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베트남 ‘제2의 도이머이’…정부 조직 최대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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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럼 베트남 서기장이 호찌민 정치아카데미에서 ‘베트남 시대’를 선언하고 있다. / 베트남 공산당 홈페이지

또 럼 베트남 서기장이 호찌민 정치아카데미에서 ‘베트남 시대’를 선언하고 있다. / 베트남 공산당 홈페이지

“정부 조직 20% 감축.” 1986년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가 선언된 이후 베트남에서 사상 최대 개혁 바람이 불고 있다. 2024년 12월 4일, 베트남 내무부 장관은 베트남넷(VietNamNet)과 인터뷰에서 “정부 부처를 30개에서 21개로 줄인다”고 밝혔다. 교통운송부, 농업농촌개발부, 정보통신부, 노동보훈사회부 등 5개 부는 각기 재정부, 건설부, 자연자원환경부, 과학기술부, 내무부로 흡수 통합된다. 이외에도 통신, 정유, 전력 등 핵심 19개 국영기업을 관리하던 국가자본관리위원회는 폐지하고 재정부로 기능을 이관한다. 사회보장청과 강력한 권력 기관인 국세청과 관세청도 20% 조직 축소 대상이다. 국세청은 디지털 세무 시스템을 도입해 인력 감축에 대응해 운영할 예정이다. 관세청은 베트남 정부의 무역 규제 완화 정책에 따라 통관 절차를 간소화해 업무량을 줄인다. 해당 정부 조직 축소 개편안은 지난해 11월 25일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승인했고, 국회상임위원회를 통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번 조직 개편안은 그동안 베트남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4월 말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이번 조치는 공무원을 포함한 공공기관 인력 10만여명이 구조 조정 대상이다. 베트남 국영 언론과 해외 언론 모두 이번 조치를 ‘혁명’이라 평가하고 있다.

행정업무 개혁…“새로운 발전의 시대 연다”

베트남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중에 ‘달리면서 줄을 서라(Vua Chay Vua Xep Hang)’는 모순적인 말이 있다. 절차를 정비할 시간이 없지만, 긴박한 상황이니 실행과 정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에서 쓰는 표현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백신 안전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절차를 과감하게 축소해 백신부터 투여하면서 뒷수습도 함께했던 상황에 들어맞는 표현이다. 지난해 11월 25일 베트남 당서열 1위인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는 정부 조직 축소 개편안이 승인된 당 중앙위원회 폐막 연설에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급작스러운 정부 조직 개편안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달리면서 줄을 서라”며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정부 조직 구조를 축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럼 서기장이 말한 ‘놓칠 수 없는 국가 발전의 황금 같은 기회’는 무엇일까. 지난 1월 29일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매체 ‘디플로매트’는 ‘안정적인 GDP(국내총생산) 성장’, 강력한 외국인 직접 투자금 유입’, ‘급증하는 수출량’, ‘서구권 국가들에 매력적인 무역 파트너로 주목받고 있는 점’을 베트남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황금 같은 기회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베트남의 복잡한 관료 시스템과 부정부패, 느리고 불친절한 절차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만들고 있어서 베트남이 더욱 성장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최대 수혜를 입었던 베트남 입장에서 트럼프 2기 체제의 중국과 화해 분위기는 또 다른 위기로 다가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관료 시스템 개혁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또 럼 서기장은 호찌민 국립정치아카데미에서 르엉 끄엉 국가주석을 비롯한 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원회 서기 등 핵심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발전의 시대-베트남 인민의 부상’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날 연설에서 “베트남의 시대가 오고 있다.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있는데 이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개혁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특히 “관리하지 못하면 금지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며 관료들의 책임 회피적 규제 태도를 지적했다. 응우옌 딘 끙 전 중앙경제관리연구소장은 베트남 감사원 산하 언론과 2025년 1월 31일 인터뷰에서 “제도가 병목 현상 중의 병목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응우옌 딘 끙 소장은 또 럼 서기장의 정부 조직 축소에 대해 적극 지지하며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반드시 바뀐다”며 도이머이 정책 전후의 베트남을 사례로 들었다. “쌀이 부족해 수입하던 베트남이 1986년 도이머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3년 만에 쌀 수출국으로 변모했다”며 정부 조직 개혁 역시 짧은 시간 내에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했다.

빠른 속도로 선진국 진입 위해 초강수

베트남 정부는 1945년 건국 이래 3단계 발전을 하고 있다고 자주 언급한다. 1975년 통일(1단계), 1986년 도이머이 개혁개방(2단계), 건국 100주년인 2045년 선진국 진입(3단계)이다. 베트남은 3단계 발전에 성공하기 위해 2022년 11월 ‘2030년 마스터 플랜’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7500달러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해마다 세계은행이 각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전 세계의 중산층에 해당하는 상위중소득국가 그룹을 발표하는데 베트남은 이제 문턱에 다다랐다. 2023년 7월 1일부터 2024년 7월 1일까지 기준으로 상위중소득국가의 요건은 1인당 GNI가 4516~1만4005달러인데 2023년 베트남 GNI는 4110달러였다. 2024년 베트남 GDP가 7% 성장해 GNI도 비슷한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2025년에는 상위중소득국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위중소득국가에서 그다음 단계인 고소득선진국 진입은 쉽지 않다. 1990년대 세계화 이후 상위중소득국가에서 고소득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 체코 정도에 그친다. 또 럼 서기장이 정부 조직 개편이라는 초강수를 둔 또 다른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베트남이 2045년까지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빠른 속도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변혁이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인 못지않게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이다. 1975년 미국과 전쟁이 끝났지만 1979년까지 캄보디아, 중국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1980년대에는 집단 농장체제와 미국과 중국의 경제 제재로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300만명 이상이 기아에 허덕여 쌀을 수입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1986년 내부 갈등 끝에 어렵게 도이머이 개혁개방 정책이 선언됐지만, 관료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개혁은 금방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1989년 개인 농지 소유 확대 및 자유 시장이 도입되면서 쌀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 지금은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1990년대부터 한국,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와 경제협력을 하면서 ‘빠르다’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하는 곳이 베트남이다. 이번 정부 조직 개편 과정 중에 많은 진통은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베트남의 개혁적인 발전이 기대된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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