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당신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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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공연을 즐기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메리퇴진 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공연을 즐기고 있다. 정효진 기자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눈치를 보는 사람과 안 보는 사람이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논외로 한다. 나는 눈치를 심하게 보는 부류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할 말 못 할 말 가려가며 살아왔다. 반면 아내는 눈치를 안 본다.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산다. 나는 그런 아내가 늘 걱정이다. 혹시 아내가 쏟아낸 말의 불똥이 내게도 튈까 싶어서다.

아내처럼 사는 건 피곤한 일이다.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 무엇보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손해가 크다. 그것이 비난이든 질책이든 기회의 박탈이든 말이다.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시류에 반하는 말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아니다’라고 주장하면 무례하거나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낙인찍기 십상이다. 아무리 그 말이 옳아도, 아니 그럴수록 사람들은 ‘튄다’, ‘나선다’라며 손가락질한다. ‘누구는 몰라서 아무 말 않고 있는 줄 알아?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바보 만들어?’라고 하면서 말이다.

역사의 물줄기 바꾼 ‘NO’의 용기

더 힘든 건 자신이 속한 편에서 내쳐지는 일이다. 한편은 한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한편이다. 내가 속한 한편에 묻어가고 얹혀 가면 편하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나도 ‘예’라고 말하면 된다. 내키지 않아도 남들이 짜장면 시키면 ‘나도 같은 것’을 외치면 된다. 그러면 든든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또한 내가 속한 곳에 대한 의리이고 충성이다. 자기가 뭐라고 남과 다른 말을 해서 우리 진영의 대오를 흐트러트리고 적에게 빈틈을 보여주느냐 말이다. 그건 배반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신자’란 낙인처럼 가혹한 형벌은 없다.

많은 심리학자는 인간의 행복과 만족감은 외부 환경에 있기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통제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며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내적 갈등을 불러와 자신을 갉아먹을 뿐더러 결코 조직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42세의 로사 파크스(Rosa Parks)는 출근을 위해 버스를 탔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들었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미국 남부는 엄격한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제도화돼 있었다. 버스에서 흑인들은 백인들이 먼저 자리에 앉은 뒤에야 앉을 수 있었고, 이마저도 흑백 자리가 구분돼 앞 좌석은 백인을 위해 비워둬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운전사의 요구에 단호히 “NO”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그리고 공공질서 방해 혐의로 체포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그간 숨죽이며 살고 있던 흑인들이 각성하게 됐고,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미국사회의 기류를 바꾸는 도화선이 됐다. 침묵으로 순종하던 세태에 맞서 “NO”라고 외쳤던 한 사람의 용기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아내처럼 “아니오”를 부르짖으며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소신이 있어야 한다. 남의 말에 휩쓸리고 부초처럼 둥둥 떠다녀서는 안 된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정립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에 반하는 상황이 전개됐을 때 단호히 반대를 외칠 수 있다.

소신만이 아니라 문제의식과 비판 정신도 필요하다. ‘좋은 게 좋을 수만은 없다.’ 다수가 지지한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합리적이지도 않다. 무엇보다 권위에 맹종하지 않아야 한다. 한마디로 까칠해야 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용기도 요구된다. 남과 다른 생각을 밝히는 건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다. 모두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반대하고, 누군가는 내 말에 앙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가 가진 신념과 가치에 반한다면 그것을 말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니오’에 그쳐서도 안 된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안이 없는 반대는 힘이 없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공격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닌 명확한 이유와 이게 옳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필요하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의 말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입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단일대오를 강조하고 획일화를 요구한다면 결코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선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직장에서도 자신의 의사 표현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제도적 보호망을 갖춰야 한다.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 써나갈 ‘아니오’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의 교수이자 <기브 앤 테이크>의 저자인 애덤 그랜트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다”라며 “여기에 인생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아니오”라고 말할 때 느끼는 잠깐의 비난을 참지 못해 이를 묵인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YES와 NO,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을 때 그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어야 한다. 그 선택권을 갖는 것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저희 부하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무능한 지휘관의 지시를 따른 것뿐입니다.”​ 얼마 전 계엄 당시 병사들을 이끌었던 한 지휘관이 울먹이며 기자회견 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착잡했다. 한때는 촉망받던 장교에서 하루아침에 국가의 반역자가 돼 회한의 눈물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이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계엄 선포 당일,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담화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저 연설을 글로 정리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연설비서관이고, 그게 나였다면 과연 나는 “이건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십중팔구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을 확률이 높다. 그런 내용을 받아쓰라고 하지 않은 분들을 모셨다는 게 다행이고 나의 행운이었을 뿐.

나는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희망을 봤다. 내 아내와 닮은 20대, 30대에게서 희망을 봤다. 젊은 여성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아니오”를 외치는 모습을 울컥울컥하면서 지켜봤다. 그런 젊은이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더욱 융성할 것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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