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14일(현지시간) 베트남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환영 인파 사이를 걸어가고 있다. 베트남 정부 포털사이트
“정말 멋진 만남이군요. 마치 ‘어떻게 하면 미국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리 같아요.”
지난 4월 15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베트남 방문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냉소적인 반응을 내놨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베트남과 중국의 밀착을 경계하는 미국의 불편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진핑 주석의 베트남 방문으로 베트남과 미국의 관세 협상이 쉽사리 타결되기는 어렵겠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진핑 주석의 베트남 방문 기간에 양국은 공급망 및 생산 협력, 철도와 도로 인프라 개발, 인공지능과 디지털 경제 협력 등 45개 협정에 서명했다. 일반적으로 국가 정상 간 방문에서 10~15건의 협정이 체결되는 것과 달리 45건의 협정이 체결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중국과 베트남을 잇는 도로, 철도 연결망 사업 협정만 7개나 됐다. 중국 입장에서는 베트남과의 교통망 연결이 일대일로 정책의 숙원 사업이다. 철도와 도로 인프라 건설을 통해 베트남 경제가 중국 시장과 공급망에 편입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이커머스로 판매되는 물건이 육로로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까지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베트남, 중국 쪽으로 완전히 기운 건 아냐
하지만 트럼프가 우려한 것처럼 베트남이 중국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 측에서는 이번 시진핑 주석 베트남 방문으로 양국이 ‘운명공동체 건설을 심화’했다고 발표했지만, 베트남은 ‘미래공유체’라고 표현했다. 시진핑 시대에 등장한 중국의 핵심 외교전략인 ‘운명공동체’는 실질적으로 친중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아세안 10개국 중 공식적으로 중국과 운명공동체로 표기하는 국가는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3개국이다. 2023년 12월 시진핑 주석의 베트남 국빈 방문 당시에도 중국은 운명공동체를 주장했지만, 베트남은 줄곧 ‘미래공유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일부 외신은 ‘베트남이 친중 국가로 전환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베트남은 ‘미래공유체’라는 단어를 고수하며 중국과는 경제적 협력만 추구하고 외교·안보에서는 철저히 선을 긋는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은 2045년까지 국민소득(GNI) 1만3000달러를 달성해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부족한 기술과 자본은 미국·중국 가릴 것 없이 외부 협력으로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국가안보와 전략적 독립성만큼은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중국과의 협력은 철저히 경제적 실익을 위한 것이며 정치·외교적 영향력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중국이 베트남과의 회담 직후 곧바로 캄보디아 운하 건설에 대한 금융 지원 협정을 체결한 것도 이번 베트남 방문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시진핑 주석이 베트남을 떠나 캄보디아를 방문한 당시 중국과 캄보디아는 운하 건설을 위한 11억5600만달러 규모의 금융 협정에 서명했다. 중국 국유기업인 중국도로교량공사(CRBC)가 건설해 40~50년간 운영하다 캄보디아 정부에 돌려주는 방식이다. 이 운하 건설은 베트남의 국가안보에 민감한 사안이다. 메콩강 최하류 국가인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운하 건설이 수량 조절 및 수질 변화에 영향을 미쳐 메콩 델타 지역의 농업·수산업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지역은 베트남 전체 쌀 수출량의 95%, 과일 생산량의 70%, 수산물의 60%를 책임지고 있는 ‘식량의 보고’다. 더 나아가 이 운하는 중국 해군이 실질적으로 주둔 중인 캄보디아 림(Ream) 해군기지와 연결된다. 중국 전투함이 이 운하를 따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까지 수시간 만에 진입할 수 있게 되면 베트남 입장에서 국방 위협으로 직결된다. 중국이 베트남에서 충분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면 베트남이 극도로 경계하는 이 운하 사업을 즉각 지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견제에 정면 대응보다 실리 택해
중국의 캄보디아 운하 건설 지원 협정이 확정된 다음 날인 4월 18일 미국 국방 전문매체 ‘19포티파이브’는 베트남이 미국으로부터 F-16 전투기 24대와 수송기 C-130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베트남이 경제적 협력과는 별개로 안보와 국방 문제에서는 중국에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특히 러시아 무기를 주로 사용해온 베트남이 미국산 무기 수입을 추진한다는 점은 양국 간 전략적 협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중국의 남중국해 전략에서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베트남과 미국의 군사협력이다. 또한 베트남이 미국 무기 체계를 받아들이면 수십억달러의 미국 방산 무기 수입으로 관세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에 대한 불만은 그 후에도 이어진 듯했다. 복수의 미국 언론은 트럼프가 4월 30일 베트남 통일 50주년 기념행사에 미국 고위급 외교관들의 참석을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진 이 행사에서 미국의 불참은 베트남 측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에 불신과 견제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이에 정면 대응하기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5월 17일 베트남 정부는 트럼프 그룹이 투자한 15억달러 규모의 하노이 인근 부동산 개발 사업을 최종 승인했다. 이는 2024년 9월 투자 협약 체결 이후 8개월 만의 승인이다. 트럼프 그룹은 2029년 완공을 목표로 골프장, 리조트, 테마파크를 건설할 예정이다. 승인이 떨어지자 트럼프 일가는 즉시 추가 베트남 투자에 나섰다. 5월 19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차남 에릭 트럼프는 조만간 호찌민시를 방문해 ‘트럼프 타워’ 건설 계획을 점검할 예정이다. 베트남 언론 VN익스프레스는 트럼프 그룹이 호찌민 인근에도 추가 골프장 및 리조트 개발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그룹이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사실은 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에 대한 불신이 누그러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미국과 베트남의 관세 협정도 조만간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호찌민|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