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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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

명령자는 왜 저항자들을 처벌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노다 마사아키는 명령자, 즉 처벌하는 자가 개인으로 부각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학살에 참여한 병사들이 얼마나 자발적이었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학살에 참여하지 않은 병사들의 자발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같은 조건에서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처벌 때문에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전범들의 항변을 궁색하게 한다.

명령자는 명령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자는 실행자의 책임이 있다. 황당무계한 명령의 복종자로 선택된 것, 실제로 그 명령에 복종한 것,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 것. 나는 그날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을 보았다.

명령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인간적 곤란함을 주는 명령을 내려야 할 경우 명령자가 첫 번째 고려하는 일은 누가 이 일을 거부하지 않고 따를 것인가이다. 홀로코스트가 매끄럽게 수행됐던 것처럼 보였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인간적인’ 복종자 선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령을 거부했던 군인들은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동료 병사들로부터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조롱한 병사와 조롱받은 병사. 누가 겁쟁이였을까?

지난 12월 3일 밤, 대한민국 최정예 특수부대 707특임대가 헬기를 타고 국회에 나타났다. 계엄군은 항의하는 시민에게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어정쩡했던 계엄군의 행동이 미담으로 그려진다. 글쎄. 그들의 실탄은 상황에 따라 발사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장한 군인들을 국회의사당으로 보낸 명령자와 가란다고 정말 거기 가서 창문을 부수고 침입한 군인들. 명령자는 명령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자는 실행자의 책임이 있다. 황당무계한 명령의 복종자로 선택된 것, 실제로 그 명령에 복종한 것,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 것. 나는 그날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을 보았다.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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