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로우-반영웅 서사의 은밀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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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신체 훼손을 당하면 치유되기 전까지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1994년의 진짜 ‘천하무적’ 에릭보다는 조금 더 진화했다. 만듦새가 나쁜 영화는 아니다. 반영웅 서사를 담은 영화들은 주인공에 맞서 싸우는 악당들조차 묘하게 끌리는 은밀한 매력이 있다.

/판씨네마㈜

/판씨네마㈜

제목: 더 크로우(The Crow)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미국, 영국, 프랑스, 체코

상영시간: 111분

장르: 액션, 판타지

감독: 루퍼트 샌더스

출연: 빌 스카스가드, FKA 트위그스, 대니 휴스톤, 라우라 비른

개봉: 2024년 12월 11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수입/배급: 판씨네마㈜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 주연작이자 유작(遺作)인 <크로우>(알렉스 프로야스 감독·1994)는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다. 세기말을 앞둔 광기 같은 분위기가 녹아 있는 영화라고 할까.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불사신으로 부활한 주인공이 자신과 자신의 연인을 죽인 악당들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한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악당들은 그의 아버지 이소룡이 <사망유희>(1978)에서 사망 탑의 한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그랬듯이 갈수록 더 강해진다.

만화 원작 <크로우> 시리즈의 리부트

루퍼트 샌더스 감독의 <더 크로우>(2024)는 1994년작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리부트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영화다. 두 영화 모두 미국 그래픽 노블 작가 제임스 오바르의 만화 시리즈 <크로우>(1989)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94년작은 주인공이 겪었던 불행한 사연은 과감히 생략하고, 사건 1년 뒤 무덤에서 록그룹 기타리스트 출신의 에릭이 부활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이번 리부트는 그보다 훨씬 전개가 느리다. 주인공 에릭의 상징은 피에로 처럼 흰색으로 칠한 얼굴과 짙은 검은색 마스카라인데, 이번 영화에서 에릭이 그 ‘상징’을 얻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이 넘어서다.

에릭은 어린 시절부터 ‘왕따’였다. 마약중독 혹은 정신병 재활원에서도 왕따인 것은 마찬가지다. 에릭 앞에 어느 날 셸리란 여성이 나타난다. 셸리는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 일부러 경찰에 붙들려 재활원에 들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죽이려는 어떤 집단을 피해 숨은 것이다. 재활원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어느 날, 자신을 죽이려는 집단이 재활원에 찾아오자 셸리는 당황한다. 에릭은 셸리의 탈출을 돕는다. 돕는 김에 자신도 함께 밖으로 탈출한다. 두 사람은 비어 있던 셸리 친구 집에 숨어 동거하며 사랑에 빠진다. 행복한 날은 오래갈 수 없다. 추적의 올가미가 좁혀진다. 악당들은 결국 두 사람을 잡아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워 죽이려 한다.

에릭이 눈을 떠보니 폐기차역 모습의 연옥(煉獄) 같은 곳에 떨어져 있다. 그곳에 있던 크로노스가 저간의 사정을 알려준다. 셸리를 쫓던 악당은 원래 지옥에 가야 했던 나쁜 놈인데 술수를 부려 자신 대신 죄 없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고 수백 년을 살아남은 자다. 그 대신 연인 셸리가 지옥에 갔다. 크로노스는 에릭에게 까마귀의 힘, 불사의 능력을 부여해 이승으로 돌려보내줄 테니 악당을 잡아 오라고 제안한다. 대가는 셸리의 구출이다.

화려한 액션에도 긴장감 못 느끼는 까닭

1994년작에는 거의 생략된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이번 리부트에서는 상영시간의 3분의 2가량 차지한다. 원작의 열혈팬이 아니라면 좋은 평을 받기는 쉽지 않을 터. 뒷부분은 화려한 액션이다. 불사의 능력자라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지 않는다. 누군가 뒤에서 주인공의 가슴에 칼을 꽂으면 박힌 채 다른 악당과 껴안아 공격한다. 브랜든의 아버지 이소룡을 전 세계적 스타로 만든 무술 영화처럼 이런 장면 연출에선 합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잔인한 장면의 행진이지만 긴장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반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슷한 장르 영화로 <존 윅> 시리즈가 있다. 존 윅도 설정상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이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있다. 그런데 <더 크로우>의 에릭에게서 그걸 느낄 수 없다. 왜? 애초부터 사람이 아니고, 총에 맞든 칼에 맞든 끄떡없으니까. 판타지 장르는 이런 존재(언데드)를 좀더 세밀하게 리치(Lich)로 분류한다. 그래도 이번 리부트 영화의 에릭은 저렇게 신체 훼손을 당하면 치유되기 전까지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1994년의 진짜 ‘천하무적’ 에릭보다는 조금 더 진화했다. 아마도 그것 역시 원작의 설정일 것이다. 만듦새가 나쁜 영화는 아니다. 반영웅 서사를 담은 영화들은 주인공에 맞서 싸우는 악당들조차 묘하게 끌리는 은밀한 매력이 있다.

1994년 영화 <크로우> 촬영 중 브랜든 리의 어이없는 죽음

/레딧

/레딧

2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브랜든 리(사진)는 평생 ‘이소룡의 아들’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다. 1965년생으로 <크로우>(1994)를 촬영하던 1993년 총기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지금은 환갑을 앞둔 노장 배우가 됐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은 우인태(위런타이) 감독의 1987년작 <용재강호>.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당시 광고 포스터에는 “전설적 수퍼·스타 李小龍 타계, 그로부터 14年-그의 아들 李國豪(이국호), 당신 앞에 우뚝 섰다!”라고 문구가 쓰였다. 이국호는 그의 중국 이름(리궈하오)이다.

<크로우> 촬영사고는 이렇게 일어났다. 영화에서 악당은 불사신 에릭에게 리볼버 권총을 쏜다. 이런 장면을 찍을 때는 대부분 모형 탄을 채우고 실제 쏠 때는 탄두가 없는 공포탄을 쓴다. 그런데 브랜든 리에게 발사된 총엔 어찌 된 영문인지 총열에 탄두가 끼워져 있었다. 악당 역할을 맡은 조연 배우는 공포탄이니 안심하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공포탄의 가스압으로 총열에 끼워져 있던 탄두가 날아가 그대로 브랜든 리의 배에 맞았다. 촬영장 인근 병원에 실려 가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브랜든 리는 사망한다.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다 보니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음모론이 만개했다. 당시 브랜든 리가 총을 맞는 장면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고, 국내 개봉 당시 마니아들 사이에서 “저 대목이 실제 총이 발사돼 이소룡 아들을 죽게 만든 장면”이라는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다. 사실 그 장면은 재촬영돼 교체됐다. 실제 브랜든 리가 복부에 진짜로 총을 맞는 장면은 세상에 나온 적 없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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