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의 진실’ 2심선 밝혀…담배회사 책임 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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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의 진실’ 2심선 밝혀…담배회사 책임 물을까

지난 1월 15일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이사장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른바 ‘담배소송’ 항소심 11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원고인 건보공단의 수장이자, 40년 경력의 호흡기내과 전문의로서 담배의 유해성에 관해 직접 변론했다. 그는 재판부에 “흡연은 명백한 폐암 발병의 원인이며 담배는 핵심적 발암물질”이라며 “담배가 일으킨 중독과 질병에 대해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사회 전체의 건강권을 부정하는 중대한 오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믿음을 달라”고도 했다.

건보공단의 담배소송은 어느새 11년 차를 맞았다. 공단은 2014년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민사)을 제기했으나 2020년 1심 판결에서 패소했다. 건보공단이 항소해 4년여 시간이 흘렀고 항소심은 이제 막바지 일정을 향하고 있다. 10년 넘게 진행되는 담배소송은 무엇을 두고 다투는 것일까. 건보공단은 “국민 건강에 유해한 성분을 포함한 담배를 제조·수입·판매하는 담배회사의 책임을 입증하겠다”고 했다. 국내에서 ‘담배소송’이라 불리는, 담배회사를 피고로 한 소송 중에 원고가 승소한 사례는 없다. 건보공단은 승소할 수 있을까. 이 담배소송의 의미, 쟁점, 전망 등을 정리했다.

■담배소송은 어떻게 진행됐나

건보공단은 2014년 4월 14일 국내 주요 담배회사인 KT&G(옛 한국담배인삼공사)·한국필립모리스·BAT코리아(현 BAT로스만스, 제조사 포함) 등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 상위 3사 및 제조사 1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갑년(‘갑년’은 하루에 피우는 담배의 숫자 ‘갑’과 흡연한 기간 ‘연’을 곱한 값) 이상의 흡연경력으로, 30년 이상 흡연한 사람 중에서 폐암의 편평세포암·소세포암, 후두암의 편평세포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건보공단이 지급한 급여비 약 533억원을 담배회사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바로 며칠 전인 2014년 4월 10일 대법원의 담배소송 판결이 있었다. 1999년 12월 장기 흡연 경험 이후 폐암 또는 후두암 판정을 받거나 이러한 암으로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국가와 KT&G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 15년간 법정 다툼을 벌였다. 결과는 원고 패소 판결. 국내 첫 담배소송은 1999년 9월 폐암 환자와 그 가족들이 제기했다. 이 소송을 포함해 유사한 담배소송 몇 건이 진행됐으나 모두 원고 패소했다. 건보공단이 제기한 담배소송은 대법원판결 직후에, 개인이 아닌 국가기관이 원고로 나섰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심을 받았다.

건보공단에서 담배소송을 처음부터 담당해온 임현정 법무지원실장은 지난 2월 7일 서울 영등포구 건보공단 서울강원지역본부 회의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담배소송에 관해 “국민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한 국가기관 당사자로서 흡연 폐해에 대한 담배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기한 소송”이라고 설명했다. 질병관리청·건보공단에 따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6만명(2019년 기준)에 달하고, 흡연으로 인한 건강보험 진료비 지출액은 연간 3조원(2023년 기준 3조2591억원)을 웃돈다.

대법원판결 직후라 건보공단의 담배소송 또한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건보공단도 오랜 준비 끝에 제기한 소송이었다고 임 실장은 말했다. “국가기관으로서 개인 소송보다는 훨씬 더 방대한 자료와 인력,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확보해 소송에 임했다”고 했다.

임현정 국민건강보험공단 법무지원실장이 지난 2월 7일 서울 영등포구 건보공단 서울강원지역본부 회의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임현정 국민건강보험공단 법무지원실장이 지난 2월 7일 서울 영등포구 건보공단 서울강원지역본부 회의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2020년 11월 20일 1심 판결에서 건보공단이 패소했다. 재판부는 담배회사의 유해 제조물 제조에 관한 책임은 물론 흡연과 해당 질병 간 발병에서의 인과관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건보공단이 항소한 까닭에 대해 임현정 실장은 “담배소송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에 변함이 없고, 1심 재판에서 쟁점별로 증거나 논리를 충분히 다투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담배소송의 쟁점은 무엇인가

1심과 마찬가지로 2심 재판의 쟁점은 다섯 가지다. ①흡연과 해당 질병 발병 간의 인과관계 성립 여부 ②담배회사 제조물의 결함 유무 ③담배회사의 불법행위 책임 유무 ④건보공단의 직접 손해배상 청구 가능 여부 ⑤공단의 손해액 범위 등이다. 1심 재판부는 다섯 가지에 대한 원고의 주장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보공단과 의료계, 금연운동단체들은 1심 판결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①번, 흡연과 질병 발병 간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꼽는다. 2014년 나온 대법원판결에서 원고가 패소하긴 했지만, 이 사건의 2심에서 고등법원은 폐암의 ‘선암’(의학적·역학적으로 흡연과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낮음)이 아닌 폐암의 편평세포암·소세포암, 후두암의 편평세포암에 대해선 인과성을 인정했다. 임현정 실장은 “공단은 법원이 인과성을 인정한 3개 질환만 한정 지어 사건 대상자를 특정해 소를 제기했음에도 1심 재판부가 폐암의 선암을 기준으로 판단한 선행 사건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반영한 부분이 아쉽다”고 했다.

명승권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대학원장(한국금연운동협의회 회장)은 지난 2월 10일 통화에서 “전 세계적으로 연간 800만명, 우리나라에서는 약 6만명이 흡연으로 인해 사망한다”며 “외국 연구를 보면 흡연자는 폐암 발병률이 비흡연자보다 10배 이상 높고, 국내 연구에서는 5배 이상 높다는 결과가 나와 있다. 담배는 모든 암 발병·사망 원인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고혈압, 당뇨병,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 등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비흡연자보다 흡연자의 수명은 10년 이상 짧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고 했다. 이어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담배를 발암성이 확인된 물질 그룹(4그룹 중 1그룹)으로 분류한다”며 “역학적·의학적으로는 흡연과 질병 발병 간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담배의 진실’ 2심선 밝혀…담배회사 책임 물을까

1심 재판부는 사건 대상 질환이 역학적으로 발생 원인·기전이 복잡다기한 비특이성 질환이라 전제하고 “비특이성 질환의 경우에는 특정 위험인자(흡연)와 비특이성 질환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어느 개인이 그 위험인자에 노출됐다는 사실과 그 비특이성 질환에 걸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양자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개연성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원고가 “(소송 대상자) 개인이 위험인자에 노출된 시기와 노출 정도, 발병 시기, 그 위험인자에 노출되기 전의 건강상태, 생활습관, 질병상태의 변화, 가족력 등을 추가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즉 흡연과 3개 질병 간 상관관계가 인정되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소송 대상자들이 흡연 외 다른 원인에 의해 해당 질병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원고 측이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②번 쟁점을 다시 설명하면, 건보공단은 담배회사가 담배의 유해성분인 ‘타르’와 중독성을 가진 ‘니코틴’을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담배를 생산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으며 첨가제 등을 사용해 흡연자가 쉽게 중독되게 했고(설계상 결함), 담배의 유해성·중독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아(표시상 결함) 제조물 책임법상의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③번 쟁점의 경우, 건보공단은 담배회사가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축소·은폐하고 ‘저타르’나 ‘저니코틴’과 같은 광고 문구로 담배가 덜 유해하다는 식으로 소비자를 기망했다고 주장한다.

1심 재판부는 담뱃잎을 태워 그 연기를 흡입하는 것은 담배의 본질적 특성이며, 담뱃잎에도 첨가제에 쓰이는 성분들이 포함돼 있고,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라 담뱃갑에 경고문구 등을 기재했다는 점에서 담배회사의 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또 1950년대부터 담배의 건강피해의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경고문구 등을 통해 흡연자들이 “흡연 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지위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흡연 개시 여부 또는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점을 주요 판단 근거로 삼았다.

담배사업법에 따라 담배 제조·수입·판매가 한국에서는 합법한 행위다. 국내외 담배소송에서 담배회사들은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과 담배를 끊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흡연에 따른 불이익도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담배회사들은 담배가 중독성이 아닌 의존성이 강한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명승권 교수는 “의사들은 담배가 단순히 의존성이 강한 게 아니라 명백히 중독성이 강한 제조물로 마약과 동일 선상에서 관리돼야 한다고 본다”며 “금연을 위한 약물이나 상담 등의 치료지원이 없을 때 금연 성공률은 5% 미만으로 매우 낮다. 담배 끊기가 어렵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까지 알지 못한다. 실제 표시상 결함이 없어지려면 ‘95%는 스스로 담배를 끊지 못한다’는 정도로 구체적인 위험성을 표시해야 한다”고 했다.

건보공단이 직접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지(④번 쟁점)와 관련해 재판부는 건보공단이 흡연 피해들자에 급여를 지출한 것은 담배회사들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라기보다는 국민건강보험법에 의한 보험자로서 계약상 의무에 해당하므로, 급여 지출로 인한 재정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고 봤다. 건보공단이 ‘직접 피해자’로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건보공단은 건강보험법상 지출 비용에 한해 제3자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소송 대상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는지 살피기 위해 위 세 가지 쟁점에 대해 판단, 건보공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송가액(⑤번 쟁점) 또한 따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담배의 진실’ 2심선 밝혀…담배회사 책임 물을까

■항소심에선 담배회사 책임 물을 수 있을까

건보공단은 2심에서는 흡연과 해당 질병 발병 간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공단은 소송 대상자 중 흡연 외 암 발생의 위험요인이 전혀 없는 1467명을 분류해 관련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소송 대상자 개별 인과관계를 증명하겠다는 취지다. 11차 변론기일 당시 담배회사 측 소송대리인들은 이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의무기록이 없는 환자가 있고 문진표 항목이 서로 불일치하거나, 흡연 기간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등 자료에 정확성·일관성이 없다는 취지로 맞섰다.

담배회사의 제조물책임을 따지는 쟁점과 관련해 건보공단은 1심 판단 이후 2022년 5월부터 2023년 1월까지 ‘고도 흡연자 흡연 경험 심층분석 연구’라는 질적 연구를 외부 전문가 집단에 의뢰했다. 연구진은 3465명 중 생존자 30명에 대해 면접조사를 수행, 이들이 흡연을 시작한 계기와 당시 흡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 금연 시도 결과 등을 수집했다. 면접 대상자들은 대부분 1960~1970년대에 흡연을 시작, 흡연 기간은 짧게는 35년 길게는 55년에 달했다.

면접 대상자인 1944년생 A씨(2003년 후두암 진단)는 군대 훈련소에서 ‘화랑’ 담배를 배급받은 것을 계기로 흡연을 시작했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면서 흡연을 지속했는데 성인 남성의 70~80%가 흡연하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했다. 정부가 금연을 권장하긴 했지만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1946년생인 B씨(2008년 폐암 진단)도 군대에서 흡연을 시작했는데 중독성 때문에 폐암 수술 직전까지도 담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연구에 참여한 김관욱 덕성여대 인류학과 교수는 지난 2월 11일 통화에서 “담뱃갑에 경고문구가 처음 들어간 것은 1976년, 경고문구에 폐암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1989년, 중독성을 표기한 것은 2009년에야 이뤄졌다”며 소송 대상자들이 흡연을 시작·지속할 시기에 담배회사들은 그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제품의 표시상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실제 면접 대상자들은 금연광고나 경고문구 등에 대해 기억나는 게 없다면서, 그나마 2002년 폐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의 금연 캠페인을 주로 떠올렸다”고 말했다.

임현정 실장은 “담배회사의 제품 제조 방식이나 과정은 담배회사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고 기존에 영업비밀을 주장하면서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에 제품의 결함, 불법행위 입증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이어 “2심에서는 담배회사 측의 문서 15건을 공개하도록 결정이 나왔고, 그 자료가 역시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일정 부분 가림처리돼 있지만 이 자료를 토대로 보건환경분석가의 의견서 등을 확보해 쟁점 입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고 했다.

기자는 KT&G·필립모리스·BAT로스만스 측에 각각 2심 재판 쟁점 등에 관한 의견을 질의했으나 3사 모두로부터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동일한 답변을 들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담배소송에서 담배회사의 책임을 물은 사례가 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이슈와 논점’ 제845호(2014. 05) ‘담배소송 관련 해외 사례 시사점’ 자료를 보면 미국에선 1950년대부터 담배소송이 진행됐다. 1960년대까지 흡연과 질병 간 과학적 증거 부족, 담배회사의 로비 등으로 승소한 사례가 없었다. 1964년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 책임자인 의무총감이 기존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흡연이 폐암 등을 유발해 심각한 건강문제를 초래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표하면서 흡연의 건강 피해는 널리 인정됐다. 이와 더불어 1970년대 이후 담배회사의 제조물 책임 관련 법이 개정돼 담배소송이 제기됐다. 담배회사들은 질병의 원인이 흡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담배회사가 위험성을 알렸음에도 소비자가 선택하는 것이므로 책임이 없다고 맞섰다.

지난해 12월 23일 서울시내 한 편의점의 담배 판매대 /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3일 서울시내 한 편의점의 담배 판매대 / 연합뉴스

그러다 1994년 담배회사 브라운&윌리엄슨의 연구원인 제프리 위건드 박사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담배회사 내부 문건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94년 46개 미 주정부가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진료비 손해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 1998년 ‘MSA(Master Settlement Agreemen)’라는 합의를 이뤘다. 판결은 아니지만 담배회사들이 주정부들에 2060억달러를 배상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담배회사들의 수백만 페이지의 내부문건을 대중에 공개한 계기가 됐다. 1999년엔 미 연방정부가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담배회사들이 조직적으로 흡연의 유해성을 숨기는 등 대중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조직범죄법 위반 소송을 제기해 2006년 최종 승소했다. 이 판결에서 담배회사들은 ‘흡연 위험을 속여왔으며 소비자가 더 중독되도록 의도적으로 제품을 설계했다’는 정정진술물을 언론에 공개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캐나다에서는 1997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담배손해배상법’을 제정했다. 위헌 논란 끝에 법 개정을 통해 관련 법을 정착시켰는데, 인과관계에 관한 입증책임을 완화하고 담배회사가 담배로 인해 흡연자들이 해를 입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국내에서도 2021년 담배 제조상 결함 정의를 명확히 하고 피해사실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내용의 ‘담배 책임법안’이 발의됐지만, 21대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한편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1998년 흡연자 약 110만명이 집단으로 3개 담배회사를 상대로 약 156억캐나다달러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흡연자들의 피해가 인정된다면서 2015년 1심, 2019년 항소심에서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임현정 실장은 “민사소송에서는 원칙적으로 원고가 주장 내용에 대한 전적인 증명 책임을 부담하는데, 공단이 1심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소송대상자의 의무기록을 포함한 증거자료 350여 건)를 확보해 제출했으나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전부 승소가 목표지만 일부라 하더라도 판결을 통해 대중을 상대로 판매되는 ‘제품’으로서의 담배의 위험성과 그 제조자로서 담배회사의 책임, 피해자들이 고통받은 폐암의 원인이 담배에 있다는 점을 인정받고 확인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양측은 오는 4월 23일 열리는 12차 변론기일에서 공방을 이어갈 예정이다. 건보공단 측은 2심에서 패소 시 상고 여부에 대해 “판결 선고가 나고 쟁점별 판시사항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공단 자체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국내 전문가들과의 협의·회의체 논의를 거쳐 결정할 것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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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