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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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구부러진 길이 좋다

    이준관(1949~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구부러진 길을 가면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구불 구불 간다.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구불 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사람들은 점점 더 편하고 빠른 것을 좇는다.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더디고 불편한 것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시인은 여유를 갖고 세상을 천천히 둘러보자고 한다. 이는 구부러진 길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또 시인은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 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1209호2017.01.03 16:21

  • 즐거운 소음

    고영민(1968~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건물 전체가 울린다.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만들기 위해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일도 아니다.저 한밤중의 소음을나는 웃으면서 참는다.한밤중 어디선가 소음이 들릴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더욱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진다면 당장 민원을 넣을 것이다. 누군가의 무례한 행동을 봐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나 불편한가. 시인은 이 부분에서 낙관적이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고 한다. '건물'도 제 자리를 내주는 아량을 베푼다. 이모저모 팍팍한 연말연시라서인지 시인의 부드러운 마음이 돋보이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08호2016.12.27 14:54

  • 개 울음소리

    호인수(1950~ )개 울음소리는해무와 범벅이 된 어둠이 깊을수록별마저 삼켜버린 먹구름이 짙을수록더욱 드높다불면의 밤을 뒤척이는 사람아핏발 선 눈 부릅뜨고해변에 나가보아라어둠을 두려워 않고 끊임없이 돌진하는저 거대한 파도 더미의 위력을 보아라누가 막을 수 있으랴누가 장난감 같은 대포나 총 따위로저 울음소리를 그치게 할 수 있으랴끝끝내 어둠이 걷히고 먹구름이 걷히고동쪽 수평선 벌겋게 달아오르는 신새벽벌거숭이 계집아이 사내아이손잡고 해변으로 뛰어나올 때바다는 눈물을 훔치고양 떼가 되어 평화스럽게 누우리니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특위 청문회 중계방송을 보면서 속이 터진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어도 ‘탄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이유다. 시인은 ‘어둠을 두려워 않고 끊임없이 돌진하는 저 거대한 파도 더미의 위력을 보’라면서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끝끝내 어둠이 걷히고 먹구름이 걷히고 동쪽...

    1207호2016.12.19 17:54

  • 앵무새의 혀

    김명수(1945~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요즘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를 보면서 앵무새를 따라 하는 증인들을 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모른다’ ‘알 수 없다’ ‘사실이 아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죄책감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과 역사는 앵무새를 따라 하는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06호2016.12.13 16:34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1946~1994)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열이면 열 손잡고 가자천이라면 천 운명을 같이 하자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해 떨어져 어두운 길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산을 넘고 물을 건너언젠가는 가야 할 길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가시발길 하얀 길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제3차 대국민 담화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문제를 국회에 떠넘겼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잘못이 없다고 한다. 성난 민심에 또다시 기름을 부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

    1205호2016.12.06 18:43

  • 풀씨 하나

    백무산(1955~ )이렇게 작은 풀씨 하나가내 손에 들려 있다이 쬐그만 풀씨는 어디서 왔나무성하던 잎을 피우고환하던 꽃을 피우고마침내 자신의 몸 하나마저 비워버리고이것은 씨앗이 아니라작은 구멍이다이 텅 빈 구멍 하나에서어느 날 빅뱅이 시작된다150억년 전과 꼭같이꽃은 스스로 비운 곳에서 핀다이렇게 작은 구멍을 들여다본다하늘이 비치고수만리 굽어진 강물소리 들리고내 손에 내가 들려 있다‘풀씨 하나’는 ‘마침내 자신의 몸 하나마저 비워버’린 ‘작은 구멍’이다. 비워야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무성하던 잎’도 ‘환하던 꽃’도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씨앗이 된다. ‘꽃은 스스로 비운 곳에서 핀다.’ 비우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할까. 하지만 비우는 일이 쉬운 사람도 있고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고리탑탑한 내 중심 사고에서 ...

    1204호2016.11.29 11:10

  • 주름

    송경동(1967~ )문득, 주름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마흔 넘다보니 나도 참 많은 주름이 졌다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는골도 있다 왜 그랬을까?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첩첩한 고랑도 있다여름 볕처럼 쨍쨍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지만생은 수많은 슬픔과 아픔들이 접히는주름산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주름의 수만큼나는 패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많았고주름이 늘어버린 만큼 알아서 접은 그리움도 많았다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주름들이내 삶의 나이테였다 하나하나의 굴곡이때론 나를 키우는 굳건한 성장통, 더 넓게나를 밀어가는 물결무늬들이었다 주름이참 곱다라는 말뜻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수많은 아픔의 고랑과 슬픔의 이랑들을 모아어떤 사랑과 지혜의 밭을 일구는 것일 거라고혼자 생각해보는 것이다신들도 젊어지고 싶었다.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여신 이둔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젊음의 사과’를 ...

    1203호2016.11.22 17:37

  • 멸치

    김기택(1957~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이 작은 물결이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레오리오니가 쓴 <으뜸헤엄이>라는 글이 떠오릅니...

    1202호2016.11.15 17:00

  • 근심의 체험

    문태준(1970~ )은밀한 시간에근심은 여러 개 가운데 한 개의 근심을 끄집어내 들고나와 정면으로 마주앉네그것은 비곗덩어리처럼 물컹물컹하고긴 뱀처럼 징그럽고, 처음과 끝이 따로 움직이고큰 뿌리처럼 나의 신경계를 장악하네근심은 애초에 어머니의 것이었으나마흔해 전 나의 울음과 함께 물려받아어느덧 굳은살이 군데군데 생긴 나의 살갗처럼 굴더니아무도 없는 검은 밤에는오, 나를 입네, 조용히근심을 버리는 방법은 새로운 근심을 찾는 것빗방울, 흙, 바람, 잎사귀, 눈보라, 수건, 귀신도 어쩌질못하네‘최순실 게이트’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으로 인한 비리는 까도까도 끝이 없다. 상상하지 못한 일이 줄줄이 이어진다. 국민은 ‘대통령 박근혜의 마음’이 오랜 세월 어떻게 움직였는지 겪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거나 풀어주어야 할 사람인데 오히려 더해주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시인의 말처럼...

    1201호2016.11.08 19:19

  •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1960~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멀리 쑥꾹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어느 한쪽,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내겐 아직 멀고 먼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나’는 ...

    1200호2016.11.01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