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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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얼음 호수

    마지막으로 후투티 한 마리 바닥을 치고날아간 다음, 호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종적을 감춘 물을 바라보며 나무 한 그루,제 가지를 흔들며 뒤척였다햇빛은 기척도 없이 걸어 다녔다어디선가 돌멩이 하나 날아와 떨어지자 흔적도 없이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가끔씩 지나가던 바람이 문을 흔들어 보았지만그럴수록 문은 더 팽팽하게 닫힐 뿐대문 앞을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처럼 한 차례비가 쏟아졌다우듬지에서 잔가지 하나 가벼이 떨어져 갸웃,문틈을 내더니단단히 영근 물집 하나를 기어이 톡,터뜨리고야 만다 순간시퍼렇게 멍든 수십만 개의 물방울들이반짝이며 튀어올랐다나무는 발가락을 꿈틀거리며 거울 속 발그레물든 얼굴을 내려다본다폭염의 연속이다. 지난겨울의 혹한이 차라리 그립다. 슬로 비디오 같은 찰나를 보는 듯 시원한 얼음호수의 한순간이 마음을 식혀준다. 수십만 개의 차가운 물방울이 머리 위로 흩날리는 듯.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1289호2018.08.06 15:01

  •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이제 당신이 정면입니다. 여기가 맨 끝이라 그러셨지만 맨 앞입니다. 새싹은 언제나 끝에서 나오는 법.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맨 앞입니다. 그 황망한 소식에도 희망의 정면에 우리는 서야겠지요.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88호2018.07.30 15:00

  • 양파 공동체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두길 바란다.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이제 들여보내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있겠다.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흰 방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문을 열면 미로들.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꽉꽉 찬 보따리를 양 손에 쥐고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

    1287호2018.07.23 14:35

  • 회전 식탁

    아이들에게 지구의를 나눠 준 적 있지지구라도 되는 듯 좋아하던 딸아이 탄성 때문에진작 사 주지 돌리고 놀게, 원성이 오래 남아지구의 함께 돌리다보면 하느님이 된 것 같았지푸른 바닷물이 출러덩, 물고기들도 펄떡튀어 나오는 것 같았지빙빙 돌리면 둥글게 넘치는 잔칫상 같았지지구의를 돌려라 중국집 회전 식탁처럼지구의를 돌려라 팔 짧은 아이도 음식이 닿게지구가 도는 까닭은누구도 굶지 않는 회전 밥상이 되기 위해서다아이들아, 지구의를 돌려라 새 지구를저기, 푸른 식탁이 돌고 있다우리는 돌지 않는 밥상의 지정석에서 그저 주는 대로 먹을 때가 많다. 팔 뻗어서 먹지 않으려면 자리를 바꿔야 한다. 초라하더라도 공평한 한 끼를 위한 회전 밥상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남겨주는 저 편 음식이 스르륵 내 앞으로 오려면.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86호2018.07.16 16:32

  • 신경의 통로

    산에 있다.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녹색의 잎들 사이로 신경이 엿보이는.그 신경을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바람이 불고, 잎이 손바닥을 뒤집고나무의 머리칼인 푸른 살덩이가 송두리째휘어지고 뒤집히며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비가 내린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눈앞에 비의 블라인드가 쳐지고 눈은 갇힌다.비는 물방울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다.물줄기가 된다. 신경의 통로물속에, 격렬한 역류 속에,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된다.비가 온몸에 부닥친다. 심장충격기가 피를가격하듯 대지의, 하늘의 신경이 맨살을파고든다. 땀도 아니고 비도 아닌언어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끈적끈적하고무색의 번쩍이는 언어에 신경이 파고든다.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뱀장어처럼번개가 언어에 접속되고 신경 덩어리가되는 언어들. 흙, 돌, 풀잎, 수피, 잎,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

    1285호2018.07.10 13:38

  • 그림자의 집

    아버지가 지은 집은 뒷산의 협력이 있었고 남향의 묵인이 있었다 날마다 그늘은 집을 돌고 돌았다 마당의 감나무까지도 햇빛의 반대 방향으로 그림자가 고양이처럼 돌아다녔다 함석지붕은 장마의 서식지였고 하늘의 뜨거운 아랫목이었으며 내 운동화가 잘 마르던 즐거운 건조대였다 지금 그 함석지붕엔 노을이 묻어 있고 곧 어둠에 허물어질 것이다집은 그 집 식구의 평수다 한 번 불탄 집의 평수는 다른 곳으로 버려지고 다시 지어 넓힌 그 넓이로 우리는 자라고 점점 멀어졌다 결국, 텅 빈 평수가 될 때까지 집은 사람의 자취로 흥하고 쓸쓸함으로 가득 찬다 식구가 줄어들면서 마당 빨랫줄에 걸쳐져 있던 바지랑대는 일렬로 맺힌 빗방울을 받치고 있다 마루는 말없이 때가 끼고 방문들은 시큰둥해졌으며 감나무는 저 스스로 집안 사정을 감안해 풋감을 서둘러 떨어뜨렸다아버지는 쓸쓸한 평수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집을 아버지의 집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 집엔 아버지가 산다 그러나 누구도 이 쓸쓸한 평수를 상속 받으려 하...

    1284호2018.07.02 15:04

  • 질그릇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세상 한 귀퉁이,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질그릇은 초벌로 구워서 유약도 바르지 않고 무늬도 없다. 깨어져도 쉬이 부스러져 자연으로 돌아간다. 초라하고 바보 같은 그릇은 그저 담기는 것만 보듬을 뿐 이름도 없다.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처럼. 어디서 무엇을 담았다가 박물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83호2018.06.25 15:53

  • 현등사 곤줄박이

    운악산 현등사 보광전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새가 깃들여 산다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곤줄박이 한 쌍의 비상이경쾌하고 날렵하다곤줄박이는 알 품고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기꺼이 노래하고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새 날아간 자취 더듬듯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되새긴다.목탁은 목어의 포터블 형태이고 눈 감지 않는 물고기는 수행의 상징이다. 그것조차 문득 놓아버리면 그 속에 생명이 깃들고 노래가 깃든다. 목탁에서 나오는 새의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울까.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82호2018.06.19 15:39

  • 아침 똥

    아침에 싸는 똥은어젯밤의 내 내력이다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무얼 먹었는지무슨 말을 가졌는지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남김없이 보여준다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몸은 끙, 한마디로 말한다쌓아두지 않는 게 몸의 운명인데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오늘 아침에도 똥은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귀 기울여보면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이 세상에햇빛이 가닿은 우주 안에간밤의 내력이 정직하게 형식 없이 쏟아지는 것이 아침 똥이다. 온갖 형식을 빌려 냄새나는 말을 쏟아내는 것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지방선거 유세로 거리마다 골목마다 말들이 넘실거린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81호2018.06.11 15:43

  • 의자의 구조

    하나의 의자 위에 두 개두 개의 의자 위에 세 개세 개의 의자 위에 네 개네 개의 의자 위에 다섯 개의 의자가 있다.다섯 개의 의자 위에 아홉 개아홉 개의 의자 위에 스무 개스무 개의 의자 위에 쉰한 개의 의자가 있다.의자, 의자, 의자가 의자 위에 있다.더 많은 의자가 있다.셀 수도 없이 많은 의자가 있다.우리는 날마다 더 많은 의자에 앉는다.수백, 수천 개의 의자에 앉는다.의자 위에서, 의자 아래서의자의 무게는 없어진다.의자 위에서, 의자 아래서의자는 의자를 누르지 않는다.우리는 의자를 누르지 않았다.떠받들 뿐이다.의자에 앉아서 의자들을,머리 위의 의자들을떠받칠 뿐이다.내 의자는 어떤 의자를 누르고 있는가. 또 어떤 의자를 떠받치고 있는지. 내 머리 위에 없어도 되는 의자에 앉은 이들은 누군가. 선거가 코앞이다. 존재감 없는 의자들이 온 거리를 휩쓸고 다닌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

    1280호2018.06.04 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