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모두가 평등하게 막말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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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지난 4월 민희진 어도어 당시 대표의 기자회견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는 공적 공간에서 사용 가능한 표현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막말과 욕설을 쏟아냈는데, 오히려 이 점이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한국사회는 막말에 관대한 것일까?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막말의 기능

‘막말’의 사전적 의미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말의 내용과 표현 모두가 포함된다. 예컨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당신의 외모는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군요’라고 말한다면, 이건 막말일까? 표현은 정중하지만, 발언 내용의 무례함 때문에 막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반면 평범한 일상어에 습관적으로 욕설과 비속어를 덧붙이는 사람, 나이 어린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의 발언은 내용이 아니라 표현 방식 때문에 막말로 간주된다.

많은 사회에 ‘품위 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는 관습적 규칙이 존재하는데, 이 규칙이 일차적으로 다루는 대상은 언어의 내용보다 형식이다. 그래서 공적 공간에서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지 않는 것이 ‘교양인’의 기본 조건으로 생각된다. 이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사실이지만, 왜 그 규칙을 존중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상위문화와 하위문화의 구별이라는 전통적 문제, 그리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별이라는 근대 사회의 문제가 모두 개입돼 있다.

공적 공간이 저속한 표현과 욕설을 허용하지 않는 핵심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공적 대화의 기본 토대를 파괴한다는 데 있다. 막말이 난무하는 곳에서 합리적으로 대화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언어 교환은 말싸움일 뿐, 대화라고 할 수 없다. 막말은 사적 공간이나 친밀성의 관계에서만 조건부로 허용된다.

상위문화, 정확히 말해서 지배계급의 엘리트 문화는 막말을 배제하고 ‘교양 있는 언어’를 요구한다. 이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문화와 도덕을 사회 전체의 규칙으로 일반화함으로써, 지배 리더십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교양인의 언어가 필요하고, 그 교양인이란 바로 우리 엘리트 계급’이라는 식이다. 그람시는 이런 리더십을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결국 교양 있는 언어는 역설적 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공적 대화를 위한 기본 형식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트 집단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양인의 언어는 위선적 언어이고, 막말이야말로 진실한 언어라는 발상도 등장한다. 부패한 정치인의 비리 사건을 두고 ‘교양과 품위 있는 언어’로 토론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왜 XXX를 XXX라고 부르지 못해!’라는 분노가 치밀지 않는가? 막말이 일종의 저항 수단으로 생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위문화는 교양인의 언어에 대립하는 은어와 비속어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지배질서에 맞서 싸우려는 투사와 예술가는 욕설을 언어적 무기로 채택하기도 한다.

한국에 상위문화가 존재하는가?

방금 이야기한 내용은 현대사회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과연 한국에 ‘교양과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지배권력을 유지하는 엘리트 집단’, 즉 문화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갖춘 지배층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의사들이다.

한국에서 의사는 특권적 직업으로 간주된다. 소득 수준이 다른 모든 직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고, 의사를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보는 시선도 흔하다. 의사 중에는 기이한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의협 관계자들이 쏟아내는 막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사적인 술자리에서나 나올 저속하고 무례한 언어를 공적 언어로 사용하고,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볼 수 있는 조롱과 모욕의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교양 없는 엘리트, 상위문화를 파괴하는 지배계급,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를 구별하지 못하는 전문가 집단은 한국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의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막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정치인도 많다. 이는 ‘정치인의 품위 없음’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정치인은 교양인이 돼야 한다. 정치적 이념이나 진영에 상관없이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즉 상위문화를 실천하는 것이 지배 엘리트로 인정받기 위한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막말은 그런 인정을 포기하는 전략이다. 이는 시민 일반의 지지를 거부하고, 열성 지지자들에게 몰두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이런 전략이 가능한 것은 공적 공간이 교양 있는 언어로 구성돼야 한다는 규범 자체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에는 하위문화와 구별되는 상위문화, 정확히 말하자면, 문화적 헤게모니가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도 관습적 언어 규칙을 무시하고, 저속하고 거친 발언을 내뱉는 정치인이 있다. 그들에게는 대체로 ‘극우’나 ‘포퓰리즘’ 같은 딱지가 붙는다. 포퓰리스트는 지배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고, ‘교양 있는 척, 똑똑한 척 말하는 엘리트 집단에 맞서 보통 서민들의 언어로 말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정치인의 막말을 포퓰리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내뱉는 비속어와 조롱은 정치적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일 뿐, 반엘리트 정서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한국에 교양인으로서의 지배 엘리트가 존재하는지 자체가 의심스럽다.

한국에도 물론 상위문화와 하위문화의 구별이 존재한다.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 콘텐츠가 분리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숏폼에 떠돌아다니는 정보가 다르다. 하지만 한국의 상위문화는 표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하위문화의 영향력은 ‘하위(sub)’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강하다. 주류 언론은 인터넷 밈을 모방해서 콘텐츠 장사를 하고, 사교육 스타 강사의 발언이 해당 분야 연구자의 영향력을 압도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집게손 논란’이 괴담처럼 떠돌면, 국가기관과 대기업이 납작 엎드려 사과한다. 민희진 전 대표의 기자회견은 하위언어가 주류 매체의 규칙을 압도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곳에서는 교양인의 언어가 놀림감이 되고, 막말이 모두의 언어로 기능한다. 그래서 공적 토론은 거의 예외 없이 비하와 조롱으로 끝난다. 모든 사회 영역이 미세한 계급관계로 구성돼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균질하고 획일적인 것이 이 사회의 특징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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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