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도시 4>가 촉발한 ‘스크린 독점’ 논란
1000만. 한국 영화계에서 흥행 대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 같은 수치다. 2024년 기준, 한국 인구수가 약 5175만명인 만큼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하는 상업영화는 대부분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다. 한국의 15세 이상 인구수는 약 4627만명이다. 이에 따라 특정 영화의 관객이 1000만명이라는 것은 ‘한국 15세 이상 인구 4~5명 중 1명이 같은 영화를 본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해당 수치를 유사한 오락거리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1982년 시작한 프로야구의 역대 최고 관객동원 수치는 2017년 달성한 840만688명이다. 지난해는 810만326명을 동원했다. 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총 144경기 중 41경기쯤 치른 5월 14일 기준, 296만1205명을 동원했다. 전국 5개 야구장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야구경기의 하루평균 관객은 약 7만2000명이다. 수치대로라면 올해 약 741만6000명을 더 모을 수 있다. 이로 인해 프로야구는 사상 첫 1000만 관객을 달성할 수 있을지 주목받는다. 즉 관객 1000만이라는 수치는 프로야구가 한 시즌 내내 흥행을 이어가야 달성할 수 있는 꿈의 숫자라는 의미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입장권을 사서 관람’하는 오락거리 중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는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여가임을 수치가 증명한다. 실제로 상반기도 채 끝나지 않은 올해 1000만 영화가 이미 두 편이나 탄생했다. 지난 3월 24일 영화 <파묘>는 개봉 32일 만에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역대 32번째, 한국 영화로는 23번째 1000만 영화다. 곧바로 33번째 1000만 영화도 탄생했다. 지난 5월 15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범죄도시 4>다. <파묘>보다 10일이나 빠른 개봉 22일 만에 세운 기록이다.
연이은 1000만 영화의 탄생에 업계는 반색 중이다. 그런데 <파묘>의 1000만 달성 때와 달리 <범죄도시 4>를 두고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계에서 터져 나온 <범죄도시 4>의 ‘스크린 독점’ 문제다.
상반된 기록이 보여주는 현실
<범죄도시 4>의 1000만 관객 동원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시리즈물이다. 주연배우와 이야기의 큰 틀이 변하지 않는다. 형사 마석도 역할의 배우 마동석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결말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의 빈틈은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력, 이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드는 웃음이 메운다. 예를 들어, 배우 마동석이 가진 힘 센 이미지가 과장되고 폭력적인 상황에 개연성을 부과하고, 장이수 역의 박지환이 이에 상응하며 재미를 만드는 식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마동석이 나쁜 놈들을 혼내준다는 단순·명확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오히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다”며 “코로나19 유행 이후 관객들은 검증된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을 잘 파고든 것”이라고 말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 역시 “주인공이나 서사구조가 반복되니까 관객들은 영화가 개봉했을 때 ‘돈을 주고 가서 볼 만한 것’인지 탐색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일을 생략할 수 있다”며 “범죄도시 시리즈에는 일종의 브랜드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범죄도시 4>뿐만 아니라 그 전작인 1~3편도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중 2편과 3편은 각각 1269만3415명, 1068만2813명을 동원하며 나란히 ‘1000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688만546명을 동원한 <범죄도시 1>과 합치면 세 작품 관객 동원 숫자만 3025만6774명이다. <범죄도시 4>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해당 시리즈는 이제 4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됐다. ‘한국의 15세 이상 인구수’와 맞먹는다.
<범죄도시 4>의 1000만 관객 동원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진기록이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범죄도시 4>가 개봉한 지난 4월 24일부터 1000만 관객을 돌파한 5월 15일까지 총 27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이중 한국 영화는 딱 7편이다. 4월 24일 <드라이브>, <모르는 이야기>, <여행자의 필요>, 5월 8일 <미지수>, 5월 15일 <그녀가 죽었다>, <내 손끝에 너의 온도가 닿을 때>다. 이중 독립영화가 5편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유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1000만 돌파가 확정된 5월 15일 개봉한 <그녀가 죽었다>가 유일하다. 쉽게 말해 <범죄도시 4>가 993만6307명의 관객을 모을 때까지 한국 상업영화는 단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다. 외국 영화로까지 범위를 넓혀도 상황은 비슷하다. 5월 8일 개봉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정도가 알려진 상업영화였다. 적어도 한국 상업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22일 동안 <범죄도시 4>를 보거나 영화를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것인가,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시간대가 맞는 영화는 <범죄도시 4>밖에 없던데요.” 지난 5월 15일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 앞에서 만난 A씨의 말이다. A씨는 “비도 오고, 생각보다 춥기도 해서 밖에 돌아다니기보다 그냥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며 “지난주부터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2주째 아는 영화가 <범죄도시 4>밖에 없는 걸 보고 그냥 이거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코엑스 메가박스는 <범죄도시 4>외에 <그녀가 죽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발견> 등을 상영했다. 이중 <범죄도시 4>가 제일 먼저 개봉한 영화임에도 가장 많은 상영관에서 짧게는 20분, 길게는 최대 1시간 간격으로 촘촘하게 상영했다. 이날 개봉한 한국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예정된 무대인사를 제외하면 두 개 상영관에서 최대 2시간 50분 간격으로 상영했다.
강남역 CGV, 잠실역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중 영화관 규모가 큰 코엑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은 각각 17편, 13편의 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하며 다양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범죄도시 4>, <그녀가 죽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발견>, <가필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심야 시간대에 한 번 상영하는 수준이었다. 이날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범죄도시 4>를 본 B씨는 “꼭 보고 싶어서 봤다기보다는 쉬는 날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마침 그 시간에 <범죄도시 4>가 상영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궁금해서 본 <파묘>와는 분명히 선택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개봉한 지 20여 일이 훌쩍 지나고도 <범죄도시 4>는 압도적인 상영점유율을 자랑했다. 상영점유율은 전체 영화 상영횟수에서 특정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5월 14일 기준, <범죄도시 4>의 상영점유율은 56.1%다. 즉 이날 스크린에 걸린 영화 중 56.1%가 <범죄도시 4>였다. 이마저도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가 개봉한 5월 8일을 기점으로 꺾인 것이다. 5월 7일에는 75.6%였다. 지난 4월에는 줄곧 80% 이상을 유지했다.
총 좌석 수 중 특정 영화에 배정된 좌석 수를 의미하는 ‘좌석점유율’은 상영점유율과 동기화된다. 그럼에도 좌석점유율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토대로 배정된 좌석 중 실제 관객이 입장한 수(판매량)를 의미하는 ‘좌석판매율’을 계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14일 기준, 57.2%의 좌석점유율을 자랑한 <범죄도시 4>의 좌석판매율은 8.2%였다. 총 136만2048석이 <범죄도시 4>에 배정됐는데 11만1652개 좌석만 판매됐다. 이는 곧 이날 영화를 본 관객 수다. “<범죄도시 4>를 보러 갔는데 그 큰 영화관에서 2~3명이 같이 봤다”는 증언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평일에 누가 영화를 보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주말 사정은 좀 낫다. 토요일인 5월 11일 좌석판매율은 20.9%, 일요일인 5월 12일은 19%였다. <범죄도시 4> 좌석판매율이 가장 높았던 시점은 개봉 첫 주 주말인 4월 27일 토요일로 47.5%였다. 이날 상영점유율은 81.8%였다. 즉 <범죄도시 4>는 단 한 번도 좌석판매율이 50%를 넘어본 적이 없다. 반면 영화 <파묘>의 개봉 첫 주 주말 좌석판매율은 2월 24일(토요일) 53.6%, 2월 25일(일요일) 58.6%였다. 같은 날 <파묘>의 상영점유율은 각각 51.8%, 52.2%였다. <파묘>는 시간이 갈수록 주말 좌석판매율을 높여갔다. 그 결과, 3월 1일 62%로 정점을 찍었다.
<범죄도시 4>가 누린 높은 상영점유율은 효과가 있었다. <범죄도시 4>가 개봉한 후 전국 영화관에서 하루 동안 약 2만1000회 각기 다른 영화들을 상영한 날이 있었다. 이중 약 1만7000회가 <범죄도시 4>였다. 상영점유율은 <범죄도시 4>가 개봉한 후 최고인 82%를 기록했다. 이날 이용 가능했던 약 290만개 좌석 중 256만8000개가 <범죄도시 4>에 배정됐다. 이날이 바로 <범죄도시 4>가 자체 하루 최고 관객 동원 기록(121만9038명)을 쓴 4월 27일이다. 초반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하면 그만큼 관객 수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 수치로 확인됐다. ‘영화의 힘’이 1000만명을 영화관으로 불러모으는지, ‘물량 공세’가 1000만까지 가기 어려운 영화도 기록을 세우게 해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파묘>는 1000만 영화에 등극할 때까지 누릴 수 없었던 혜택을 <범죄도시 4>는 받았다.
‘스크린 독점’ 문제인가, 현실인가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내버려 둬도 될 사안인가”. 지난 5월 2일 ‘한국 영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토론회’에서 영화제작사 하하필름스 이하영 대표가 <범죄도시 4>의 스크린 독점 문제를 지적하며 한 말이다. 이 대표는 “코로나19 유행 전에 비해 관객은 줄었는데 오히려 극장 수는 늘어나며 극장 간 경쟁이 과열 체제로 넘어갔다”며 “이런 상황에서 <범죄도시 4>라는 흥행 가능한 영화가 나오니 극장들이 앞다투어 관객 확보를 위해 스크린을 <범죄도시 4>에 배정해 독과점 현상이 났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독과점이라고 할 수 있는 50%선에서 하나의 영화가 스크린을 점유할 수 없게 제한하는 ‘스크린 상한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범죄도시 4> 흥행이 소환한 ‘스크린 독점’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수 스크린을 보유한 ‘멀티플렉스’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관객의 영화 선택 폭을 넓힐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운영 방식은 그렇지 않다. 멀티플렉스는 <범죄도시 4>처럼 대박을 낼 것으로 보이는 영화가 개봉하면 갖고 있는 모든 스크린을 내어준다. 관객이 멀티플렉스를 찾아도 영화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현행 멀티플렉스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극장이 보라고 하는 영화를 보는 체제”란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법은 있지만 이를 제한할 방법은 없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9조는 ‘한국영화의 상영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법에 따라 영화상영관 경영자는 매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간 상영일 수의 5분의 1 이상 한국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이른바 ‘스크린 쿼터제’다. 스크린 쿼터제는 외국영화의 공세에 맞서 한국영화를 보호하는 장치일 뿐, 한국영화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독점 문제는 막지 못한다. 그 결과 이른바 ‘빅5’라고 불리는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의 배급사와 손잡는 것이 이들 산하에 있는 CGV, 롯데시네마, CINE Q, 메가박스 등의 영화관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됐다. <범죄도시 4>의 배급사는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고, <파묘>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영화 산업의 수직계열화는 이미 완성 단계다.
수직계열화를 인정하면 일부 의문은 해소된다. <범죄도시 4>가 개봉한 4월 24일부터 1000만 관객을 달성한 5월 15일 사이에는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부처님오신날 등의 휴일이 있었다. 상업영화 개봉 시점으로 고려해볼 만함에도 나서는 영화가 없었다. 이를 두고 한 영화산업관계자는 “왜 굳이 <범죄도시 4>와 나눠먹기를 하느냐”며 “조금만 기다리면 1000만 관객 달성하고 알아서 비켜줄 텐데 그때 스크린 싹쓸이를 노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김 평론가는 “이제 와서 멀티플렉스 스크린 독점 문제를 지적해봐야 개선될 것은 없다. 법도 없지 않느냐”며 “결국 이들이 수익을 포기하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으로 변하라는 것인데 불가능한 말”이라고 말했다. 정덕현 평론가 역시 “이제 꼭 영화관에서 영화를 개봉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에서 탈피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같은 경우 OTT 등에서 개봉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영화 한 번 보는데 1만~2만원을 훌쩍 넘는 시대에 관객들에게 다양성을 담보하는 영화라고 봐달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미 관객들은 극장에서 볼 때 효능감을 줄 수 있는 영화들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극장을 찾지 않는 관객들은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가 아닌,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범죄도시 4>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5월 15일 상영점유율을 28.6%까지 한 번에 낮췄다. 목표를 달성하고 퇴장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남은 것은 <범죄도시 4>가 22일간 보여준 행보를 문제라고 제재할 것이냐, 현실이라고 인정할 것이냐다. <범죄도시 4>가 한국 영화계에 고민거리를 던졌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