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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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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상여소리, 세상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
    상여소리, 세상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

    ‘뿌리깊은나무’가 제작한 , 이 음반에 수록된 진도 상여소리의 한 대목 ‘혼맞이 노래’. 김대례, 조공례, 박병천 등이 부르고 연주하는 이 노래만큼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이 어디 있으랴.임흥순 감독의 은 70년대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오늘의 구로 디지털밸리를 거쳐 동남아 여러 곳의 여성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 내용의 절실함과 애틋함은 두루 확인되었거니와 최근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나는 특히 그 형식에 집중해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는데, 이 95분짜리 다큐멘터리가 다른 장르가 아닌 국제 ‘미술’ 비엔날레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예술의 형식과 범위가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되고 겹쳐지는지를 시사한다.내가 주목한 것은 이 작품 군데군데에 펼쳐지는 제의적인 장치들, 조금은 분명하게 말하자면 샤머니즘적인 연출이다. 박찬욱/박찬경의 프로젝트 팀 ‘파킹찬스’가 만든 서울시 다큐멘터리 의 장중한 도입부도 한강을...

    1235호2017.07.11 09:57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왜 유독 모차르트만 ‘신동’이라고 불렸을까
    왜 유독 모차르트만 ‘신동’이라고 불렸을까

    중세 암흑기에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형태를 ‘마귀 들린 일’로 치부했다. 마녀사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관념은 어린이에게도 강력하게 적용되었는데, 이를테면 심한 병을 앓거나 식탐이 많거나 신체가 기형인 어린이는 ‘마귀의 자식’으로 치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족 공동체는 약간이나마 책임을 모면한다. 마을 공동체에도 문제가 없고 가족도 책임이 없다. 다만 아이가 마귀에 들린 것이다. 그런 아이를 ‘체인질링’이라고 했다.그 ‘체인질링’ 중에는 신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동, 그러니까 천재 중의 천재인 아이 말이다. 중세 암흑기만 해도 신동은 마귀의 자식, 즉 마귀가 착하고 예쁜 아이를 몰래 데려가고 그 대신 남겨놓고 간 괴상한 아이였다.이렇게 신동은 종교적인 권능이나 위계가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서는 어린아이다. ‘정상성’을 벗어난 신동의 비범한 능력은 기존의 종교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기존의 체제를 위협할 ...

    1234호2017.07.03 17:05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구슬픈 ‘새타령’ 흥겨운 변신, 그것이 더 슬프다
    구슬픈 ‘새타령’ 흥겨운 변신, 그것이 더 슬프다

    모든 ‘새타령’을 들어보면, 이토록 구슬픈 소리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남한의 트로트나 북한의 신민요나 오늘날의 ‘퓨전국악’에서 ‘새타령’이 흥겹고 즐거운 노래로 ‘편곡’된 까닭은?지난주 이 지면에서 초등학교 시절 배운 동요 이야기를 했다. 시골에서 갓 서울로 전학와서는 너무나 맑고 고운 동요들을 갑자기 배우며 노래 부르던 때의 당혹스러웠던 기억을 썼는데 그 중 하나가 ‘고향땅’이다. “아카시아 흰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이렇게 끝나는 노래다.지금 와 다시 회고해보니, 아카시아 흰꽃이나 뻐꾹새 소리가 이토록 맑고 곱게 불리는 게 의아하다. 그 흰꽃이 바람에 날리면 비릿한 내음이 났다. 숲속에서 들려오던 뻐꾹새 소리도 기괴했다.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백과’를 보면, 뻐꾹새 즉 뻐꾸기는 슬픈 울음을 낸다. 시어머니가 잔칫집에 가서 떡국을 얻어 와서는 아들이 오면 꼭 먹이라고 신...

    1233호2017.06.26 18:38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히틀러에게는 칼 오르프가 있었다
    히틀러에게는 칼 오르프가 있었다

    바이에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오르프의 대표작이 ‘카르미나 부라나’가 포함된 칸타타 (3부작)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건강한 남녀들이 영웅적 행동을 하는 이 작품은 히틀러의 문화정책과 미학적으로 결합되었다.한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유럽 문화가 처한 상황에 대해 ‘중심의 상실’이라고 표현했다. 2차 대전 전후는 가히 모든 중심이 상실된 시대였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제들마이어의 낭만적(혹은 고전회귀의) 향수는 두 차례의 대전으로 괴멸했다.1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학도지원병 파울 보이머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서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가는 참상을 지켜본다.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레마르크의 소설 의 파울 보이머는 결코 ‘신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참혹한 소년병이었다. 화가 오토 딕스는 바로 이 서부전선에 투입된 병사였다. 1914년 8월에 한 차례 징집된 바 있고, 이듬해 9월에는 자원해서 서부전선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가 ...

    1232호2017.06.19 17:43

  • 명동성당에서 다함께 부른 ‘아침이슬’

    시청앞 광장에서, 종로에서, 명동성당에서 그 노래 ‘아침이슬’을 숱하게 불렀다. 그때의 일이 선명하다. 6월 10일을 전후로 대도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고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의 성지이자 농성장이 되었다.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 무슨 까닭인지 모를 한 달가량의 어정쩡한 공백을 거친 후, 4월 즈음에 미아리의 꽤 근사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지 며칠이 되지 않은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요즘도 어떤 자리에서 누가 노래라도 시키면 주눅부터 드는 약한 트라우마를 나는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약간의 사연이 있다.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음악시간에 담임선생님은 급우들 모두에게 합창을 지도했다. 난생 처음 듣는 노래들이었다. 계명도 모르고 가사도 몰랐다. 나는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벙긋했다. 삼월 삼짇날 전만 해도 경북 순흥 산골짜기에서 책보에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가던 시골아이가 청명 한식을 지나 대도시의...

    1231호2017.06.12 17:43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장엄하고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브루크너
    장엄하고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브루크너

    수많은 교재나 인터넷 검색 사이트와 블로그에 적혀 있듯이, 브루크너는 그저 ‘신앙심 깊은 종교음악가’로 축소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진짜 그때부터는 브루크너가 더없이 경건한, 그러나 한없이 지루한 음악가가 되고 만다.음악 애호가들이 쓰는 말 중에 ‘BMW’라는 표현이 있다. 독일의 유명한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고, 브루크너와 말러, 그리고 바그너라는 19세기 말 중부유럽의 거대한 산맥, 그 최정상 봉우리들의 머릿글자다.모름지기 음악을 좀 들었다 하면 BMW라는 거봉은 넘었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일종의 호연지기인데,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수능이나 토플 같은 시험이 아니어서, 꼭 이 세 작곡가를 섭렵해야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심오한 고수들 중에는 바흐의 건반음악에 늘 전율을 느낀다는 사람이 있기도 해서, BMW가 어떤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마음 먹고 도전해볼 만한 거봉임에는 틀림없다.브루크너는 자신의 음악사상과 형식에 깊은 ...

    1230호2017.06.05 17:04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조용필의 탁성으로 듣는 ‘서울 서울 서울’
    조용필의 탁성으로 듣는 ‘서울 서울 서울’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 흐르면 희한하게도 장병들의 몸짓은 달라졌다. 집단으로 펼쳐내는 동작도 ‘손에 손잡고’와는 달랐다. 장병들의 동작은 마치 클럽에 놀러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웠다.조용필의 노래 ‘서울 서울 서울’을 몇 번이고 듣고 또 들었다. 나는 이 노래의 전체 진행, 즉 단지 가사만이 아니라 대단한 기량의 외국인 연주자들이 가세한 이 곡의 세부적인 디테일까지 다 알고 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 때문에 까짓 그 정도를 기억하는 게 무슨 자랑이냐 이렇게 핀잔을 줄 독자들도 있을텐데, 좀 더 얘기를 들어보기 바란다.이 곡이 크게 히트할 무렵은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신드롬에 몰입되어 있던 시기였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특정한 이벤트에 이 정도로 사회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일은 달리 없었다.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는데, 서울 근교에 위치한 부대라서 대규모 행사의 온갖 일들에 차출되고 동원되었다. 우리 부대는 최소한의 영내 관리 사병을 제외하...

    1229호2017.05.29 18:51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5·18, 작은 기쁨과의 우연한 만남
    5·18, 작은 기쁨과의 우연한 만남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인색해서는 안됩니다.”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그럭저럭 안정되고 이만하면 살 만한 게 아닌가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자기가 딛고 있는 일상의 발판이 얇은 살얼음판이었음을, 그리하여 대번에 그 얇은 얼음이 깨지고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냉혹하리만치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잔인하다.얼핏 보면 그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도 소소해서, 아침에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고, 점심 때 맛없는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어먹고, 저녁 때 푹 꺼진 소파에 몸을 파묻고 토크쇼나 보고 있는, 그런 현대의 지루한 나날에 불과하다. 그런데 느리게 찍힌 지루한 필름 같은 그 소설 안에는 저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상가가 묵시록적인 예언으로 다루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찰과상, 그 상처, 그로 ...

    1228호2017.05.22 16:39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이른바 ‘황금 연휴’를 일부러 남도의 끝 목포까지 내려와서 추모하러 온 수많은 얼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수습자와 어느덧 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별이 된 수많은 얼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누구도 예외없이 울고 있었다.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얼굴’이란 노래의 가사다. 윤연선이 1975년에 부른 노래다. 이 노래를, 4월에 들었고 또 5월에 들었는데, 그때마다 조금 울었다. 왜? 먼 옛날 얼굴이 동그란 애인이라도 있었고 그리하여 이 봄날에 ‘얼굴’을 듣고는, 그 동그랗던 얼굴이 떠올랐는가. 그렇지는 않다. 더러 한두 사람의 얼굴이 그러하였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다 잊었다. 그렇다면 왜? 그저 봄기운이라고 할까. 한 번은 그랬고, 또 한 번은 꼭 그런 것은 아니다.4월 초, 남양주 어딘가로 MT를 간 일이 있다. 재직하는 ...

    1227호2017.05.15 18:38

  •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을 기억하기 위하여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을 기억하기 위하여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는 이 녹음에서 콘드라신은, 비록 남성 베이스와 합창단들이지만, 전쟁의 비열함과 그것을 결정하고 주도한 자들의 광기를 머리칼이 곤두서도록 연주한다.무서운, 아주 무서운 소설을 읽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 진실로 무서운,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는, 한 문장 안에 불과 얼음이 뒤섞여 있고, 한 문단 안에 극단의 치욕과 실낱같은 웃음이 배어 있고, 한 편의 이야기마다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무서운 소설이다.모든 사물과 인간과 가치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전쟁. 그 잔인한 세계를 여성 서사로 힘겹게 재현해낸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스타니슬라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아버지가 벨라루스의 군인이었다. 알렉시예비치는 아버지가 퇴역을 하면서 벨라루스의 작은 마을로 귀향하여 살게 되면서 벨라루스 사람이 되었다. 벨라루스국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였고, 그 정규 학과를 공부하기 전이나 ...

    1226호2017.05.08 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