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 살해’ 무기징역 선고받았지만 재심서 무죄…재심제도 들여다봐야
법원, “경찰의 증거수집 위법, 회유·압박으로 인한 자백은 증거 못 써”

2000년 3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확정받은 김신혜씨가 지난 1월 6일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전남 장흥군 장흥교도소에서 나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은 무죄.” 이 말을 듣기까지 25년이 걸렸다. 2000년 3월 수면제 탄 술을 먹여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의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던 김신혜씨(48) 이야기다. 지난 1월 6일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 형사1부(박현수·강지성·변이섭)는 재심에서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경찰이 위법하고 강압적인 수사를 했다고 인정했다. 또 김씨가 한 자백은 수사기관과 주변인들의 회유와 압박에서 나와 증거로 쓸 수 없고, 다른 증거에 의해 범죄가 증명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번 재판의 결과는 오늘날의 수사·재판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49쪽 분량의 재심 무죄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봤다.
“친척들 추궁·동생 보호 때문에 자백”
사건은 2000년 3월 7일 일어났다. 이날 오전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의 한 버스정류장 앞에서 A씨(당시 52세)가 사망한 채 발견됐다. 경찰은 A씨의 딸인 김씨를 체포했다. 이후 김씨는 존속살해와 사체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8월 1심 법원이 김씨를 유죄로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때 김씨는 23세였다. 이듬해 12월 대법원에서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번 재심 무죄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형사사법 절차에서 지켜져야 할 무죄추정의 원칙과 적법절차의 원칙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명할 책임은 수사기관에 있고, 설령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법원은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해 범죄 수사는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이 원칙들은 범죄자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선 안 된다는 철학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경찰이 위법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했다고 봤다.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 김씨 집을 압수수색한 것이 대표적이다. 집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이기 때문에 범죄와의 관련성, 압수수색의 필요성을 법관이 신중히 심사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수사기관이 압수수색할 수 있지만, 당시 경찰은 영장을 받지 않은 채 김씨 집을 둘러보고 물건을 가져왔다. 재판부는 경찰이 압수수색 며칠 뒤 김씨로부터 압수물을 임의제출한다는 동의를 받았다는 것으로는 압수수색이 적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따라 집에 있던 노트 등의 물건은 위법 수집 증거이고, 이 물건을 기반으로 한 진술도 위법 수집 증거의 2차적 증거로 모두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게 됐다.

사건 발생 25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신혜씨(왼쪽)가 지난 1월 6일 전남 장흥군 장흥교도소에서 석방돼 박준영 변호사(오른쪽)와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가 했다는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있는지는 재심의 핵심 쟁점이었다. 김씨는 사건 초기 범행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는데 이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주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재심에서 김씨 측은 이 자백이 허위였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자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해졌음’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씨가 범행을 인정하며 뉘우쳐서 자백한 게 아니라 친척들의 강한 추궁과 가벼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회유, 동생을 보호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백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는 이렇다. 김씨의 친척들은 김씨가 동생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의심하면서 김씨에게 행적을 캐묻고 “경찰에 자수하라”고 했다. ‘성추행을 핑계로 내세우면 법정에서 참작이 될 것’이라는 조언도 했다.
재판부는 “20대 초반의 사회적 경험이 일천한 피고인(김씨)으로서는 자수하고 피해자의 성추행 사실을 이야기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했다. 구속 후 접견 온 친척에게 김씨는 ‘내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수사관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사람 취급도 안 한다’고 말했지만, 친척들은 김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공범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라’고 추궁했다.
경찰이 김씨의 자백 번복을 인지했으나 무시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도 있다. 판결문을 보면 김씨는 2000년 3월 13~14일 현장검증 때 범행을 부인하고 현장검증도 거부했다. 범행을 자백하던 피의자가 갑자기 범행을 부인한다면 경찰은 그의 진술을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지만, 현장검증 이후 작성된 추가 피의자신문조서는 없었다. 범행을 부인하는 진술을 일부러 듣지 않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경찰은 현장검증 이전에는 매일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경찰이 여러 장소에 김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범행 재연을 강요했다고 했다.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김신혜씨에 대한 재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 의원은 2016년 재심 요건 완화를 규정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연합뉴스
김씨가 당시 동생에게 준 만화책에는 “누나가 너가 혹시 사건에 말려들까봐 겁이 나서 자수부터 했는데 오빠랑 잘 상의해봐. 나는 결백해”라고 기재돼 있었다. 김씨는 검찰에서 다시 자백 진술을 했는데 재판부는 이것도 증거로 쓸 수는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수사 당시 피고인(김씨)은 (키)150㎝, (몸무게) 35㎏ 정도로 작고 마른 22세 여성으로, 이복동생들 외에는 아무도 피고인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변호인의 조력 없이 구속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며 “강압적인 경찰조사로 인해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됐고, 이러한 심리적 상황이 검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물적 증거도 명확하지 않다는 게 이번 재판부 판단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아버지 A씨의 위액에서 수면제 성분인 독실아민이 다량 검출된 것이 과연 김씨의 범행 증거라고 볼 수 있는지가 하나의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부검 때 아버지의 위 내용물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반면, 수면제 30알가량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또 수면제 30알로 독실아민 혈중농도 13.02ug/㎖가 과연 검출될 수 있는지, 독실아민 혈중농도 13.02ug/㎖에 의해 사망했는지도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계속 불복, 길어지는 재심 기간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사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수원노숙소녀 상해치사사건, 낙동강변 살인사건,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등은 모두 김씨 사건처럼 애초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들이다. 이중에는 20년 이상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도 있다. 이 사건들에는 대체로 수사기관의 강압 수사와 이로 인한 허위 자백 문제가 얽혀 있다.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범인을 정해놓고 증거를 범인에 맞춰 해석하는 식이다. 위법적 수사 관행뿐 아니라 수사기관과 법원의 인지편향, 법 적용의 오류, 약자에 대한 무관심 등이 오판의 원인으로 꼽힌다.
재심에서 김씨를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는 지난 1월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수사와 재판은 한 사람의 인생과 그에 얽혀 있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면 사건 속에서 보여주는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해석도 쉽지 않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김씨 사건은 법률가들이 삶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법적 구성요건이라는 틀 안에서만 너무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만든다”며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공부를 충분히 하면서 형사사건에서 사건 관계자의 말과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심이라고 하면 흔히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불법 연행과 고문, 감금이 동반된 과거사 사건을 떠올린다. 그러나 사법정책연구원의 ‘형사재심의 현황과 운용방안에 관한 연구(2024)’ 보고서를 보면 재심의 45.8%가 일반 사건이었다. 일반 재심사건 접수인원은 2002년 230명에서 2022년 1142명으로 20년 사이 5배가량 늘었다. 이 기간 일반 재심사건에서 무죄 등을 선고받은 인원은 4.75%인 524명이다. 524명은 수사·재판에 위법이 있었음이 인정된 것이다. 연구진은 “(일반 재심사건이) 가장 전형적이고 지속해서 문제 될 유형”이라고 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재심 절차와 요건이 까다롭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심 재판을 받으려면 재심 개시 절차를 먼저 거쳐야 하고, 확정판결을 깰 만한 아주 높은 개연성이 있어야만 한다. 특히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그 증거를 몰랐던 것이어야 재심이 허용된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한국보다 재심 기준이 낮다.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진은 “진범의 자백과 같은 기대하기 어려운 행운이 있어야만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어서는 안 된다”며 “설령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적법절차에 다른 수사와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재심사유를 인정받아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인정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6년 형의 확정판결 이후라도 유·무죄를 다시 다퉈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된 때는 재심사유에 해당할 수 있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김씨 사건은 재심 신청부터 무죄 판결까지 10년이 걸렸다. 2015년 11월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했으나 검찰이 불복해 항고, 재항고를 했다. 2018년 10월에야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확정됐다. 6년 심리 끝에 무죄 판결이 선고됐지만, 검찰은 지난 1월 13일 항소했다. 2심에서 재차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하면 재심 재판은 더 길어진다.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사건에서 검찰이 불복을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대법원은 법률심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법률적인 문제로 재심 불복 사유가 제한돼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사형제도와 오판 문제를 연구해온 이덕인 부산과기대 경찰행정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형사소송법에는 자백이 증거의 왕이 아니라고 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자백이 증거의 왕이고, 그 자백을 받쳐주는 보강 증거를 만들어내는 구조”라며 “그러면서 실체적 진실을 오염시키는 무리한 증거들이 자백의 뒷받침이 되기도 하는데 김씨 사건에서 나타났고, 그의 항변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관행처럼 판결이 나왔던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문을 품고 억울해하는 사람들도 체념하고 덮는 경우가 많다”며 “재심의 청구 요건이 까다로운 부분 등 재심제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