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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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맨드라미

    이병일(1981~ )화단 앞에서 수탉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땅을 박차고 허공을 날며 서로의 대가리를 콕콕 쪼아대는데, 벼슬에서 피가 얼키설키 쏟아진다. 싸움에는 퇴로가 없다. 기세등등한 부리가 화살이자 곧 과녁이다. 장벽으로 마주보고 있다가도 다시금 치받으니, 이것이야말로 생을 벼랑으로 밀고 가는 싸움이겠다. 급기야 한 마리가 이승 너머까지 나아가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수탉의 대가리에서 붉디붉은 맨드라미 활짝 핀다. 그때 대숲에서 은둔하던 족제비 부부가 수탉 한 마리씩 물고 논길로 사라진다. 한 됫박의 피 흘리고 간 수탉의 저승길만큼 화단의 맨드라미가 막무가내 꽃 피우는 일도 혼곤하겠다.수탉은 서열을 가리기 위해 무섭게 싸운다. 시인의 말대로 ‘생의 벼랑으로 밀고 가는 싸움’이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 ‘벼슬에서 피가 얼키설키 쏟아’지고 볏에 피딱지가 엉겨 붙는다. ‘수탉의 대가리에서 붉디붉은 맨드라미가 활짝 ...

    1199호2016.10.26 09:58

  • 소금창고

    이문재(1959~ )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늦가을 평상에 앉아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눈부시다소금창고가 있던 곳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수은처럼 굴러다닌다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나’는 ‘소금창고가 있던 곳’ ‘늦가을 평상에 앉아’ 있다. ‘시린 바람’은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늦가을 오후 세시의 풍경이 한눈에 그려진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고 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나는 마흔 살&rsquo...

    1198호2016.10.18 14:53

  • 타작 후

    이시영(1949~ )함지박의 콩들이 샛노란 눈들을 뜨고어서 빨리 다른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함지박 안에서 콩콩 뛰는 소리 들리고,주인은 낮잠 자고 도리깨는 서서 자고,기러기는 기럭기럭 서(西)으로 날고,함지박의 콩들이 어서 빨리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다고노란 이마로 함지박을 마구 들이받는 소리 들리고,요즘 농부들은 논과 밭에서 하루 종일 바쁩니다. 밭에서 거둔 깻단과 콩단을 햇볕에 말려 털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콩 터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썼습니다. ‘함지박의 콩들이’ ‘어서 빨리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함지박 안에서 콩콩’ 뜁니다. ‘주인은 낮잠 자고 도리깨는 서서’ 잡니다. ‘기러기도 기럭기럭’ 날고 콩들은 나가고 싶다고 함지박을 마구 들이받습니다. 참으로 정겹고 평화로운 농촌의 가을 풍경입니다. 이 땅에 최소한의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더라면, 고 백남기...

    1197호2016.10.11 16:49

  • 한 농부의 추억

    이기철(1943~ )그는 살아서 세상에 알려진 적도 없다대의원도 군수도, 한 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지주도 아니었고후세에 경종을 울릴 만한 계율도 학설도 남기지 못하였다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미끄러지는작은 바람을 좋아했다유동꽃 이우는 저녁에는 서쪽 산기슭에 우는비둘기 울음을 좋아했고타는 들녘끝 가뭄속에서는 소나기를 날로 맞으면서콧노래를 흥얼거렸다그는 쇠똥과 아침 이슬과 돌자갈을 은화처럼 매만졌고쟁기와 가래와 쇠스랑을 자식처럼 사랑했다더러는 제삿날 제상에 어리는 불빛을 좋아했고농주 한 잔에도 생애의 시름을 잊곤 했다수많은 영웅과 재사와 명언을 기억하는 사람들도이 농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키 큰 밤나무와밤꽃이 필 때 그가 완강한 삶의 일손을 놓고소슬한 뒤란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우리는 고...

    1196호2016.10.04 18:01

  • 밥그릇 경전

    이덕규(1961~ )어쩌면 이렇게도불경스런 잡념들을싹싹 핥아서깨끗이 비워놨을까요볕 좋은 절집 뜨락에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고요히 반짝입니다단단하게 박힌금강말뚝에 묶여 무심히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앞발로 굴리고 밟고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어느 경지에 이르면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테두리에잘근잘근 씹어 외운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박혀 있는, 그 경전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어느 대목에선가할 일 없으면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너른 논이 황금빛이다. 벼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나고 자라 베어지기를(비어지기를) 기다린다. 비워져야 채워진다. 묵묵한 기다림의 경지는, 시인이 ‘금강말뚝’에 묶여 빈 밥그릇을 가지고 노는 개에게서 채워질 희망을 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벗어날 수 없는 말뚝에 묶인 개에게서 운명 같은 ...

    1195호2016.09.27 16:43

  • 들깻잎을 묶으며

    유홍준(1962~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맞다 맞어,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겨울이 오면 아우야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덩이 지나가는 추석날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아아, 모처럼의 기쁨!깻잎 따는 모습이 정겹다. ‘시퍼런’ 깻잎을 한 손으로 똑똑 끊어서 다른 손 손바닥에 이파리 꼭지를 맞춰 차곡차곡 얹는다. 한...

    1194호2016.09.13 13:45

  • 금 팔러 간 이야기

    이근화(1976~ )내게도 금은 있다동전보다 빛나고 지폐보다 무거운 금이 있다서랍에 처박혀 무거운 목소리를 내는 금이 있다금값이 치솟고 고가매입 전단지와 안내판이 걸리니공연히 그걸 꺼내 보았다집안 경제도 못 챙기는 나는유럽 경제나 미국 증시 같은 건 알 수 없다동네 금방 아저씨 얼굴도 가물가물가물치처럼 길쭉하고 기름졌던가쌀을 안치기도 귀찮은 날동네 칼국숫집에 들렀다가 가물치와 마주쳤다이십이만 오천 원한때는 이십오만 원까지 쳐줬단다미끈한 정보 사이로 그의 눈빛이 빛났던가나의 눈빛이 가물치처럼 찢어졌던가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설렁설렁 살고 싶은데여행을 갈까 적금을 들까 코트를 살까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오늘 내 서랍을 적신다칼국수 속 드문드문 박힌 조개도아까 잠깐 웃었던 것 같다‘잘나가는’ 시인의 연봉은 30만원이라고 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어디 시 쓰는 사람뿐이겠는...

    1193호2016.09.06 13:08

  • 강물에 대한 예의

    나호열(1953~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하리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추억을 버릴 때도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그 속에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보가 없는 강은 물 흐름이 자유롭다. 폭염이 이어져도 녹조가 생기지 않는다. 강물은 애초부터 바다로 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시인은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

    1192호2016.08.30 15:12

  •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길거리에 나서면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어느 곳에선가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며칠째 청와대 초호화 오찬이 화제가 되고 있다. 송로버섯, 샥스핀 찜, 캐비어 샐러드, 훈제연어, 바닷가재, 한우갈비, 능성어 등이 메뉴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새 지도부는 이 음식을 먹으면서 서민 가정의 전기료를 몇천 원 깎아주는 문제를 논의했다. 폭염 속에서 서민은 하루하루 살기가 더 어렵다. 시인은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서 ‘뒷모습이...

    1191호2016.08.23 10:29

  • 여전히 반대말놀이

    김선우(1970~ )행복과 불행이 반대말인가남자와 여자가 반대말인가길다와 짧다가 반대말인가빛과 어둠양지와 음지가 반대말인가있음과 없음쾌락과 고통절망과 희망흰색과 검은색이 반대말인가반대말이 있다고 굳게 믿는 습성 때문에마음 밑바닥에 공포를 기르게 된 생물,진화가 가장 늦된 존재가 되어버린인간에게 가르쳐주렴 반대말이란 없다는 걸알고 있는 어린이들아 어른들에게다른 놀이를 좀 가르쳐주렴!‘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둘로 나누고 그 속에 갇혀 힘을 과시한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야 더없이 편안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둘로 나눌 수 있을까. 시인은 ‘여전히 반대말놀이’를 하느라 ‘진화가 가장 늦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은 ‘반대말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어린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반대말놀이...

    1190호2016.08.16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