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외딴방>

신경숙 작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경숙의 <외딴방>은 ‘여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당사자의 눈으로 그린 ‘자전소설’이다. 자전적 고백과 허구적 소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자서전은 무엇보다 당사자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사실적 충동에 지배된다면, 소설은 상상을 통한 허구의 창조를 장르적 특성으로 지니고 있다. <외딴방>은 자서전의 사실성과 소설의 허구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글쓰기의 동력으로 삼아 작가 자신이 여공으로 살았던 한 시대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개성적 방식이 이 작품을 199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정전의 반열에 올려세운다. 신경숙 특유의 내면의 글쓰기와 사실적 재현의 결합은 이 작품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한국문학이 산출한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이라는 찬사를 안겨준 요인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감정 경험’ 복원
작품이 그리는 시대는 작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상경해 산업체 특별학교의 학생이면서 구로공단의 여공으로 일했던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다. 작가는 서른일곱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 가리봉동 3층짜리 건물의 후미진 방에서 오빠, 외사촌과 함께 3년을 산다. 열여섯에 그곳에 들어가서 열아홉에 그곳에서 나오면서 작가는 여공에서 대학생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작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언어로 옮기지 못한다. 그 시절로의 회귀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체 특별학교 동창생 하계숙이 전화기 너머에서 던진 힐난은 아픈 자극제가 된다. “너는 우리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니.” 이 지적을 들으면서 작가는 구로공단의 그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장벽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도망쳐왔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려면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찾아야 한다. 작품은 글쓰기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 그 물음으로 끝난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작가는 과거 여공 시절의 ‘나’와 글을 쓰는 지금의 ‘나’를 교차시키고, 사실과 픽션이 중첩되는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면서 그때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한다.

문학동네 제공
‘나’는 동남전기주식회사 여공으로 일하면서 산업체 특별학교 야간 학생으로 공부했던 당시 직접 목격한 노동 현실과 생활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한다. 작품에는 저임금과 단순 반복 노동, 노조 설립 운동과 회사의 방해 공작, 남성 감독관의 성추행, 파업 농성과 탄압, 벌집 형태의 열악한 주거환경, 공순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이 다녔던 야간고등학교의 환경, 그들의 신체 체험과 그들이 나누었던 자매애, 그들의 어깨를 내리누른 가족부양의 부담 등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여성 노동자들의 세밀한 풍속화가 그려져 있다. <외딴방>이 그린 여성 노동자들의 초상은 1980년대 한국문학이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전투적 노동운동이나 총체적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민중문학이 주변으로 밀어낸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과 생활의 체험,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경험을 복원한 모습이다.
가닿으려는 진실에 젠더 정치성 결여는 아쉬움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충실한 재현으로도 그리지 못한 영역이 남아 있다. 작품에서 그것은 희재 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로 나타난다. <외딴방>은 트라우마의 기억에서 도망치려는 ‘나’와 그 기억을 글쓰기 속으로 데려오려는 ‘나’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결의 기록이다. 희재 언니는 가난과 강도 높은 노동, 가족부양의 책임, 여성의 성에 유독 억압적이었던 가부장적 성문화 등 겹겹의 사회적 고통 하에 놓여 있던 당시 여공들의 삶을 압축하고 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대학생이 되고 작가가 되지만, 희재 언니는 끝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처절한 고통에 시달렸을 그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의 죽음에 자신이 연루됐다는 죄책감은 나를 그곳에서 도망치게 만든다. 희재 언니는 사귀던 남자의 아이를 밴 뒤 애를 지우자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는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한다.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자신이 희재 언니가 죽어간 방의 자물쇠를 채웠다는 사실을 글 속에 삽입한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희재 언니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 부탁을 하기까지 희재 언니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에 무심했다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회상과 고백이 결합한 작품에서 나는 잊고자 하는 욕망과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 사이를 맴돈다. 나는 죽은 희재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통되지 못한 언니의 진실을 쓰려고 한다.

1995년 12월 12일 경향신문 매거진X 지면에 실린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 / 경향신문 자료사진
“언니가 뭐라고 해도 나는 언니를 쓰려고 해. 언니가 예전대로 고스란히 재생되어질지 어쩔지는 나도 모르겠어. (…) 언니의 진실을, 언니에 대한 나의 진실을, 제대로 따라가야 할 텐데, 내가 진실해질 수 있는 때는 내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아니었어. 그런 것들은 공허했어, 이렇게 엎드려 뭐라고뭐라고 적어보고 있을 때 나는 나를 알겠었어.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보려고 해.”
언니의 진실과 나의 진실은 <외딴방>이 재현하려는 진실의 요체이고, 그 진실을 재현하는 일의 어려움이 나를 글쓰기에서 도망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런 까닭에 진실의 추구는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타자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나’의 윤리적 노력으로 연결된다. 나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타자의 진실에 응답하는 나의 윤리적 책무다.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타자를 자기로 환원하거나 자기 안에 갇혀 자신만을 읊조리는 나르시시즘적 행위가 아니다. 자기 재현과 타자 재현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외딴방>이 이룩한 문학적 성취다.
나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트라우마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앞 문장을 따라 반짇고리 속을 빠져나오다 멈추고서 마음의 심층 속으로 더 깊이 숨어버리는 색실이나 깨진 단추들도 있다. 자라가 제 목을 제 몸 깊숙이 숨겨버리듯, 끝끝내 숨어버리는 것들의 진실을 억지로 끌어낼 수 없었다. 쉽게 끌려 나오지 않고 숨어버리는 것들의 진실이 언젠가는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심미안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가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발견한 ‘여성적 글쓰기’ 형식은 억압적 자본주의와 폭압적 정치 체제하에서 사라져간 여성 노동자의 진실을 복원하는 문학적 장치가 된다.
그러나 <외딴방>이 가닿으려는 희재 언니의 진실에 노동자 계급 의식이나 성적 주체로서의 욕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작품이 주체적 행위성을 갖지 못한 희생자로서의 여공, 욕망의 언어를 갖지 못한 탈성화된 여공의 재현에 머문 것은 여성 노동자의 젠더 정치성보다는 죄책감과 연민이라는 익숙한 감정 정치에 더 의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외딴방>이 힘겹게 그려낸 여성 노동자의 진실이 정말로 충분한가,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아쉬운 대목이다.
<이명호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