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전환, 여주 구양리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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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영 변호사

지현영 변호사

최근 경기 여주시 구양리로 답사객들이 몰리고 있다. 혹자는 농촌 마을이 고급실버타운으로 변모한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 비결은 마을 공유시설을 활용해 주민 중심으로 만든 1㎿급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이다. 여기서 나오는 월 1000만원의 수익이 주민들의 발이 되는 마을행복버스로, 공짜 식사를 할 수 있는 마을식당으로, 황금알을 척척 낳았다.

2023년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30%를 넘어섰다. 2050년 이 비중은 56%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가장 손쉽고 우선적인 수단인 재생에너지 확대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더디다. 2023년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5%에 불과하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많은 사람이 재생에너지의 효용을 충분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탓도 크다. 그동안 농촌사회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설비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주민과 외지인 간의 갈등이 첨예해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도 만연하기에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면적의 국토에서 에너지전환이 이뤄지려면, 구양리와 같은 좋은 사례들이 절실하다.

경기 여주시 구양리는 마을 공유시설을 활용해 주민 중심으로 만든 1㎿급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월 1000만원의 수익이 주민들의 발이 되는 마을행복버스로, 공짜 식사를 할 수 있는 마을식당으로, 황금알을 척척 낳았다.

재생에너지로 농촌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해소해 보고자 2017년부터 논의된 것이 영농형 태양광이다. 영농형 태양광이란 농지에 농업을 지속하되, 작물 위쪽으로 태양광발전설비를 설치해 농업과 발전을 병행하는 형태다. 이는 여전히 농지를 농사 목적으로 쓰면서 적은 농가 소득을 보완할 방안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채 실증사업만 추진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아무리 영농을 병행할 수 있다 해도 그만큼 농촌사회에서 태양광 시설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4~5년간 마을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영농형 태양광을 학습하고 험난한 인허가 절차까지 뚫어 3㎿ 규모의 영농형 태양광 시설을 설치할 준비를 마친 마을이 있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월평마을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삽을 뜨나 했는데, 한전으로부터 전력 계통을 확보할 수 없어 더 이상의 진행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아 사업이 무기한 연기됐다. 즉 전기를 만들어도 보낼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 9월 1일부터 전력 계통 접속을 제한한다는 방침을 정함에 따라 호남지역의 경우 2031년 12월까지 발전 허가가 중단된 것이다. 태양광발전이 가장 많이 늘었지만, 외지인들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전남지역에서 인식을 반전시킬 절호의 사례 하나가 사장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가장 쉬운 길도 이렇게 가로막힌다면, 우리나라의 2050 탄소중립 목표는 더욱 요원하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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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