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인격 형성에는 그가 사숙하는 누군가가 있었고, 영화가 지목하는 사람은 ‘미국 내 암약하는 공산주의자 사냥’이라는 경력을 거쳐 권력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로이 콘이다. 콘이 트럼프의 롤모델이라는 것이다.
제목: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캐나다
상영시간: 122분
장르: 전기, 드라마
감독: 알리 아바시
출연: 세바스찬 스탠, 제레미 스트롱, 마리아 바카로바 외
개봉: 2024년 10월 23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수입/배급: ㈜누리픽쳐스
사실 내키지 않았다. 우선 포스터. 너무 안 닮았다. 포스터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앉아 있고, 후견인처럼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오바마인가’라고 생각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 트럼프가 출마한 계기가 공개석상에서 오바마가 트럼프를 조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막상 영화를 보니 트럼프 역을 맡은 배우 세바스찬 스탠이 캐릭터 연구는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나 몸짓은 닮았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대표 캐릭터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윈터 솔저다. 반면 제레미 스트롱이 맡은 로이 콘 변호사를 볼 때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콘은 실재 인물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때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 혐의로 사형당하는 데 역할을 한 반공 인사다. 매카시 파동 기록사진을 보면 콘은 전형적인 유대계 백인의 외모를 가졌다.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제레미 스트롱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사회를 보고 돌아와 실제 젊은 시절의 도널드 트럼프와 콘이 기자회견을 하는 사진을 찾아보니 말년의 콘은 영화 속 인물과 꽤 비슷했다. 스트롱 역시 프로 배우였다.
트럼프가 사숙했던 인물
영화 제목에서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건 2004년부터 트럼프와 딸 이방카 등이 출연했던 미국의 TV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였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트럼프 강성 지지자 상당수가 <어프렌티스> 덕분에 트럼프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훨씬 더 옛날, 부와 성공에 강박을 가진 젊은 사업가 시절 트럼프의 이야기다. 영화 속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을 ‘셀럽’으로 만든 저 리얼리티쇼의 상징적인 대사 “너 해고!(You’re Fired!)”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제목은 어프렌티스였을까. 사전에는 수습생 외에 ‘도제가 된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트럼프의 인격 형성에서는 그가 사숙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고, 영화가 지목하는 사람은 바로 ‘미국 내 암약하는 공산주의자 사냥’이라는 경력을 거쳐 이제 권력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콘이다. 콘이 트럼프의 롤모델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인연이 상류층이 교류하는 한 사교클럽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변호사인 그의 고객은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 야구팀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 조지 스타인 브레너 같은 유명인사도 있었지만,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을 장악한 거물 마피아도 있었다(영화는 그 사교클럽의 손님 중에는 나중에 언론재벌이 되는 루퍼트 머독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슬럼화된 호텔을 개축해 트럼프 타워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트럼프는 당시 뉴욕 시장의 절친인 콘을 이용해 세금감면 혜택을 받아낸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과정에서 콘은 트럼프에게 세상을 보는 자신의 인생 법칙, 처세술을 전수(apprentice)한다. 그가 제시한 인생철칙은 셋이다. 첫째, 무조건 공격하라. 둘째, 아무것도 인정해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을 부정하라. 셋째,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겼다고 주장하고 절대로 졌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아는 미국 45대 대통령이자 현재 재선 도전자의 모습과 겹친다.
트럼프 측 “가짜 영화의 뻔뻔한 허위 주장”
트럼프는 자서전 <거래의 기술>을 쓰기 위해 방문한 언론인 앞에서 자신의 인생 원칙이라며 저 세 가지 법칙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거론한다. 자신이 그 법칙을 누구로부터 전수했는지는 생략한다. 동성애자였던 콘은 1986년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는데 주위에 발병 사실을 숨겼다. 영화 속 트럼프는 콘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신체 접촉을 겁낸다. 아마도 사실이리라. 미국에서 이 영화는 때마침 대선 한 달 전인 지난 10월 11일 개봉했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공개되자 트럼프 대선 캠프 측은 “이 가짜 영화 제작자들의 뻔뻔한 허위 주장을 물리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실제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던 출세작 <거래의 기술>
로이 콘으로부터 인생 철칙 세 가지를 전수했다는 영화의 주장을 두고 정말 저런 비슷한 이야기를 트럼프가 했던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과거 트럼프를 조사했던 자료를 살펴봤다. 주간경향은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표지 이야기로 다룬 적 있다. 당시 나도 한 꼭지를 맡아 썼는데 제목은 ‘<거래의 기술>을 보면 트럼프가 보인다?’였다. <거래의 기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대표 저서다. 미국에서 1987년 출간됐는데,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한국에서 출간할 때는 공저자 이름이 빠져 있으나 지금은 잘 알려져 있다. 토니 슈워츠는 뉴욕타임스 기자, 뉴스위크 편집자를 거쳐 경제경영서 저자로 유명한 인사다. 말이 공저지 사실상 대필한 책이다. 영화에서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을 쓰기 위해 그를 찾아온 슈워츠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 철칙을 언급한다.
슈워츠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대학 명예교수 등과 함께 낸 책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에서 <거래의 기술>을 쓸 당시의 뒷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트럼프의 경영능력이나 사업능력은 ‘형편없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가 벌인 사업 대부분은 망했지만, 책에는 그가 벌인 사업 대부분이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것처럼 쓰게 했다고 슈워츠는 주장했다.
<거래의 기술>을 쓴 뒤 트럼프는 슈워츠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대선 출마를 앞두고 슈워츠가 잡지 ‘뉴요커’와 인터뷰를 하자 전화를 걸어와서는 “나는 당신이 지독한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거, 그걸 꼭 말하고 싶었어. 인생 잘 살아”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트럼프답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