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냉소주의, 방어적 이기심이 팽배해진 각자도생의 사회인 줄 알았는데, 우리 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통된 ‘옹이’가 있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기에.”
2025년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새해, 새로운 출발이 절실한 때이다. 격난의 지난해, 그 그림자가 아직도 길게 드리워 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사상 최초, 초유,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사실 새로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온 모든 일에 데자뷔 같은 기억이 서린다.
계엄령, 내란과 같이 이제는 박제된 문자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단어들이 현실이 되어 떠다니는 상황이 얼얼하기는 하지만 교과서로, 책으로, 드라마로, 최근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어이없는 군사반란의 날이 그후 우리의 현대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한을 베고 살아가게 된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알기에, 회한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시민들은 망설임 없이 응원봉을 휘두르며 두더지 잡기에 나섰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도 그렇다. 끔찍해 마음을 바로 세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세월호를, 이태원을 기억에 새기고 있기에 정신을 바짝 차린다. 뉴스에서 세월호 사고 현장을 보며 곧 사람들이 구출돼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몇 시간여 만에 예상치 못한 참담한 소식이 전해졌고, 우리는 망연자실하며 무너졌던 그날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후 예우와 진상규명을 바라는 유족들이 어떤 모욕을 받고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고 있기에 우리는 한쪽에 빚진 마음을 안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시민들은 이렇게 공통된 기억, 그리고 불안과 슬픔, 죄책감 등이 뒤엉킨 복합적인 감정과 상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웃의 삶과 나의 삶을 잠식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개인으로 파편화돼 무관심한 사회 같기도 하다가, 위기 앞에 뭉친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만 통과되면, 이후 과정은 헌법이 정한 절차와 제도에 맡기면 될 줄 알았더니, 상상치 못한 상황 전개로 결국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에 이르렀다. 앞으로 탄핵 심판과 대선까지 어떤 고비와 사건들이 이어질지 안개 속이며, 이와 같은 불안정한 정국은 경제와 국제사회의 신뢰를 위협할 것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아직도 온전히 유족들의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상규명과 보상,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한 사후 대책 수립까지 우리는 또 먼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함께 넘어서느냐가 이후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가르게 될지 알고 있기에 숨 고르기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정치 냉소주의, 방어적 이기심이 팽배해진 각자도생의 사회인 줄 알았는데, 우리 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통된 ‘옹이’가 있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기에.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