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외우기는 좋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던 이날이 이제 역사에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주간경향과 경향신문은 ‘12·3 비상계엄 사태’란 통칭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대통령 담화가 화면에 갑자기 등장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과격한 언사로 국회를 비난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몰랐습니다. ‘비상계엄 선포’란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계엄’과 다른 의미로 쓰는 계엄이란 용어가 있나.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계엄, 국가 비상사태에 군이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는 그 계엄이 맞았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불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지 자려고 방에 들어갔던 아이가 나왔습니다. 아이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평소에는 아이가 뉴스를 보다가 질문하면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비상계엄을 선포했는지 저부터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이 너무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다시 자라”고 아이의 등을 밀었습니다.
저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아닙니다. 성인이 된 뒤 책과 드라마, 영화 등을 보고 배웠을 뿐입니다. 그러니 ‘광주의 트라우마’가 제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알았습니다. 광주의 기억이, 군사정권에 대한 공포가 제게도 남아 있다는 것을.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는 상황이 방송과 유튜브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됐습니다.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제발 군이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다행히 군은 총과 칼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밀어내면 밀려났고, 보좌진이 소화기를 뿌리고 저항하면 물러났습니다. 군인을 무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제복 입은 시민’으로 대우하고, 교육하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고는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세력이 쳤지만 이를 감당하고 수습해야 하는 것은 한국사회 전체의 몫이 됐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는 ‘비상계엄 선포 그 이후’를 총체적으로 전망합니다. 윤 대통령은 그간 열릴 듯 말 듯 하던 ‘탄핵의 문’을 스스로 활짝 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본인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우선 그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윤 대통령과 일부 세력의 결정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런 초법적 사태를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계엄에 관한 법 조항을 살펴보고 전문가들에게 보완책을 물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계엄리스크’까지 떠안은 한국 경제의 상황도 짚어봅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