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백악관 전투 장면 연출은 훌륭하다. 전쟁을 주제로 한 많은 영화가 있는데, 현대전의 ‘리얼리티’는 대부분 영화 속 묘사와 사뭇 다르다. 어이없으면서도 비현실적인 비극이다.
제목: 시빌 워: 분열의 시대(Civil War)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09분
장르: 액션, 전쟁, 드라마
감독: 알렉스 가랜드
배우: 커스틴 던스트, 케일리 스패니, 와그너 모라, 스티븐 헨더슨, 제시 플레먼스, 닉 오퍼맨
개봉: 12월 3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배급: ㈜마인드마크
공동제공: 콘텐츠웨이브, ㈜하이스트레인저
무장 민병대가 총을 겨누며 “당신들은 어느 쪽 미국인이지?”라고 물었을 때, 극장 관객석에서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마 영화에 몰입해서겠지만. 시사회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잘 만든 영화란 방증이다.
지난 10월쯤, 서울 용산 CGV 내부에 거대한 광고판이 붙어 있었는데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수입사에 문의하니 “개봉 시기는 검토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수입사가 예상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개봉 타이밍은 잘 잡았다. 세상에나, 느닷없이 한밤중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가 일으킨 ‘내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대국민’ 긴급 담화를 자청한 대통령은 국민이 아니라 이제 10% 남짓에 불과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향해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선동하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에 맞춘 한국 개봉 시점
영화가 다루는 건 근미래의 미국이다. 어쩌다 미국이 내전(civil war·보통은 1861년에서 1865년까지 벌어졌던 남북전쟁을 지칭하는 말이다)의 구렁텅이에 빠졌는지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종군기자들의 대화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게 된 경위가 언급될 뿐이다.
영화는 미국 대통령이 “승전은 코앞에 와 있다”라는 연설을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종군기자들의 대화 속 정보를 종합하면 이 대통령은 3선을 했는데, 시민에게 공중폭격을 하라고 명령 내린 폭군이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연합해 반기를 들어 서부 연합군(WF)을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내건 깃발과 어깨에 붙이는 견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0개 주가 별로 표시된 미국 성조기에서 두 개의 별만 남아 있다. 그냥 소총이나 IED(임의조제 폭발물)로 무장한 비정규군이 아니다. 서부 연합군도 최신 전투기, 공격용 헬리콥터나 탱크, 장갑차를 갖춘 정규군이다. 그러니까 미군도 둘로 쪼개진 것이다. 앞서 미국 대통령은 “승전이 코앞에 와 있다”고 TV 생중계 연설에서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패배 직전이었다.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베테랑 종군사진기자 리(커스틴 던스트 분)와 동료 조엘(와그너 모라 분)은 워싱턴으로 가서 패전을 앞둔 대통령을 인터뷰하려 한다. 워싱턴에 가기 위해서는 서부 연합군과 정부군의 치열한 교전 현장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은 픽업트럭으로 전장을 우회해 시골길로 워싱턴으로 향하는 계획을 세운다. 여행엔 이들이 인생의 멘토로 존경하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새미와 리처럼 유명 사진기자가 되고 싶은 신출내기 제시도 참여한다.
그런데 우회하는 시골길이라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이들이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인 끔찍한 악몽 같은 참상이다.
종군기자라는 직업적 숙명
영화는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었다. 앞서 가랜드 감독은 전작 <멘>(2022)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독립영화 배급사로 유명한 A24는 지금까지 제작한 영화 중 가장 많은 돈(5000만달러)을 투자했다고 한다. 나름 블록버스터급 영화인데 카메라의 앵글을 전선을 따라가는 종군기자들의 동선으로 좁혀 비용을 아꼈다.
연출도 돋보인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백악관 전투 장면 연출은 정말 훌륭하다. 전쟁을 주제로 한 많은 영화가 있는데 현대전의 ‘리얼리티’는 대부분 영화 속 묘사와 사뭇 다르다. 어이없으면서도 비현실적인 비극이다. 끝내 마지막 백악관 전투의 목격자가 된 조엘의 ‘대통령 최후 인터뷰’도 여러 각도에서 곱씹을 대목이 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지만, 숙명처럼 그것을 기록해야 하는 종군기자의 일에 대해서도.
전쟁기록 사진 대표작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 논란
영화에서 리를 닮고 싶어하는 23세의 신출내기 사진기자 제시는 디지털 대신 필름카메라를 고집한다. 그것도 흑백 사진으로. 제시의 재능을 알아본 리는 수십 년 넘게 전장을 누빈 자신의 경험을 전수한다. 종군사진기자는 비극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냉정한 기록자로 남아야 하는 걸까. 제시는 리에게 묻는다. “내가 사진을 찍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 순간도 사진을 찍을 건가요.” 그는 대답을 얼버무린다. 영화 중반의 이 문답 장면은 영화의 끝이자 절정부인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워싱턴에 들어가기 전 서부 연합군 기지에서 리는 평생 멘토로 삼았던 언론계 선배 새미의 시신 사진을 삭제한다. 그가 지켜왔던 직업 윤리상으론 그것 역시 피사체의 존엄을 세상에 남기는 기록 행위였다. 그러나 가장 가까웠던 이의 죽음으로 리의 냉철함은 흔들린다.
영화의 주요 전투 장면마다 스틸컷으로 제시가 찍은 사진이 나온다. 현장의 절박감과 고통, 죽음의 공포가 잘 표현된 사진들이다. 영화를 보며 떠오른 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려 잘 알려진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사진)다. 사진에 얽힌 사연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라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 24세 남자다. 카파가 1936년 9월 5일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세로 무리아노 지역 전투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워낙 유명한 사진이다 보니 여러 이설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 보렐은 죽지 않았다는 주장부터 카파의 설명과 달리 사진이 찍힌 장소는 세로 무리아노 지역에서 남쪽으로 50㎞ 이상 떨어진 에스페호라는 지역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설까지. 1954년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폭사한 카파는 생전에 자신의 이 대표작에 대해 말을 아꼈다. 보렐이 카파를 위해서 자세를 취하다 저격당해 죽었기 때문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고, 실제 그 사진은 자신의 조수로 활약하다 일찍 사망한 여성 전쟁 사진작가 게르다 타로가 찍은 것이기 때문에 카파가 그 사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 말을 아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