링거 병을 꽂는다진달래와 얼레지꽃, 붉은 병꽃과 손을 잡는다황사에 미세먼지에 앞길이 막막해도도봉산 청계산 관악산 산마다비집고 들어갈 뜨거운 혈을 만든다각이 무너진다진달래 얼레지 산벚꽃 둘레길이 열린다앞길이 뚫린다야생화가 어우러진 등산길에는 삶의 고단함에 지친 이들을 쉬게 하는 너럭바위가 있다. 날카로운 모서리 각도 무너뜨리고 치미는 화도 잠시 내려놓으면 얼레지, 산벚꽃이 보이고 아름다운 둘레길이 열린다. 또 한 주를 뚫...

    1276호2018.05.08 10:18

  •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저 줄의 말단(末端)이라도 좋은 것이다꽁무니에 바싹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한 줄이 된다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뒤뚱뒤뚱하면서엉덩이를 흔들면서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오리 한 줄 일제히 꽥 꽥 꽥평화와 통일의 씨앗이 판문점에서 뿌려진다. 이 싱그러운 대열에서 엉덩이 흔들면서 급기야 꽥꽥대고 싶다.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저 줄의 말단이라도 그저 따라가고 싶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75호2018.04.30 14:32

  • 공터에서 먼 창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쌓아올리는,저녁의 오래된 기술.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 장이 차갑게 깨져도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슬픔의 오래된 습관.모든 것이 형체를 잃는 어둠 속에서 한 장의 벽돌이 깨지는 것처럼 불이 켜진 방의 창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시인의 눈길은 어떤 ‘슬픔의 오래된 습관’일까. 어스름 저녁 하나 둘 켜지는 불빛을 보는 나의 무관심한 오래된 습관.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74호2018.04.23 14:37

  • 두부

    두부는 희고 무르고모가 나 있다두부가 되기 위해서도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한다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두부로 살기 위해서도열두 모서리,여덟 뿔이 필요하다이기기 위해,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이기지 않으려고,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모 나는 두부도 있다두부같이 무른 나도두부처럼 날카롭게 각 잡고턱밑까지 넥타이를 졸라매고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간다어디에 부딪혀도 쉬이 모서리가 깨지는 두부는 그나마 뜨거운 기름에 구워지거나 튀겨지면 단단해진다. 그래도 두부는 두부. 된장찌개 맛, 매운탕 맛 한층 더 내는 양념에 어우러진 두부의 날카로운(?) 모를 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73호2018.04.16 14:44

  • 목새

    모래 속에서 새 울음소리가 난다비닐봉지 구겨지는 소리로 흐느낀다지표에 내려앉은 충격 겹겹 주름으로 포개놓은 새물의 날개로 날아와 시냇가 모퉁이 차지하고 있다목새*라 했지!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말대대로 유전되다가아무도 모르게 이지러진 말주워 담으려면 주르르 흘러버린다오랫동안 잊고 살아 서걱거린다목새라 일러줘도무슨 나무에서 사는 새냐 되물으며낯설어 하는, 피가 식어버린 말이어리둥절 섬을 만들어 놓고 외로움 토해낸다발가락 사이 파고들며 꼼지락 꼼지락 운다사막의 기억이 뜨겁다*목새: 물결에 밀리어 한곳에 쌓인 보드라운 모래목새라니! 모래밭에 그렇게 많은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니! 우리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는다. 사전 속에 꽁꽁 묻혀 있던 단어에 튼튼한 날개를 달아준 시인의 부지런함과 감각이 돋보인다. 시를 읽는 내내 ‘어리둥절 섬’에 덩그라니 앉아 수많은 목새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1272호2018.04.09 16:49

  • 유턴을 하는 동안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좌회전 신호가 없다지나친다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유턴을 한다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꽃을 기다리다가 잠시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버렸다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이번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꽃그대여, 그럼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오랫동안 기다렸던 ‘꽃’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 만나야 하고, 꼭 들러야 하지만 여건과 상황이 도저히 안 된다. 할 수 없이 바람결을 따라 며칠 떠돈다. 부질없이 달린다. 마침내 지나친 길목을 찾아 돌아왔을 때, 꽃은 ‘한꺼번에 다 저버렸다.’ 기다리던 ‘꽃’이 슬며시 다녀갔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

    1271호2018.04.02 15:17

  • 풍찬노숙(風餐露宿)

    열무 솎듯 쑥쑥 뽑아서 박스에 던졌다박스를 들어 문밖에 냈다서너 박스는 재활용 쓰레기로 내고너덧 박스는 주위에 돌리고서너 박스는 동네 도서관 사서에게 맡겼다정신의 한 모서리가해빙에 어긋난 축대처럼 헐거워졌다어젯밤 참 편안하게 잤다잠자리에 누워서웃풍이 숭숭 드는 정신의 남루를 바라보았다미련의 골재들이 뽑혀나간 집이숭숭 넓어서오늘 아침, 이사 나가기가 아깝다흥부네 까대기에 누워서 보는 일출의 아침이다이사할 때 책은 참으로 골칫덩어리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책 많은 집을 좋아하지 않아 웃돈을 쳐줘야 한다. 하여 이사하기 직전에 책은 고물상 계근대에 오르기도 하고, 다른 집으로 하염없이 보내지기도 한다. 그동안 책에게 내어준 공간이 이리 넓었던가. 자식 같은 책을 떠나보내면서 내심 서운하지만, 웬일인지 책 있던 자리보다 더 넓게 부자가 된 듯하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

    1270호2018.03.26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