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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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한 주
  • 전체 기사 121
  • 참 좋은 저녁이야

    유서를 쓰기 딱 좋은 저녁이야밤새워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꼬깃꼬깃 구겨서탱자나무 울타리에 픽 픽 던져버리고또 하루를 그을리는 굴뚝새처럼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처럼길고도 지루한 유서를담장 위로 높이 걸어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처럼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참 잘 썼어요,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이야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 유서를 쓴다면, 시인의 생은 한 편 시가 되고 소설가의 생은 한 편의 소설이 될까. 자신에게 상을 주는 마지막 저녁일까. 된장찌개 냄새가 유난히 구수한 저녁.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시로 여는 한 주’를 마칩니다.

    1299호2018.10.22 14:14

  • 도반(道伴)

    비는 오다 그치고가을이 나그네처럼 지나간다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누구에게서 문자도 한 통 없는 날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준다양파 접시 옆에 묵은 춘장을 앉혀놓고저나 나나 이만한 게 어디냐고무덤덤하게 마주 앉는다사랑하는 것들은 멀리 있고밥보다는 짜장면에 끌리는 날그래도 나에게는 내가 있어동네 중국집 데리고 가짜장면을 시켜준다깨달음의 길을 함께하는 동반자를 도반(道伴)이라 한다. 휘이 둘러봐도 함께할 이 없는 날은 내 반쪽이 길을 함께하는 도반(道半)이다. 슬몃 내가 나를 끌고 짜장면 집에도 가고 주머니 털어 탕수육도 시켜보면 어떨까. 내 도반을 위하여.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8호2018.10.15 14:16

  • 나쁜 짓들의 목록

    공광규(1960~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풀잎을 꺾은 일꽃을 딴 일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피해서 다닌 일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꽃의 마음을 모른 일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함부로 털어버린 일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계산하지 못한 일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일상으로 만나는 수많은 생명과 자연의 말들을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넌지시 말을 건네도 인간의 언어일 뿐. 어쩌면 가만히 밝은 눈으로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것이 알려고 하는 것보다 나을까. 마당 한편...

    1297호2018.10.08 15:38

  • 으름이 풍년

    쩍 벌어진 으름 씨는 새가 먹고굴러 떨어진 헛이름은 개가 먹고갓 벌어진 주름은 내가 먹고군침 흘리던해어름 먹구름은나와 개와 새를 으르며붉으락 붉으락 으름장을 펼쳐놓고아뿔싸 입에 쩍쩍 들러붙은가을게으름이라니!음 물큰한 처음졸음처럼 들척지근한 죽음음음 잘 익은 울음오랜 으름 다 먹었다해어름, 으름장, 게으름, 으름 열매 하나에 음음음… 으름씨처럼 이야기가 입에 달라붙어 들척지근하게 맴돈다. 새파랗던 으름이 가을 햇살에 하루하루 익었다. 누런 껍질 속의 새카만 씨는 어떤 이야깃거리가 되어 입 안을 맴돌까. 을러대지 않는 진솔한 대화가 한가위 달처럼 밝았으면 좋겠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6호2018.10.01 14:14

  • 가을 맨드라미

    1근본 한미한선비는 다만 적막할 따름이다이따금무료를 간 보느니2긴 여름내드높이 간두에 돋우었던 생각의 화염을속으로 속으로만 낮춰 끄고 있노니유배 나가듯병마에 구참(久參)들 하나둘 자리 뜨는텅 빈가을날맨드라미꽃을 계관화(鷄冠花)라고 하여 가문에 벼슬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뜻으로 마당에 많이 심었다. 그래봐야 닭볏이라, 이상과 현실이 다른 회한 속에서 하나둘 세상 떠나는 이들 소식에 붉은 맨드라미는 볕 좋은 가을날 유난히 더 붉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5호2018.09.17 14:22

  • 중력

    문제는 무게다.어떤 이에겐 구름도 무겁다.명자나무 꽃 위 부전나비는하늘을 들어 올린 채 날고 있다.혼잣말을 하며 가는 사람 뒤를 걸으며,나도 혼잣말을 한다.혼잣말이 나는 가장 무겁다.내가 나에게 말하고짓눌린 채한 번 대답도 못 했지.살다보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만 있다. 그런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것이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 최저는 가벼운 것일까, 최고는 무거운 것일까? 혼잣말을 하고는 대답할 수가 없다. 오늘 눅눅한 밤공기가 무거운 것인가?

    1294호2018.09.10 15:22

  • 저녁의 미래

    밤에 장미가 지는 것을 보고아름다운 편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저녁의 미래, 지구의 밤편지에는 시계가 없었지별 같아서언제나 과거에서 오는 별빛이어서과거 없이 미래만 반복되는 지구여그러길래 편지를 쓰던 우주의 빛이이젠 내 과거가 되어무한히 반복되는 저녁의 미래,장미가 지는 공간 안에서 편지를 쓸 수도 있었다어쩌면 저 별은우주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지만와 다오 와 다오 과거인 별들이여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링거병을 주렁주렁 달고서라도별들이여 먼 과거의 미래를네 눈 속에 안약처럼 날 넣어 다오머나먼 별의 빛은 머나먼 과거의 빛,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빛날 과거, 좋은 과거가 미래를 밝히는 세상, 좋은 과거를 만드는 오늘이 되기를 빌어본다. 행복한 옛 꿈 한 자락 청하는 별빛도 없는 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3호2018.09.03 14:28

  • 채송화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구두 한 짝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한주석을 달고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내 꽃밭에는 채송화꽃이 한창이다. 늦봄에 몇 그루 사다 심었는데 꽃밭 한쪽을 채웠다. 통통한 잎눈이 떨어져 번진 까닭이다. 지금은 올여름 무더위를 이겨내고 씨앗을 맺는 중이다. 쪼그리고 앉아야 만날 수 있는 꽃, 채송화는 잎겨드랑이에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야기 한 꼭지씩을 풀어낸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2호2018.08.27 14:48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아니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원이 없겠다.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엄마와 눈맞춤을 하고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숨겨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전기요금이 아까워 에어컨을 굳이 마다하시는 연로한 어르신이 안타까운 요즘, 한때 보일러 광고처럼 “부모님 댁에 에어컨 놔 드려야겠어요”가 머리에 맴맴거리고, 때늦은 후회로 가슴이 먹먹하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1호2018.08.20 14:37

  • 정자(亭子)3

    연못 속에 처박혀 구긴 정자에 들락거리며구름은, 집달리처럼 구름은다 불어 터진 서글픔들을 조금씩 꺼내다가노을도 만들고, 잠기면흩어진 별로도 만들고, 잠기면지나가는 불빛으로도 만들고, 잠기면모두 건져네 귀퉁이 주춧돌만 풀에 덮어놓을 것이다초인이 오기까지 돌들은 저희끼리 정다울 것이다입추가 지났다. 더위도 아침저녁으로 주춤대는 듯하다. 한동안 햇살에 고개도 들지 못하다 문득 구름도 보고 노을도 본다. 네 귀퉁이 풀에 덮인 주춧돌 놓인 정자에 앉아 더 시원한 바람을 기다리고 싶다.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

    1290호2018.08.13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