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행정안전부는 ‘지역특성 MBTI’로 맞춤형 정책 수립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 진단도구로 마치 성격 유형처럼 지역 정체성 유형을 도출할 수 있단다. 심지어 우리나라 인구감소지역의 절반 이상이 INTP 유형으로 파악됐다는 황당한 분석까지 내놨다. MBTI 성격유형이 과학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 국가의 대표적인 부처가, 그 나라의 존폐가 걸려 있는 인구감소 문제를 다루는 분석도구로 그저 국민 사이에 유행하는 일종의 밈을 차용했다는 데 이 사건의 심각함이 있다. 작가 한윤형은 한국을 상식이 독재하는 공간이라고 규정했다는데, 이쯤 되면 그 상식의 기반조차 무너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과학적이기 위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런 세상은 모든 사람이 운동선수가 되는 세상만큼이나 이상할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꼭 과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과학자 중에 황당무계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람이 더 많다. 과학책을 읽는다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책이 알려주는 과학적 발견의 세계와 사회에서 필요한 과학적 사고방식의 거리는 멀다. 과학이 사회에 필요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첨단과학기술이 필요하지도 않다. 과학기술의 메카 미국에서 시민의 절반 이상은 창조론을 믿고, 그중 상당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확신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식에 대한 존중이지, 과학적 지식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과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상식의 기저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과학의 역할을 나는 ‘과학적 삶의 양식’이라 불러왔고,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는 ‘선택적 모더니즘’이라고 명명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이 과학적 사회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실천을 위해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한국사회를 한 걸음이라도 과학적 사회로 옮기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인권변호사 대통령은 황우석에 동조했던 인물을 과학기술정책의 리더로 만들려 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공포를 이용해 원전사업을 축소하고 대체에너지 사업을 준비도 없이 몰아붙였다. 모두가 잘 되길 바라마지 않았던 문재인 정권에서 창조과학자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가 됐고, 과학기술정책은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아무런 차이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게 흘러갔다. 코로나19로 한국사회가 마비됐을 때, 문재인 정부는 K방역과 K백신 개발을 외쳤지만, 지금 우리 손에 국산 백신은 없다. 해리 콜린스가 민주주의가 완성되기 위해서 왜 과학이 필요하다고 말했는지를 문재인 정부의 유산은 너무나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조차 과학적 삶의 양식이 스며들지 못하면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 특히 사회의 권력을 지닌 지도층의 사고방식이 비과학적이라면, 그 영향은 더욱더 빠르게 나타난다. 윤석열 정권은 바로 그런 사회의 거울이다.
과학이 무속을 대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과학이 무속을 대체하는 나라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적 기능을 무속과 종교가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사회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면, 과학은 감히 무속과 종교를 대체한다고 만용을 부릴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문제는 그 톨레랑스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적용돼선 안 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종교가 타락하는 맥락을 배워왔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할 때, 종교는 반드시 타락한다. 무속 또한 마찬가지다. 무속이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취미에서 벗어나 권력자를 움직이는 광신으로 나타날 때 권력은 반드시 타락했고, 사회는 신음해야 했다. 한국사회는 특히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층이 무속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기괴한 곳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가 일종의 예외라고 생각한다면, 최근 윤석열 정권을 흔들고 있는 각종 도사와 역술인 그리고 책사들의 향연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국사회는 무속적 삶의 양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더 심각한 건 그런 이들이 법과 제도를 쥐고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권력층에게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종교는 무속이다. 그들은 미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믿으며, 점쟁이가 회사 면접장에 앉아 있는 장면이 왜 심각한 사회적 질병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한국을 과학적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 과거의 생각은 잘못됐다. 우리는 한국의 권력층을 과학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과학은 라이프스타일이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과학자였다. 아키히토 일본 전 천황은 어류학 박사로 논문까지 썼다. 독일의 최장수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물리화학 박사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저엔 과학혁명의 흐름이 녹아 있었고,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 대부분은 과학기술자다. 최근 멕시코 대선에선 진보적인 과학자 부모의 영향으로 미국 버클리 공대에서 에너지공학을 전공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이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정치인이 꼭 과학자일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반드시 이공계 전공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세계와 비교해보면, 한국의 정치는 분명 무언가 잘못돼 있다. 최근 중국에서 저우광자오 전 중국과학원 원장이 죽었다. 한국엔 알려지지도 않은 이 과학자의 장례식엔 중국 최고 권부 구성원이 대부분 참석했고 시진핑 주석까지 나타났다. 나는 한국 대통령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한류스타에게 축전을 보냈다는 소식은 자주 들어봤어도, 훌륭한 과학적 업적을 발표한 과학기술자에게 전화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스웨덴과 싱가포르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온 한 과학자의 블로그를 발견하고 기뻤다. 그의 생각의 결이 나와 비슷해서 더욱 행복했다. 그의 블로그 포스팅 중 하나의 제목이 ‘과학은 라이프스타일’이었다. 한국 권력층을 비난하기보다 그 구절을 옮겨보기로 한다.
“과학은 회화, 음악, 문학과 함께 인간을 만드는 활동이며, 이 네 가지 활동이야말로 휴머니티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그 네 활동이야말로 인생을 바칠 만하다. 요즘에 드는 생각 중 하나는, 과학은 직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은 라이프스타일이다.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관한 문제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