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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
  • 전체 기사 41
  • [현대사 아리랑]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 “이재유(李載裕) 동지.1930년 함경도 삼수(三水)에서 출생하여 공부하러 도일하여 연수학관에서 1년간 수학하다. 그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재일본노총위원이 되었으며 또 일본총국 당원이었다. 1928년 일본당 사건으로 피검되어 3년 징역을 받았다. 그후 귀국하여 노동농민운동에 헌신하여 망명생활로서 잠행운동을 계속하다. 동무는 두뇌가 명석하여 이론이 밝고 학구적인 동시에 실제적이었다. 그리고 동지의 민활하고 대담무쌍한 활동은 당시 적으로 하여금 분주불가하게 하였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잘 아는 것이다. 1936년 12월에 피검되어서 서대문감옥에 있으며 항상 공산주의자로 시종하였다. 동무는 옥중에 있어서도 공산당 지부를 조직하여 동포수를 위한 투쟁(과) 동지들의 교양사업 간수에 대한 혁명사상 고취 등을 볼 때 그 열렬한 투지를 알 수 있으며 더욱 조선어사용금지 반대투쟁이라든지 또는 공주형무소 이감 당시에도 일반 수인의 대우 개선 항쟁을...

    802호2008.12.02 00:00

  • [현대사 아리랑]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

    약관의 스물, 독립운동계 맹장으로‘김단야(金丹冶·경북 김천 출생·46세)씨.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920년에 체포되어 2년 형을 마치고, 동 25년에 조선공청을 조직하여 동 간부가 되었으며 동년에 제1차공산당 관계로 모스크바에 망명하여 레닌대학에 입학, 동 28년에 동교를 졸업하고, 동 29년에 국제당의 사명을 받아 조공재건 운동으로 귀국하였다가 발각되어 다시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던 바, 동년에 다시 국제당 원동부(遠東部)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공재건 운동에 활동하였으며, 기후(其後)는 금일까지 해외에서 활약을 계속 중이라고 한다. 조선의 편산잠(片山潛)이라 하여 어떠할까. 씨는 박헌영씨와 막상막하의 공산당 지도자이다. 그 명민(明敏)과 열을 보아서 신철(辛鐵)씨와 함께 공산당의 명물의 일인으로 굴지(屈指)하여야 될 것이다.’17세 때 동맹휴학 주동, 퇴학당해1945년 12월 25일 나온 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문이다. 다음은 19...

    801호2008.11.25 00:00

  • [현대사 아리랑]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하)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하)

    항일투쟁사 ‘3김 장군’으로 불리다“대한 사람 대한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나는 이런 소위 국가를 들을 때마다 의분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잘 보호해서 우리 삼천만이 40년의 노예생활을 하였더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오직 나의 팔과 다리 그리고 삼천만 합심협력 일치단결뿐이다. 독립을 위하여서는 하나밖에 안 남은 한쪽 다리마저 서슴지 않고 바칠 결심이다. 저 압록강 건너 만주벌판에는 우리 인민의 군대 8만 조선의용군이 한때도 쉬지 않고 총을 닦고 칼을 갈며 3000리 국토를 노리고 있다. 조선의 인민을 또다시 신식 노예의 구렁텅이로 집어 넣으려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리고 그들을 덮고 있는 극악반동분자들의 날개를 쳐부수려고 시기 도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8만 의용군은 건재, 호가장 전투의 용사 김학철씨 담’ 1946년 3월 19일치에 실려 있는 김학철 말이다. 말 밑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감상...

    800호2008.11.18 00:00

  • [현대사 아리랑]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상)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상)

    조선의용군 8만명 종로행진 계획“동무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릴 것은 금년에 있어서 우리가 응당 하여야 할 생산공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작년에 생산공장에 참가하여 본 여러 동무들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우리는 재작년 봄에 이 태항산 청천(淸泉) 저 비탈에 화전을 이루고 600묘나 되는 땅에 붉은 무와 감자 호박을 심고 가을에 도라지를 캐고 도토리를 주었던 연고로 우리는 양식과 채소 등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 좋은 양복에 훌륭한 구두를 받쳐 신고 맛나는 음식에 호화한 생활을 지내던 동무들은 이제 와서는 이와 같이 몸에 이가 꾀고 헌옷을 입고 버선 없는 맨발 초신에 춥고 발시리며 배가 고픈 이 생활로 적을 대항하는 외에 화전농업까지 하느라고 두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아프게 되니 한숨이 자연히 계속하여 나오면서 마치 그 고생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고 그 생활을 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나 표현으로 되는...

    799호2008.11.11 00:00

  • [현대사 아리랑]‘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여류혁명가 김명시
    ‘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여류혁명가 김명시

    광막한 만주벌판 말달리던 ‘여장군’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이런 겸사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민주과업이 착란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는 오늘의 남조선을 통분히 여겨 마지 않는 여사로서는 앞만을 바라보는 타는 듯한 정열이 오히려 지난 일을 이렇게 과소평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콤뮤니스트’ 등 비밀 기관지 발행“1925년에 공산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7년도에 파견되어 상해로 와 보니 장개석씨의 쿠데타가 벌어져서 거리마다 공산주의자의 시체가 누웠더군요. 거기서 대만 중국 일본 비율빈 몽고 안남 인도 등 각국 사람들이 ...

    798호2008.11.04 00:00

  • [현대사 아리랑]의열단 의백 김원봉 ②
    의열단 의백 김원봉 ②

    북으로 간 약산, 국가검열상 되다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다. 중국 정치 중심지인 북경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내세우는 외교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조선인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황상규 검거되자 약산이 ‘의백’ 맡아의열단이 거행한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일명 ‘밀양폭파사건’이다. 하지만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수득, 한봉근, 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운동자 검거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金泰錫) 경부와 그 부하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검거된 ‘암살 파괴의 대음모 사건’ 주범으로 지목받은 곽재기는 8년 만기를 채웠고, 이성우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된 것은 1928년 3월 8일이다. 이 사건으로 황상규,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약...

    797호2008.10.28 00:00

  • [현대사 아리랑] 의열단 의백 김원봉 ①
    의열단 의백 김원봉 ①

    암살대상자 ‘칠가살’ 명단 작성하다“아무래도 여기를 떠야 할 것 같구려.”“뜨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인민공화당 당직자들을 바라보던 김원봉 당수는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오.”“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장택상 “김원봉 반드시 잡아오라” 1947년 4월 9일. 며칠 전 미군정이 군정포고령 위반을 하였다며 압류하였다가 풀어준 인민공화당 사무실이었다. 조국 광복의 큰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하였던 22살 때부터 해방을 맞아 귀국한 48살까지 26년 동안 강도 일제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창피였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

    796호2008.10.21 00:00

  • [현대사 아리랑]‘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③
    ‘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③

    박헌영과 쌍벽 이룬 조선의 혁명가몽양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수많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니, 큰 것만 골라도 12번이다. 민족사의 큰 별이 떨어진 비극의 그날 하오 1시.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경찰관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몽양 차를 가로막았고, 급하게 멈출 수밖에 없는 차 속에서 몽양과 신변보호인 박성복(朴性復) 그리고 ‘독립신보’ 주필로 건준 간부였던 고경흠(高景欽)과 운전수가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두 발 총소리가 나면서 몽양은 풀썩 쓰러졌다. 한지근(韓智根)이라는 모진 놈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던 것이다. 이기형옹의 회상이다. “일본 옷 하까마를 입고 불상을 차려놓고 아이들과 일본말을 주고받는 춘원 이광수를 보고 노여워 하였고,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나올 때는 그의 높은 절개에 경복함과 동시에 가난과 병중에 있는 그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몽양을 만나...

    795호2008.10.14 00:00

  • [현대사 아리랑]‘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①
    ‘세계사적 개인’이었던 민주주의자 여운형 ①

    22세에 스스로 노비 해방시키다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두물머리 거쳐 양서면 신원리로 갔는데, 묘꼴이었다. 몽양(夢陽) 선생 생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원역 굴다리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고, 어욱새 더욱새 덕갈나무 메마른 가랑잎만 소소리 바람 뒤섞이어 으르렁 스르렁 슬피 우는 몽양 생가 터무니에서 영산마지(담배)만 죽이는데, 저만치 꺼무한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을밋을밋 가보니 빗돌이었다. 해포 앞서 세운 ‘몽양고택유허비’였는데, ‘양평애향동지회’라고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그런데 얄망궂은 것이 빗돌을 세운 사람들 이름도 없고 빗글을 짓고 쓴 사람 이름도 없다. 얼키설키한 몽양 선생 항일투쟁 발자취를 성글게 추려놓은 빗글 끝에 달랑 ‘이기형’이라고만 훈민정음으로 새기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기형(李基炯)이라면 ‘몽양 여운형’이라는 평전을 낸 극노인이다. 25년 전이고, 올해 92살. 8·15 바로 뒤 신문기자를 하여 해방공간 속내를 어지간히 알고 계신 분이다. ‘몽양...

    794호2008.10.07 00:00

  • [현대사 아리랑]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②
    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②

    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위로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

    793호2008.09.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