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지킬앤하이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1인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퍼포머의 해석에 따라 시공간과 캐릭터가 다르게 펼쳐진다.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퍼포머 최정원, 고훈정, 백석광, 강기둥 / ㈜글림아티스트·㈜글림컴퍼니 제공
광장은 수개월째 각자의 주장을 다투는 시위로 가득하다. 산야와 주요 문화재들, 수많은 민가가 기록적인 산불에 휩싸였다. 지난 4개월여 겪어낸 수많은 정치적·사회적 사건 사고가 복기된다. 법과 정의를 노래하는 이들의 거듭되는 번복과 보편적이지 않은 행보가 동기화된다. 불신과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 혼돈의 시국에 연극 <지킬앤하이드>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장기 상연 중인 것은 어떤 시대적 무의식의 발현일까. 세상의 표리부동을 읽어내려는 시민들의 궁여지책이 통한 것일까.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선과 악을 극단적 이중인격으로 표현한 이 작품들은 동시대의 다양한 군상을 떠오르게 한다.
원작인 스코틀랜드 출신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의 단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1886)은 고딕호러물(호러와 로맨스를 결합한 문학장르)의 시조격이다. 발간 직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근현대 이중인격 서사의 기준이 됐다. 1인 연극 <지킬앤하이드>(게리 맥네어 극본, 이준우 연출, 채석진 음악, 이강욱 액팅터그, 남경식 무대, 신동선 조명, 권지휘 음향)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지킬 박사의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이 주된 화자인 것도 비슷하다. 한 명의 퍼포머(최정원·고훈정·백석광·강기둥 분)가 어터슨을 비롯해 최소 7명, 최대 열댓 명의 등장인물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신해 이끌어간다.
조명과 음향으로 재창조된 공포의 공간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반원형 소극장 무대에는 문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 옆에 놓인 작은 의자와 테이블, 옷걸이가 전부다. 퍼포머가 입장하기 전에 관객들은 중앙에 놓여 있는 톱햇(Top Hat·영국 신사를 대표하는 원통형 모자. 마술사 모자)에 호기심을 보인다. 퍼포머는 등장하자마자 이 모자부터 조심스레 옷걸이에 건다. 상황에 따라 이 모자가 비범하게 사용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어터슨으로 분한 퍼포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며 무대를 연다. 퍼포머는 어터슨의 의뭉스러운 친구 엔필드로 분하며 악마 같은 하이드와의 일화를 털어놓는다. 하이드의 공포스러운 발소리와 어린 소녀의 발랄한 달리기 소리가 무대 좌우에서 입체적으로 울려 퍼지며 마치 돌비사운드처럼 객석을 지나는 순간 관객들은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길 가다 부딪힌 어린 소녀의 뼈가 부서지고 피가 쏟아지도록 짓밟은 하이드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관객을 런던 뒷골목 그로테스크한 문 앞으로 안내한다. 이어지는 참혹한 광경은 입체적인 조명디자인만으로도 환영처럼 텅 빈 무대 위에 피비린내를 뿌린다.
러닝타임 90분 내내 조명디자인과 음향디자인, 서사를 대변하는 역동적인 음악만으로 새로운 공간이 계속 생겨난다. 영상이나 LED 화면 없이도 퍼포머의 액팅과 대사에 따라 구체적인 장소와 공간이 팝업된다. 오랜 연뮤덕 입장에서도 새로운 경험이라 4명의 퍼포머 공연을 열흘에 걸쳐 차분히 보았다. 퍼포머의 해석에 따라 시공간과 캐릭터가 다르게 펼쳐진다. 작품을 여는 오프닝의 재기발랄함과 애드립, 엔딩의 모골이 송연한 공포의 질감도 퍼포머에 따라 모두 다르다. 살아 움직이는 여러 캐릭터를 영화적으로 연결한 영화적 공간(최정원)과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일상적인 실제의 공간(고훈정), 관객과 주고받는 에너지에 따라 변주되는 서늘한 에너지의 연극적 공간(백석광), 재기발랄한 액션이 난무하는 드라마적 공간(강기둥)으로 대표할 수 있겠다.

올해로 20주년 10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홍광호 분)이 시약을 투여해 하이드로 변신하기 직전 장면 / 오디컴퍼니 제공
화려한 LED 영상으로 구체화한 악마적 공간
반면 올해로 20주년 10번째 시즌을 맞이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레슬리 브리커스 극본·작사, 이수진 번역, 고선웅 윤색,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 데이비드 스완 연출, 원미솔 음악, 이모셔널씨어터 무대·영상)는 가득 채워진 대형 무대를 스펙터클한 악마적 공간으로 재편했다. 연극 <지킬앤하이드>가 인간 내면 깊숙한 보편적 악마성을 깨우는 작품이라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선악을 다룬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논 레플리카(Non Replica·음악과 대본 등 일부만 라이선스로 들여오고 연출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은 재창작하는 방식)로 오디컴퍼니가 들여와 한국형 <지킬 앤 하이드>로 재창작했다. 대표적인 넘버 ‘지금 이 순간’은 낭만적인 한국어 번안으로 극 중 등장하는 맥락과 상관없이 결혼식 축가로 애창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연극과 가장 큰 차이점은 강력한 로맨스 서사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 소설에는 없는 루시와 엠마 등 여성 캐릭터도 추가됐다. 지킬을 사랑하고 욕망하며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들이다. 뮤지컬은 지킬 박사를 치밀한 과학자로 설정해 시약이 가득한 무대 디자인으로 시각화한다. 1막에서 무대가 열리며 연구실로 확장되는 장면은 첨단 무대예술의 쾌거다. 지킬 박사가 시약을 마시고 하이드로 변신하며 부르는 ‘어라이브(Alive1)’는 대표적인 인기 넘버로 배우에 따라 다양한 애드립과 시그니처 액팅이 수반된다. 지킬과 하이드 역 배우(홍광호·최재림·신성록·전동석·김성철 분)가 무대 위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연기하는 넘버 ‘대결(The Confrontation)’은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로 손꼽힌다. 헤어스타일과 표정이 초 단위로 바뀌면서 이중인격의 고통을 표현한다.
지킬과 하이드는 우리 안의 빛과 어둠을 대변한다. 뮤지컬에서 하이드가 발동한 계기는 지킬 박사가 발명한 시약이지만 연극에서는 지킬 안의 내재한 욕망이다. 연극에서 지킬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 사실상 악마성을 키운 어터슨에게 책임을 돌린다. 어터슨 역시 이를 인정하고 더한 악행을 저지른다. 소설 원작과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 정의와 법을 수호한다고 믿는 평범한 이들의 무의식에 자리한 괴물성을 강조하며 의표를 찌른다. 당신은 선한 척하는 자인가 선한 자인가? 법조계에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명언이 있다. 탈무드에서도 ‘정의가 잠들면, 정의는 취소된다’고 했다. 악을 보고도 바로잡지 않고 키우는 것 또한 악마적 행위다.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5월 6일까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5월 1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