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 빌라 반지하에 살다 고독사한 A씨(60)의 우편함에 신용정보고지서, 건강보험료 고지서 등 우편 10여개가 쌓여 있다. 서현희 기자
경향신문은 지난 3월 말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 반지하에 살던 60대 남성의 고독사 사건을 보도했다. 그는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하려 주민센터를 방문했지만, 예산이 소진돼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혼자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수개월이 지나 발견됐다. 다른 가난한 이들의 죽음처럼 그의 죽음도 잊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 복지 제도의 핵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리 없는 복지
2005년에 제정된 긴급복지지원법은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금전 또는 현물’을 직접 지원하도록 규정한다. 이 법이 제정된 배경에도 비극적 사건이 있다. 2004년 12월, 대구 불로동의 저소득층 가정에서 다섯 살 아이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30대 어머니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막노동을 하던 30대 아버지는 일거리가 없어 사실상 실직 상태였다. 가족 전체가 굶는 날이 많았고, 결국 둘째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찌할 줄 모르던 부모는 아이의 시신을 며칠 동안 장롱에 보관해 두었다. 사망한 아이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병원에 가본 적이 없었고, 가족은 기초생활보장의 혜택을 받지도 못했다.
이런 참혹한 사건 이후 긴급복지지원법이 제정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정책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긴급복지’를 위한 정책인데 예산이 떨어지면 중단되기 때문이다. 재료가 소진되면 영업을 종료하는 식당도 아니고, 어떻게 국가의 복지 서비스가 ‘예산 소진 시’까지만 제공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한국 복지 제도의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권리에 기반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 조건을 만족한 시민은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그걸 요구할 권리는 없고 국가가 반드시 제공해야 할 의무도 없다. 결국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면 뒤늦게 복지정책이 만들어지지만, 권리 기반으로 운영되지 않으니 또다시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빈민 구제는 지역을 불문하고 국가의 기본 기능 중 하나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복지 국가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고려와 조선에도 구휼(救恤)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이전 역사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바로 사회적 권리다. 이때부터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불쌍한 빈민을 도와주는 자선’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규정됐다. 이 권리를 국제적 수준에서 보장하는 것이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이고, 한국도 1990년에 가입했다.
사회적 권리에 기초한 제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유럽 사회국가에서 구체적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는 수혜 대상자의 조건을 규정하고, 그 조건에 맞는 모든 시민이 서비스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는 내용을 법전에 명문화한다.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시민과 국가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시민은 구직 활동에 필요한 현금 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는 그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시민은 국가가 요구하는 구직 활동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는 식이다. 나라마다 제도의 형태가 다르므로 사회 서비스에 관한 권리를 법령에 명문화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권리로 인정하는 한, ‘예산 소진 시까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정책’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정책은 그 자체가 권리 침해이기 때문이다.
선착순 서비스
한국의 복지정책은 정말 다양하다. 보건복지부에서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 안내 책자’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서비스가 있다. 그런데 이 안내서를 보고 있으면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서비스 목록이라기보다는 신용카드 회사나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부가 혜택 카탈로그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단, 아는 사람은 받고 모르는 사람은 못 받는다. 어딘가에 선물 꾸러미를 쌓아놓고, 눈치 빠른 사람이 알아서 찾아가는 경품 행사를 하는 느낌이다. 더구나 서비스 상당수의 예산과 지원 규모가 이미 정해져 있다. 긴급복지지원처럼 예산이 떨어지면 못 받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선착순 서비스’다. 앞줄에 서면 받고, 뒷줄에 서면 못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의 복지 제도가 권리 기반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복지 서비스가 반드시 전달돼야만 하는 이유가 없고, 전달되지 않아도 권리 침해로 보지 않는다. 받지 못한 사람이 억울할 뿐이다.
다소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한국에는 사회적 권리에 기초한 ‘사회정책’이 없고, ‘불우이웃 돕기’처럼 시행되는 ‘복지정책’만 있다. 그래서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의 목적이 서비스 제공인지, 부정수급 방지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서비스 수혜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고,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증명하면서 국가의 시혜를 부탁해야만 한다.
누군가 ‘예산에는 한계가 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중요한 질문이다. 바로 여기에 유럽 국가들이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감수하는 이유가 있다. 권리 기반의 사회정책을 운영하면 재정 적자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은 사회 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수당을 받은 시민의 구직 활동을 강제하거나, 낭비라고 판단되는 의료비 사용을 줄이는 등)으로 재정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데, 한국처럼 ‘선착순 복지’를 시행하는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는 사회적 권리의 보장이라는 사회국가의 목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통제를 강화하는 것조차 사회국가의 퇴행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 수십 년간 온갖 종류의 복지정책이 한국에 도입됐는데,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이를 비판하면 ‘그런 정책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권리 기반 사회정책이 아니라면 차라리 도입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백지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 기회라도 있지만, 잘못된 원리에 기초한 정책을 한번 도입하고 나면 제대로 된 걸 만들 기회가 사라지고 만다. 현행 복지 제도를 권리 기반으로 재편하는 것과 아예 새로운 제도를 처음부터 만드는 것 중 어느 쪽이 쉬울까? 모두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