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내 안의 ‘헤르메스’ 다스리기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뮤지컬 <하데스타운>, 연극 <일리아드>, 오페라 <오텔로>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연 장면 / 에스앤코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연 장면 / 에스앤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의 신이다. 해석과 의미 전달, 교역과 교환, 발명 등 상업과 과학, 체육을 관장하는 중요한 신이지만 장난꾸러기 신으로도 불린다. 그가 관장하는 영역을 쥐락펴락하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와 도둑, 교활함까지 내포하는 헤르메스는 불신과 분노를 양산하기도 한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아나이스 미첼 극작·작사·작곡, 레이첼 차브킨 연출, 박소영 협력 연출)의 헤르메스(최정원·최재림·강홍석 분)도 주인공들을 돕는 것 같지만, 결국 파국에 이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송스루(song-through·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어지는) 재즈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안내자이며 진행자인 헤르메스는 첫눈에 반한 연인 오르페우스(조형균·박강현·김민석 분)와 에우리디케(김환희·김수하 분)가 평탄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음악밖에 모르는 무능한 남편이라 배가 고프긴 하지만, 잘살겠다고 자아를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던 에우리디케는 얼결에 하데스(지현준·양준모·김우형 분)와 만나 타운행 기차표를 받는다. 헤르메스의 부추김으로 기차를 타고 죽음과 광물, 재물을 관장하는 하데스에게 종속돼버린 것이다.

“폭력의 역사·일상 체험하는 작품들”

오르페우스는 뒤늦게 아내를 찾아 헤매고 헤르메스는 친절하게도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안내한다. 중앙에 회전판을 돌며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이 장면은 작품의 백미다. 오르페우스의 동선이 반복되면서 좁은 무대가 지하세계의 광활한 무대로 확장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다행히 아내를 찾아 집으로 가려는데 하데스가 그냥 보내줄 리 만무하다. 자신이 감동할 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니 오르페우스는 기후변화로 겨울이 길어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안 먹고 안 자고 작곡한, 세상을 구원할 곡을 연주한다.

하데스와 그의 아내 식물의 여신 페르세포네(김선영·린아 분)는 오래전 서로 사랑했던 초심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에 이른다. 내기에 졌음에도 하데스는 타운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에우리디케의 손도 잡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않아야 한다며 조건을 건다. ‘함정이 아닌 시험’이라고 헤르메스가 설명하지만, 하데스의 권력과 자신의 나약함을 돌아보는 오르페우스는 지상으로 가는 내내 의심의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탈출 직전 돌아본다.

1인 연극 <일리아드>(데니스 오헤어·리사 피터슨 공동집필, 함유선 번역, 김달중 연출)를 이끌어가는 음유시인이자 주인공 ‘내레이터’도 신화 속 헤르메스와 기 싸움을 벌인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를 동시대 시선으로 각색한 연극 <일리아드>의 객석은 공연 시작 20분 전부터 빠르게 채워진다. 프리쇼(공연 시작 전 배우들이 무대 위에 나와 작품 속 세계관을 공유하는 퍼포먼스)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와 관객의 소통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객석 분위기와 내레이터의 콘셉트에 따라 근황 토크(군인 콘셉트의 김종구와 아코디언 연주자)부터 세상사 토론(홈리스 콘셉트의 최재웅과 드럼 연주자), 타로점을 통한 인생상담(집시 콘셉트의 황석정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 벌어진다. 객석과 무대는 어느새 기원전 12세기부터 2024년을 아우르는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내레이터는 연주자와 함께 신들에 의해 조작된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 한복판, 트로이 장군 헥토르와 그리스 장군 아킬레스의 대결을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내레이터가 언급하는 헤르메스의 교활함은 정의롭고 가정적인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친우인 파트로클로스를 어떻게 처참하게 죽이는지를 묘사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신들(헤르메스 포함)의 광기는 복수의 화신이 된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어떻게 잔혹하게 처단하고 시신을 훼손하는지 묘사한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이 아킬레스에 사정해 아들의 시신을 받아오는 장면과 헥토르의 갓난쟁이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내던져져 골이 깨진 장면을 내레이터는 광기의 연기와 음악으로 전한다. 지구 각지의 전쟁사를 기원전 사르곤(인류 최초의 국가)의 정복부터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숨도 쉬지 않고 낭독하는 10분 가까운 이 장면은 <일리아드>의 하이라이트이자 고통의 극대화이다. 불신과 분노가 씨앗이 되어 벌어진 폭력의 역사들을 극단적으로 체험하는 장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를 놓는 것”

일상에서도 양분된 불신의 비극은 허다하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셰익스피어 원작·키스 워너 연출·카타리나 카스트닝 리바이벌 연출·카를로 리치 지휘)는 100여명의 풀 오케스트라 연주와 100여명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웅장한 서막으로 폭풍우를 뚫고 전쟁에서 승리해 귀환하는 오텔로(테너 이용훈·마르코 베르티 분) 장군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오텔로는 그를 질투하는 측근 이아고(바리톤 프랑코 바살로·니콜로즈 라그빌리바 분)에 의해 아내 데스데모나(소프라노 흐라추히 바센츠·홍주영 분)를 의심하기 시작해 광인이 돼 결백한 아내를 교살한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는 의심과 불신, 불안의 전령인 이아고를 악의 화신이자 신을 대변하는 자로 묘사한다.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나 <일리아드>의 내레이터처럼 방백(무대 위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대사)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아내는 결백하다. 모든 것이 이아고의 모략이었음을 깨달은 오텔로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는 죽은 아내에게 기어가 마지막 키스를 한 뒤 불신과 분노로 상실한 자아를 되찾으며 숨을 거둔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세상을 구원할 곡을 연주해 아내 에우리디케와 하데스를 벗어날 수 있게 됐을 때의 ‘자아 복원’ 혹은 ‘기후 정상화’ 과정을 연상하게 만든다.

<하데스타운>에서 헤르메스가 노래하듯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개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냥개가 아니다. 정말 두려운 개는 머릿속에서 울부짖는 개”다. 그 울부짖음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머릿속을 뒤엉키게 함”을 이 세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헥토르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 오텔로와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처럼 영원히 헤어진다. 이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일까?

중요한 건 분노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하데스타운>은 유일하게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며 막을 내린다. 커튼콜에서 마이크를 끄고 전 출연진이 합창하는 넘버 ‘잔을 높이 들어’는 분노를 다스리며 지금에 이른 인류의 희망을 노래한다. <오텔로>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으로 8월 25일까지, <일리아드>는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라이선스 재연으로 9월 8일까지, <하데스타운>은 토니상 수상작인 브로드웨이 작품 라이선스 재연으로 10월 6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이미지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